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2
F. 스콧 피츠제럴드 / 공진호 / 시공사 / 316쪽
(2018. 5. 22.)




  작별 인사를 고하며 딕은 엘시 스피어스의 충만한 매력을 깨달았다. 마지못해 단념한 로즈메리의 마지막 조각보다는 그녀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로즈메리는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스피어스 부인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로즈메리가 떠날 때 지니고 간 가면과 자극과 광휘를 그가 부여해주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유발한 
무엇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스피어스 부인의 우아함을 지켜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구석이 있었다. 전쟁이랄지 수술이랄지 남자가 그녀 자신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끝마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 남자가 그런 일을 치르는 동안에는 보채거나 빙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자가 볼일을 다 마치기까지 그녀는 안달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어딘가 높은 의자 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11)



  추크 호수에서의 지난 한 해 반마저 그녀에게는 헛되이지 나간 시간이었다. 계절의 변화는 도로 인부들의 작업복이 5월에는 분홍색, 7월에는 갈색. 9월에는 검은색, 봄에는 다시 흰 색으로 바뀌는 것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병에서 헤어나올 때 그녀는 새 희망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정말 많은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지만 딕을 제외하고 다른 생존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녀는 그들을 온화하게 사랑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보살핌을 받는 고아들과 같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반항아들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그들을 독립적으로 혹은 창조적으로 혹은 강인하게 만들어 주는 활력을 찾으려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그들의 비결은 그들이 잊은 어린 시절의 고투 깊숙이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니콜이 앓고 있는 병의 다른 면인 외면의 조화와 매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소유되기를 원치 않는 딕을 소유하는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P.40)



  긴 지붕이 덮고 있는 기선 선착장은 더 이상 여기도 아니고 아직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있다. 몽롱한 누런빛의 둥근 천장 아래는 메아리쳐 울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화물차가 우르릉거리는 소리, 트렁크를 쿵쿵 놓는 소리, 기중기가 귀에 거슬리게 달각거리는 소리, 처음 맡게 되는 바다의 짠 내음. 사람들이 시간이 있는데도 서두른다. 과거는. 대륙은 뒤에 있다. 미래는 배 옆의 빛나는 입구에 있다. 어스레하고 떠들썩한 뒷골목 같은 선창은 너무나도 헛갈리는 현재이다.
  전차에 오르고 나면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이 자동으로 조정되어 좁아진다. 안도라보다 작은 공국의 공민이 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무장의 책상 앞에 앉은 남자들은 선실만큼이나 생긴 모양새가 이상하다. 여행자들과 그 친구들의 눈이 오만하다. 그다음으로 쓸쓸한 기적 소리가 크게 울리면 불길한 진동과 함께 배가, 인간의 고안물이...... 움직이는 것이다. 부두와 그곳의 여러 모습들이 미끄러져 가고 잠시 동안 배는 그 모습들 기운데서 잘못해서 떨어져 나은 조각 같다. 부두의 모습들이 벌어짐에 따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P.86)



  딕에게 있어서 매력은 항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병원에서 숨을 거둔 그 가엾은 여인의 무모한 용기이든, 길 잃은 이 젊은이가 따분한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인 용기 있는 기품이든. 딕은 그 매력이란 것을 보관해둘 수 있을 만치 작게 해부 했다 - 인생의 전체와 부분은 질적인 면에서 다르며. 또 40대를 지나는 동안의 인생은 부분을 통해서만 관찰이 가능한 것 같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니콜과 로즈메리에 대한 사랑, 에이브 노스와의 우정, 종전의 부서진 세상 속에서 사는 토  미 바르방과의 우정-그런 관계 속에서 인격들은 그가 인격 자체가 될 만치 가까이 그에게 미락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양자택일을 할 어떤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마치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일찍이 만났고 일찍이 사랑한 어떤 사람들의 자아를 지니고 다니도록, 그리고 그들이 완전한 만큼만 완전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어떤 외로움의 구성 요소가 결부되어 있었다-사랑받기는 그리도 쉽다는 것-사랑하기는 그리도 어렵다는 것.
(P.158)



