손석희 저널리즘
정철운 / 메디치미디어 / 280쪽
(2017. 11. 1.)
손석희는
지위와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관두고, 모두의 비난과 의심을 한 몸에 받으며 수년간 살얼음판을 걷는 길을 선 택했다. 그리고 불의의 시대에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손석희로 인해 한국의 저널리즘을 논하는 우리의 수준은 높아졌다. 물론 그의 저널리즘이 완벽했디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 나 그가 완벽을 추구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손석희는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그는 공평하게 공격적이었다.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불편부당한 언론인이자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세월호 참사와 박근해-최순실 국정농단 국면에서는 정의로운 저널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을 해소시 켰다. 그는 저널리즘의 이론과 현실을 절묘하게 조합해〈뉴스 룸〉의 진회를 이뤄내고 대중적 인기까지 거머쥔, 어찌 보면 한국
언론사(史)에서 유일무이한 캐릭터다.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한국의 언론환경에 비춰보면 그는 더욱 특별한
존재다.
(P.8)
“방송 시작 3분 전. 스튜디오의 내 자리에 앉아 주머니 속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뉴스
타이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방송 몇 개가 나가고 나면 내 얼굴이 잡힐 것이다. 적어도 문 화방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리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최대의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 리본 을
양복 것에 달지 않고 옷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달았던 것이다.”
그날은 결국 리본을 달지 못한 셈이었다.
“나는 뉴스를
시작하는게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자기합리화의 싸움이었다. 화면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붉어지는 내 얼굴을 느낄수록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뉴스시간 내내 양복 깃에 가려 반쯤 보일락 말락 했던 리본은 그대로
썩어빠진 내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행동에 손석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손석희는 이날 밤
한잠도 못 잤다고 적었다. 그는 “내 자신에게 책임져야 할 지극히 '인간적' 양심의 문제였던” 일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렇게 일요일이
왔다. 그리고 일요일 밤,〈뉴스데스크〉에서 '공정방송 쟁취'리본을 달았다.
(P.34)
“대한민국 청년들은
군대에서부터 졸속과 전시와 무사안일주의를 강요받고 또 배운다. 그들이 사회로 나와도 그런 식의 획일화되고 비생산적인 군사문회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임을 자랑 삼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기형적으로 맞물려 존재한다.”
“이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경제구조적 모순이 불로소득을
최선의 덕목으로 정당화해주고 그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손꼽아주는데, 거기서 생겨난 눈먼 돈들은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서
부정한 유착과 비극적 이반을 부채질하여 결국엔 그 구조적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계속 반복시키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경제적 잉여가치는 그것을 '생산해낸 사람들'에게 분배되도록 해야 한다. 그 생산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으로 그것을
독점하고 세습해가는 경제구조 속에서는 결국 사회성을 잃은 무뇌아 같은 개인만이 자라날 뿐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 비슷한 걸
하고 돌아온 사람이 영웅이 되어 반쪽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그 밑으로는 친일파라는 독버섯들이 어이없게도 되살아나 기득권을 형성해 오늘 이때까지
잘도 사는 나라. 심지어는 일본군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까지 지낸 나라. ... 그 외에도 예로 들 말은 얼마나 기습이 터지도록
많은가.”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의 급속한 확대, 그에 따른 텔레비전 매체의 막강해진 영향력, 그리고 그 영향력을 이용한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전파와 우민화 정책, 순서의 착오는 있을지언 정 우리 텔레비전 문화의 역사와 현상은
그렇다.”
(P.40)
손석희 저널리즘의 출발은 공정보도 파업과 공영방송 노동 조합 활동에서 비롯된
언론노동자로서의 각성, 이에 따라 생성된 강한 언론윤리의식, 저널리즘에 대한 사명감이라 볼 수 있다. 최장기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월간《별지 12월호 인터뷰 에서 손석희는 노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노조를 하는가,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 활동은 불가피합니다. 이게 우리 방송 현실의
비극인데, 거기에 국민의 눈과 귀를 대신한다는 우리 직업의 특수성이 더해집니다. 노조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지요.”
(P.45)
손석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터뷰였다. 그리고 그 무기가 강력할 수 있었던 건 '이
인터뷰로 출세나 이득을 바라지 않는 다는 전제가 있어서였다. 그가
대중이 원하는 진실을 공급할 수 있었던 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양심'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얻으려하지 않음으로써 언론인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얻었다. 이것이 저널리스트로서 손석희가 가진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손석희는 2006년〈100분 토론〉300회 기념 인터뷰에서도 “좁은 인간관계가 오히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가
쌓이기 시작하면 굴레가 된다. 내 방식의 인터뷰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공격적 인터뷰를 위해 인터뷰이와의 인간관계나 방송 진행자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접고 자신을 고립시킨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언론학자 강준만은 자신의 책 《손석희 현상》에서 “그에겐 하늘을 찌를 정도의
강한 자부심이 있고, 이게 그의 고독을 지켜주는 동력”이라고 적었다.
(P.56)
그는 자신의 주관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다. 2005년 1월 8일 손석희는 <시선집중>에서 말했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이 말은 '손석희 어록'이란 이름으로 퍼졌다. 그가 방송에서 주관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는 발언이었다.
2005년 10월 21일자《한겨레》 인터뷰에서 손석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과 관련해 이렇게 답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치괸에 따라 공적 영역인 방송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의 의견이 투영된다면 프로그램의
생명력을 잃는 것이죠. 진행자는 균형을 잡고 가능하면 많은 의견들을 다양하게 담아 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P.67)
언론은 바른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았고, 권력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했다.
우리가 그런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유가족들은 박근혜를 불신하는 만큼 언론을
불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정말 믿을 수 있는 언론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20세기에서
송건호와 리영희라는 걸출한 언론인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뤄놓은 언론민주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손석희는 건강한 시민 사회의 편에서 정론을
보도하고자 노력하며 '의지'를
계승했다.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