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 학고재 /
384쪽
(2017.11.12.)
영화가 유명해져서 책을
선택했는데..
막상 영화는 반쯤 보다 갑자기 일이 있어 보기를 중단했었는데
아직 다
보지 못하고 있다.
책마다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면 이 책은 추운 겨울에 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나가기 조차 싫은 날
집안에 틀어밖혀서 다시 한번 꼭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를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 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P.9)
......네가 기어이 나를 동쪽으로 부르는구나. 너희가 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 하나, 나는
대로를 따라 너에게로 갈 것이니 너희들의 깊은 산성은 편안할 것이다. 너는 또 강화도로 가려느냐. 너의 강토를 다 내주고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숨어서 한 조각 방석 위에 화로를 끼고 앉아 임금 노릇을 하려느냐. 너희 나라가 유신儒臣들을 길러서 그 뜻이 개결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P.28)
눈 덮인 행궁 골기와 위에서 초저녁 어둠이
새파랬다. 내 행전 구들을 달구는 장작불 연기가 퍼졌다. 푸른 연기가 흐린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삭정이 타는 냄새가 향기로웠고 침소 방바닥은
따스했다. 임금이 옷을 벗느라 비느적거리는 소리가 마루까지 들렸다. 사관이 붓을 들이서 하루를 정리했다.
안팎이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아침에 내행전 마루에서 정이품 이상이 문안을 드렸다. 안에서, 알았다, 마루가 차니 물러가라••••••는 대답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P.37)
- 경들이 박복하구나. 어찌하라. 내가 비를
맞으라랴
임금이 내행전 마당으로 내려섰다. 버선발이었다. 마당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 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겨우 터져 나오는 울음이 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세자가 달려 나와 임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지들은 마루에서 뛰어내려 왔지만, 임금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임금 이 젖은
옷소매를 들어서 세자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임금이 울음 사이로 말했다
-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하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세자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의 울음소리는 행각에까지 들렸다. 신료들이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영의정 김류가
울먹였다.
- 전하, 옥체가 상하시면 사직이 또한 위태로우니...... 김류의 말은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마루 위에서, 서안 앞에 앉은 젊은 사관이 벼루에 먹을 갈며 마당에 쓰러져 우는 임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관이 뜻을 들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낮에 비가 그쳤다.
(P.66)
너희가 선비의 나라라더니 손님을
대하여 어찌 이리 무례하나. 내가 군마를 이끌고 의주에 당도했을 때 너희 관아는 비어 있었고, 지방 수령이나 군장 중에 나와서 맞는 자가
없었다. 안주, 평양, 개성을 지날 때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간의 뜻을 전할 길이 없어 거듭 강을 건너 이처럼 멀리 내려오게 되었다.
너희가 니를 깊이 불러들여서 결국 너희의 마지막 성까지 이르렀으니, 너희 신료들 중에서 물정을 알고 말귀가 터진 자가 마땅히 나와서 나를
맞이야하지 않겠느냐. 나의 말이 예禮에 비추어 어긋나는 것이나.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
(P.77)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은 부딪치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말들이 가라앉는
침묵 속에서 신료들은 목젖을 떨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김상헌은 미룻바닥에 시선을 박고 최명길의 말을 기다렸다. 최명길은 말하는 자들의 입을
ㅏ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금이 팔을 뒤로 돌려 아픈 허리를
두들겼다. 임금 옆자리에서 세자가 콧물을
훌쩍였다.
(P.190)
송파강의 여울은 빨랐다. 지저귀는 물 위로 물비늘이 튀었다. 풀리는 강을 바라보면서
간은 망월봉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조선 행궁의 망궐례를 생각했다.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명을 향해 영신의 춤을 추던 조선 왕의 모습은 칸의
마음에 깊이 박혀들었다. ...난해한 나리로구나....... 아주 으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P.276)
조선 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은 구층 단 위의 황색 일산을 향해 읍했다. 멀어서
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 위에서 칸이 말했다.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정명수가 계단을 내려와 칸의 말을 조선 왕에게
전했다.
- 내 앞으로 나오니 어여쁘다. 지난 일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너와 더불어 앞일을 말하고자 한다. 조선 왕이 말했다.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정명수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조선 왕의 말을 전했다. 청의 사령이 목청을 빼어 길게
소리쳤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항해
절했다.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