  그녀는 그간 안전을 보장해준 오래된 발판과 임박한 도약 사이의 미묘한 위치에 놓여 그 문제를 의식의 진정한 최전선으로 불러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도약하면 피와 근육의 성분 자체가 변화해서 내려앉아야만 하니까. 딕과 그녀 지신의 모습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확정되지 않은 모양으로 환상의 무도회에 휩쓸린 유령처럼 보였다. 몇 달 동안 모든 말은 어떤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고 곧 이것은 딕이 정하는 상황 속에서 해소될 것이었다. 이 심리상태는 전보다 한층 더 희망적일지 몰라도 (존재 자체를 위해 존재한 기나긴 세월은 그녀의 본성에서 일찍이 병으로 인해 죽은 부분들 중 딕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결괴를 낳았다-그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이 다른 본성 안으로 빈틈없이 미치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렇다) 그것은 여전히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가장 불행한 측면은 딕이 점점 냉담해진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현재 과음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니콜은 자신이 꺾일지 아니면 살아날지 알 수 없었다. 불성실로 넘쳐나는 딕의 목소리는 쟁점을 흐렸다. 그녀는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카펫이 깔리고 난 다음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도, 마지막에, 도약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후에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든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짐을 벗는 것, 멀었던 눈을 뜨게 되는 것이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니콜은 돈을 지느러미와 날개 삼아 변화하여 비상하도록 예정되었다. 새로운 형국은 경주용 차의 차대가 일반 자가용 차의 차체를 쓰고 오랜 세월 감취져 있다가 차체를 벗고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니콜은 벌써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별의 쓰라림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암울한 과정이었다.
(P.220)



  그녀는 탈의장에서 해변용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아직도 명판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소나무가 위로 둥글게 드리운 거리로 나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뭇가지에서 후다닥 달아나는 다람쥐, 나뭇잎을 톡톡 건드리는 바람, 멀리서 공기를 가르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있고 부동의 상태에 햇빛이 슬금슬금 비쳐 들어오더니 해변의 목소리들이 멀리 물러갔다. 그러자 니콜은 미음이 누그러지고 새롭고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생각은 잘 만들어진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명징했다-그녀는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새로운 방식으로 몇 년 동안 헤매던 미로를 따라 빨리 되돌아가며 그녀의 자아는 크고 화려한 장미처럼 개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해변을 증오했다. 딕이라는 태양을 주심으로 도는 행성 노릇을 했던 장소들이 원망스러웠다
(P.237)



