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행복
(루소 사상의 현대성에 관한 시론)​
츠베탕 토도로프 / 고봉만 / 문학과 지성사 / 169쪽
​(2017. 10. 27.)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루소가 가장 매력적이라거나 가장 현명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력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루소가, 특히 프랑스에서 근대성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발견했다고 한 이유는, 근대사회는 루소 이전에 이미 존재했지만
그때까지 그것을 통찰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명했다고한 이유는 루소가 이백 년 전부터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개념과 주제를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루소를 읽으면, 우리는 그의 예언적인 통찰력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루소의 반대자들조차 우리가 아직까지 루소가 만든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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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루소는 스스로 자신의 사상 체계의 근본 원리로 보았던 이 대립에 대해 인간은 본원적으로 선(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첫번째 논문 『학문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이 불러일으킨 논쟁 속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행히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본래 선하다”. 루소는 말년까지도 그것을 자신의 '대(大)원fl'라고 했으며,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연의 인간이 선하다고 한다면, 인간의 인간은 선하지 않다. 또는 루소가 종종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선하지만, 인간들은 악하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은 타락했고, 동시에 불행하다. 이러한 반전(결과)은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제도나 사회 질서,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이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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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애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모든 동물들이 자기 보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성에 의해 안내되고 동정심에 의해 변화되어 인간애와 미덕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이기심은 사회 속에서만 생겨나는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각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존중하게 하여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악을 야기한다. 그것은 명성이라는 것의 진정한 동기이다.”
(P.21)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을 가진다. 그런데 인간은 그 둘의 조화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삼단 논법의 결론은 논의 과정 중에 내려진다. 인간이 불행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새로운 불행이 밝혀짐으로써 가까스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희망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두 가지 길. 즉 '시민의 길'과 '개인의 길'은 사회 상태로 추락해서 인간이 겪게 된 불행에서 인간이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야 하는데도 그럴 수 없으니, 인간은 불행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38)


  일반 의지는 루소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일반 의지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이 최고 원리는 개인의 자유 의지 안에 존재한다. 루소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달성하려는 사적 의지를 지니고 있 으며, 사적 이익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지인 일반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일반 의지는 개인이 가진 사적 의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일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자유 의지를 따르는 것이 된다. 일반 의지는 자기 입법의 원리이다. 일반 의지 속에서 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일치하며, 일반 의지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절대화된다. 일반 의지 에 따라 행동할 때 나도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남도 똑같이 자유롭고, 또한 나와 남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성립된다. 일반 의지는 항상 옳지만, 한 개인이 계몽이 안 되었을 경우 사리시욕을 추구하는 충동에 억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 의지가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와 이성의 계몽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김용민,『루소의 정치철학』, 인간사랑,2005,
(P.51)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루소가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 할 수 있다. 즉 공동체 생활에 도움을 주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잠재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침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평등의 원리를 무시하므로, 인류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경우, 그 선택이 초래하는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루소는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순서가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과중하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원시적인-그리스도교 이전의-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원시시대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용인될 수 없는 불관용intolérance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P.62)


  생프뢰saintPreux는 파리 도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마음속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공포를 품고서 세상이라는 이 광대한 사막에 들어왔다. 이러한 혼돈은 나에게 암울한 침묵이 지배하는 끔찍한 고독만을 선사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만큼 고독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중
속에 있을 때만 고독하다'(『신 엘로이즈』, Ⅱ, 231). 고독은 늘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의 최악의 형태는 군중 한가운데서 느끼는 것이다. 세계는 사막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숨 막히는 침묵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키케로3)가 말한 것처럼, 표면적이면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고독은 실제로는 진심이 담긴 의사소통이다.(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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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은, 가능한 한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지 말라는 교훈을 포함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 상태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사물의 본질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사회적 인간과 고독한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탐구해보게 하라. 어떤 유명한 작가[디드로를 말한다- 옮긴이〕는 악인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선한 사람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명제는 비록 격언까지는 아니었지만, 앞의 것보다 더 진실하고 이치에 맞다. 만일 악인이 혼자 있디편, 그는 어떤 짓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악인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그의 계략을 꾸미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속에서인 것이다"(『에 밀』, Ⅳ, 341).
(P.70)


  루소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견한 수단은 결국 이주 간단한 것이다. 루소는 교육의 두 가지 큰 단계를 상정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서는 상반된 두 가지 항 가운데 하나를 강조한다. 첫번째 단계를 루소는 '소극적 교육'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 교육'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 단계는 탄생에서 '철드는 시기'인 열다섯 살 무렵까지다. 두번째 단계인 사회 교육의 단계는 이 무렵에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의 목적은 우리안에 있는 자연인의 발달을 도와주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의 목적 은 다른 인간들과의 생활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것이다.
(P.116)


  루소에 따르면 대략 15세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며 사춘기를 경계로 아동과 성인의 시기가 구별된다. 아동은 육체적 존재이고 사회적 감정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존재이며 외적 자연, 즉 사물과의 관계로만 맺어져 있다. 인생에서 가장 비판적 시기인 사춘기를 지나면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정신적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루소는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에밀은 이 시기부터 문학을 접하면서 세계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를 넓히고, 사회관계를 연구하고 사회 조직과 제도를 학습한다.
(P.122)


  뒤몽Louis Dumont이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인간에게 강제한 어떤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전체론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런 질서를 강제하는 것이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건 우주에 내재한 질서, 자연 자체이다. 이런 질서에 대한 지식이 바로 전통을 이루며, 그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새로운 점은, 이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해독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임무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오컴과 몇몇 다른 철학자 들이 벌려놓은 틈새로, 종교 및 윤리의 영향력으로부터 근대 과학을 해방시키고,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근대성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 법칙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의 자유, 판단의 자유, 의지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방은 다양 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 이,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인간은 창조주가 마음대로 주무르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힘을 얻는다. 그 뒤를 이어 과학 혁 명이 일어난다. 베이컨Francis Bacon,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데카르트Rene Descartes를 생각해보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반드시 세계에 관한 진리일 수는 없으며, 진리는 차라리 나의 경험과 나의 이성에 의해 내가 알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P.137)


  루소에 의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타인의 존재를, 우리에게 머무는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아직 완전하게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도덕morale'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에게 선 혹은 악을 행할 수 있는데, 이 두 개념은 개인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자유liberte'의 세계로 들어 서게 된다. 왜냐하면 선 혹은 악의 실천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타인들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다. 루소에게 있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개인, 윤리도 자유도 없는, 언어도 문화도 없는 개인은, 간단히 말해 서 사회적인 삶이 없는 개인은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P.152)


  이 책의 제목인 '덧없는 행복'에는 루소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루소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에게 달려 있기에 우리는 결코 행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만한 행복이 자연의 질서에만 달려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늘 변함이 없기에 그에 맞추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한 관대함을 보이며, 그곳에 있을 테니까.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문제없을 것이다. '자기애amourdesoi,' 즉 자기 존재 방어의 필연성이 들림없이 개인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쪽으로 이끌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고, 이 타고난 불완전함이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 루소는, 우리가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 각자가 타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타인과 합일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우연적일 수 밖에 없거나, 혹은 루소가 결론짓듯이, 이리하여 “우리 자신의 나약함infirmite으로부터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나는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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