  '와, 나는 거의 완전한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거의 홀로 서 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이가 없이.' 그리고 그 완전함이 최대한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덕이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계획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가운데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행복한 아이처럼 침대에 엎드려 니스에 있는 토미 바르방에게 도발적인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것은 낮 동안의 일이었다. 밤이 가까워오자 필연적으로 신경성 활력이 감소하고 기분이 처졌으며 생각의 화살은 얼마간 황혼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녀는 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려웠다. 최근에 보이는 그의 행동의 근저에 어떤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의 계획이 두려웠다-그가 세운 계획들은 잘되었으며, 거기에는 포괄적인 논리가 있었지만 니콜에게는 그런 논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생각하는 부분을 그에게 일임해왔으며, 그가 없을 때 자동적으로 그녀의 모든 행동을 주관한 기준은딕이 그것을 승인할 것인지의 여부였던 듯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기의 의향을 그의 의향과 대립시키기에 스스로 미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마침내 환상이라는 무서운 문, 탈출이 아닌 탈출의 입구에 붙은 번호를 알았다. 그녀는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오래 걸린 학습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 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힘을 앗아가고, 우리의 타고난 취향을 통제하고, 우리를 교화하고 불모의 존재로 만들기 마련이다.
(P.238)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어."
  "나한테서 오염돼서요?"
  "나는 직업상 때로는 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지."
  그녀는 그의 독설에 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겁쟁이에요! 당신은 인생에 실패하고 그 탓을 내게 돌리고 싶은 거야."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지능에서 나오는 예의 그 암시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그게 아무런 효력도 없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녀가 깨기는커녕 금가게 하지도 못하는, 진리 아래 진리의 단층들이 있었다. 다시 그녀는 그것과 싸웠다, 그녀의 작고 예쁜 눈으로, 우세한 쪽의 호사스러운 오만으로, 다른 남자를 향한 초기의 전이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분노로 그녀는 싸웠다. 그녀는 돈으로 그리고 언니가 그를 싫어하며 이제 자신을 지지한다는 믿음으로 그와 싸웠다. 그가 신랄한 혀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으로, 와인과 만찬으로 둔해진 그에 맞선 자신의 눈치 따른 간계로, 그의 육체적 퇴화에 맞선 자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으로, 그의 도덕 체계에 맞선 그녀의 부도덕으로 그녀는 그와 싸웠다-이 내면의 싸움에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약점마저 동원했다-속 죄 받은 죄와 모욕과 실수의 오랜 양철통과 토기와 병, 빈 용기들을 가지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싸웠다. 그리고 그녀는 2분 만에 승리를 거두고 거짓말이나 구실을 만들지 않고 자신에게 자신을 정당화하고 영구히 줄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다리에 기운이 빠진 그녀는 침착하게 흐느끼며 마침내 그녀의 것이 된 집을 항해 걸어갔다.
  딕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앞으로 수그려 흉장에 갖다 댔다. 이 케이스는 완료되었다. 의사 다이버는 이제 자유로워졌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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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1
F. 스콧 피츠제럴드 / 공진호 / 시공사 / 312쪽
(2018. 5. 16.)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녀를 인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것은 배우라는 직업에 있어서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엘시 스피어스 부인의 경우는 자신의 실패를 보상받기 위해 그런게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했다. 그녀에겐 인생살이에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나 한이 없었다. 두 번의 결혼은 만족스러웠고 두 번 미망인이 되었지
만. 그때마다 그녀의 쾌활한 극기심은 더 깊어졌다. 한 남편은 기병대 장교였고 다른 남편은 군의관이었다. 그들은 둘 다 그녀에게 무언가 남겨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로즈메리에게 전해주려고 애썼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게 키움으로써 딸을 냉철하게 만들었고, 그녀 자신의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딸의 마음속에 어떤 이상주의적인 생각이 자라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상주의적인 생각은 그녀 자신에게 돌려졌고 그녀는 그것을 통해 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리하여 스피어스 부인은 '단순한' 아이인 한 로즈메리가 자신의 갑옷과 엄마의 갑옷으로 이루어진 이중 덮개의 보호를 받았지만 - 그녀는 시시함과 손쉬움과 천박함에 대한 어른스러운 불신을 품고 있었다 - 영화배우로 일약 성공을 거둠에 따라 정신적으로 젖을 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활기차고 숨 가쁘고 절박한 이상주의적인 생각이 스피어스 부인 자신 말고 다른 무언가에 집중되기만 한다면 로즈메리는 젖을 떼는 것을 아파하기보다는 기뻐할 것이다.

(P.31)



  이 세 남자는 달랐다. 바르방은 다른 두 남자에 비해 교양이 모자라고 더 회의적이고 조소적이었으며, 그의 예절은 격식을 차린 것으로 심지어는 기계적이기까지 했다. 에이브 노스의  수줍음 이면에 있는 극단적인 기질은 그녀로서는 우스웠지만 영문을 알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지한 천성 때문에 그에게 최고의 인상을 줄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딕 다이버- 그런 점에서 그는 아주 완벽했다 그녀는 묵묵히 황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피부색이 붉고 햇볕과 바람에 그을었으며 짧은 머리칼도 그랬다 - 팔에 난 많지 않은 털이 손등까지 이어졌다. 눈은 밝고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코는 약간 뾰족했으며, 그가 누구를 보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언제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이러한 주의 집중은 상대방의 기분을 으쓱하게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우리를 그렇게 쳐다보겠는가?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들의 시선은 상대를 흘끗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 아일랜드의 선율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목소리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자신의 장점이기도 한 냉철과 자제와 자율의 층을 감지했다 오오, 그녀는 그를 선택했다. 니콜은 고개를 쳐들다가 로즈메리가 그를 선택하는 것을 보았고,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녀가 내쉰 작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P.43)

​​

  어떤 일에 대한 그의 흥분은 일의 중요도와는 걸맞지 않게 강렬해져 어떤 분야에 대가가 영향을 끼치듯 사람들 사이에 실로 놀라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에게는 쉽게 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히 의심 많은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무비판적인 사랑을 하도록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그 반작용인 우울은 흥분에 따르는 낭비와 사치를 실감했을 때 나타났다. 비인간적인 살인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령한 대량 학살을 나중에 바라보는 군사령관처럼 . 간혹 그는 호의로 베푼 흥청거림을 두려운 마음으로 뒤돌아보곤 했다.
  하지만 얼마 동안 딕 다이버의 세계에 포함된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오랜 세월에 걸친 현실과의 타협 속에 파묻힌, 자신들만의 독특한, 자부심이 깃든 운명이 있음을 알아보고 자기들을 위하여 특별히 자기들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유보한다고 믿었다. 그는 섬세한 배려와 정중함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금방 사로잡았는데, 그러한  배려와 정중함은 그것이 끼친 영향을 보고서야 음미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고 직관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러고 나면 딕은 그 관계가 피운 최초의 꽃이 시들지 않도록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의 재미있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한 그들의 행복은 그의 주요 관심사였지만, 거기엔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조금이라도 비치는 순간 그는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그 어떤 기억도 남기지 않은 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P.58)

​​​

  그곳에서 45분가량 서성이다가 느닷없이 어떤 사람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분일 때 생기기 마련인 바로 그런 종류의 만남이었다. 이따금 그는 자신의 노 출된 자의식을 너무 엄격히 억제하려다가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극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가 관객의 흥미, 즉자극된 관객의 감정적인 관심을 촉발해서. 자기가 벌려 놓은 간격을 다른 배우들이 메울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았다. 동정을 필요로 하고 동정을 구하는 사람한테는 별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이런 동정심은, 우리의 추상적인 동정심의 기능을 다른 수단으로 발동시키는사람들에게 쓰려고 아껴두는 것이다  
(P.177)

​​​

  그녀는 그저 멋모르고 천진스레 편리를 위해 그를 이용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은 딕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 효과를 냈다. 기차 여행은 끔찍하거나 우울하기나 우스운 것일 수 있다. 시험 비행일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여행의 예시일 수 있다. 아침에 서두르는 맛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배가 고파 함께 식사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르기까지, 친구와 함께 있기로 약속한 날이 길 수 있는 것처럼, 그러고 나서 여행의 열기가 식어 시들해지는 오후가 오지만, 여행이 끝날 때가 되면 다시 활기를 띠게 되는 것이다. 딕은 니콜의 초라한 기쁨을 보는 게 슬펐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아는 유일한 집으로 돌아왔디는 데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날은 사랑을 나누지 않았지만. 취리히 호숫가 요양소의 칙칙한 문 앞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그녀가 들어가기 전에 돌아서 그를 바라보 는 순간, 그는 그녀의 문제가 이제는 영원히 두 사람의 문제가 되었음을 알았다.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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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 비판 서문
임마누엘 칸트 / 김석수 / 책세상 / 224쪽
(2018. 5. 6.)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초로 붙여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다 태양의 열기에 녹아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 의 운명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의 운명은 어쩌면 이 카로스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이 신화의 인물은 너무 높게 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낮게 날 수도 없으며, 그저 높음과 낮음 사이에서 끝없이 날이야 하는 수고로움을 견디어내야 했으나 그 새는 지신의 날개가 안고 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한  채 하늘 높이 오르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비극에 이른다.
  인간 역시 이카로스와 같은 비극을 수없이 겪어간다. 인간은 세계와의 대면에서 자신에게 스며드는 낯설음이 가져다주 는 불안과 초조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와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 이 시간 속에서 좀처럼 실현되지 못할 때 그는 환상과 좌절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함부로 다가서서는 안 되는 태양으로 비약하려고 하거나 서둘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연으로 추락함을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그러나 이 두 길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이 양 극단의 길이 아니라 '사이의 길' , '비판의 길' 을 선택한다. 그는 이와 같 은 정신에 입각하여 회의주의의 길도 독단주의의 길도 거부했으며, 끊임없는 비판 활동으로 '사이의 길' 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신앙 절대주의나 이성 절대주의 어느 한쪽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가 이성의 계몽을 노래할 때도 이성의 무력함이나 이성의 오만함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감성, 지성. 이성 중 어느 한 능력에 절대권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이 둘 사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판단력의 반성적 기능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이와 같은 태도에 입각히여 과학의 길. 도덕의 길, 예술의 길, 종교의 길, 이 모두가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칸트의《순수이성 비판》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의 이 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기존의 모든 철학을 비판의 법정에 올려놓고 엄숙하게 심판하며, 나아가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제반 철학도 엄정하게 심판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생명은 '비판' 이다.
(P.7)
​​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인식하는 어떤 종류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성 자신의 본성상 그 자체에 부여되어 있고 그래서 달리 피해볼 수도 없는 물음들로 인해, 더군다나 그러한 물음들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있어 스스로 답할 수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이성이 이렇게 어려운 상횡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이성 자체의 책임은 아니다. 이성은 원칙에서 출발하며, 이 원칙들을 사용하는 것은 경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동시에 이러한 경험을 통해 충분히 정당화된다. 이성은 이런 원칙들과 더불어 항상 더 높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은 거슬러 올라감은 이성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물음은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자신의 작업이 언제나 미완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적 사용을 넘어서면서도 아마 보통의 인간 이성도 동의할 정도로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원칙들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바로 이 때문에 혼미함과 모순에 빠지게 된다. 비록 이성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디엔가 숨겨진 잘못이 근저에 놓여 있음을 간파해낼 수 있지만, 그 잘못을 들추어낼 수는 없다. 왜쀄면 이성이 시용하는 원칙들은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으므로 더이상 경험이 제시하는 그 어떤 시금석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없이 전개되는 논쟁의 싸움터를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다 
(P.15)


  우리가 한 권의 책이 위대함을 그 책의 쪽수가 아니라 그 책을 이해하는 데 소일되는 시간으로 측정한다면. 우리는 많은 책에 관해 이렇게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이 너무 짧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책은 훨씬 더 짧아졌을 것이다. 즉 책 쪽 수를 줄이기 위해서 책을 너무 짧게 쓰게 되면 그 책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어 결국 그 책을 더 두껍게 만드는 꼴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광범위하지만 하나의 원리에 통일되어 있는 사변적 인식의 전체를 파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아주 당연히 많은 책은 스스로 너무 명료해지려고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훨씬 더 명료해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료함에 대한 도움들은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가 전체를 파악하는 데는 종종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다지 신속하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게 하며, 뜻을 해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내용물의 밝은 채색은 오히려 체계의 연결 구조와 조직을 덮어씌워 알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이 체계가 지니고 있는 통일성과 견고성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P.24)



  학문 안에 이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그 안에서 선험적인 어떤 것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이성의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객체에 관계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인식은 한편으로는 객체와 (다른 어딘가에서 주어져야 하는) 그것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에만 관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관계한다. 전자는 이성의 이론적 인식이며. 후자는 이성의 실천적 인식이다. 이 두 인식 중에서 이성이 완전히 선험적으로 자신의 객체를 결정하는 부분, 즉 순수한 부분은-이 부분이 포함하는 정도가 많든 적든-우선 별도로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른 원천들에서 나온 것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들어온 것을 함부로 지출해서 나중에 경제가 어려음에 처했을 때. 수입의 어느 부분이 그러한 지출을 부담해낼 수 있고, 또 그중 어느 부분이 절약되어야 하는지를 식별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나쁜 경제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P.32)



  직관이 대상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대상의 성질에 관해 선험적으로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 통찰할 수 없다. 오히려 (감각의 객체로서) 대상이 우리의 직관 능력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에 나는 이러한 가능성. 즉 대상의 성질을 선험적으로 잘 알 수 있음을 완전히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직관들이 인식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직관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표상으로서의 직관을 대상 외의 다른 어떤 것에 관련시켜야 하고 대상을 표상을 통해 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렇게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개념이 대상에 따르는 경우인데, 그러나 이 경우는 내가 대상에 관해서 어떻게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직관이 대상에 따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대상이나, 아니면 같은 것이지만 그 대상이 (주어진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경험이 이러한 개념들을 따르게 되는 경우이다. 나는 이 경우의 결과가 더 희망적임을 알게 된다. 이 경우에는 경험 그 자체가 지성이 요구하는 종류의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인식은 지성의 규칙을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가 내 안에서, 따라서 선험적으로 전제하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규칙은 개념 안에서 선험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경험의 모든 대상은 필연적으로 이 개념에 따라야 하며. 이 개념과 일치해야 한다. 대상 들과 관련해서 볼 때. 이 대상들 중에는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그것도 필연적으로 사유되지만, (적어도 이성이 그것들을 사유하는 그대로) 경험에서는 전혀 주어질 수 없는 대상도 있다. 그런 한에서 대상을 사유하려는 시도는 (어쨌든 우리가 이런 대상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사유 방식의 변화된 방법으로 수용한 것. 이른바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서 우리 자신이 그 사물들에 집어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해서 훌륭한 시금석을 제공해줄 것이다.
(P.38)



  비판은 이성이 학문으로서 스스로 순수하게 인식하는데 이성 자신의 독단적 방법에 대립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학문은 언제나 독단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확고한 선험적 원리에서 엄밀하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은 독단주의에 대립하고 있다. 즉 비판은 오로지 개념으로부터의 순수한 인식(요컨대 철학적 인식)에 의해서만. 또한 이성이 스스로에게 이룰 수 있는 방식과 자격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오래도록 사용해왔던 원리를 그저 좇아서만 자신이 추구해 왔던 직업이 성공하리라고 자만하는 월권에 맞선다. 그러므로 독단주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 능력을 먼저 비판해보지 않고 순수이성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니 이렇게 독단론에 반대하는 것은 통속성이라는 부당한 이름 아래 지껄이는 천박한 언행을 변호하거나 전체 형이상학을 간단히 처리해버리는 회의론을 싸고 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학문으로서의 근원적 형이상학을 촉진시키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미리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근원적 형이상학은 일정한 이론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며 가장 엄밀한 요구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논술되며, 따라서 (통속적이지 않고) 학문적으로 논술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는,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따라서 사변이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로 자신의 일을 왼수해내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기 때문 이다.
(P.54)



  초월철학의 이념
  경험은 의심할 것 없이 우리 지성이 감성적 감각의 원재료를 가공하서 산출하는 최초의 산물이다 따라서 경험은 우리에게 최 초의 가르침이 되며.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진행됨에 따라 끝없이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산출될 모든 결실이 연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삶은 바로 이 경험이라는 지반에서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앎에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럼에도 물구하고 경험은 우리의 지상이 제한되어 갇히게 되는 유일한 분야는 결코 아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달리 존재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경험은 우리에게 그 어떤 참된 보편성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성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보편성에 관한 인식을 얻기를 열망하며. 경험을 통해서 만족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자극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내적인 필연성이라는 특징이 있는 그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경험에서 독립되어 자체적으로 명확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인식을  선험적 인식이라고 한다. 그와는 반대로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단지 후험적으로나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경험 중에는 그 경험이 자신의 원천을 선험적으로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우리 감관의 표상들을 결 합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인식과 섞여 있음이 드러나게 되며, 이와 같은 사실은 정말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에서 감관에 속하는 것들을 모두 제거 할 때도 여전히 어떤 근원적인 개념들과 그 개념에서 산출되는 판단들이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완전히 선험적인 것으로 경험에서 독립하여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감관에 나타나는 대상들에 관해서 단순한 경험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며,  또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와 같은 것들은 단순히 경험적 인식만으로는 제공해줄 수 없는 참된 보편성과 엄격한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P.63)​



​  모든 판단 안에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정해져 있으며, (나는 긍정 판단을 먼저 고려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에 연이어 이루어지는 부정 판단에는 쉽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하다. 술어 B가 A라는 개념 안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주어 A에 속해 있든지. 아니면 B가 A와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A라는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든지,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와 관련된 판단을 나는 분석적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와 관련된 판단을 종합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분석적 판단(긍정적 판단)술어와 주어가 결합하는 것이 동일성을 통해 생각되는 판단이며. 반면 종합적 판단이러한 동일성을 통하지 않고 결합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판단이다. 또한 우리는 전자의 판단을 해명 판단이라고 하며. 후자의 핀단 을 확장 판단이라고 한다. 전자는 술어를 통해 주어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않고, 단지 주어 개념을 분석하여 이것을 그 자체 안에서 (비록 불투명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먼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부분 개념으로 분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전자외는 반대로 주어개념에서 그것 자체 안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술어를, 따라서 주어를 분석해도 그것에서 도출할 수 없는 술어를 첨가한다. 
  1. 분석적 판단을 통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전혀 확장되지 않으며.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개념이 분해되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종합적 판단에서는 내가 주어 개념 외에 다른 어떤 것(X)을 가져야 하고. 지성은 주어 개념 안에 놓여 있지 않은 술어를 주어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바로 이 X에 의지하고 있다.
​(P.68)
​​


  그 어떤 낯선 것과도 섞여 있지 않은 그와 같은 인식이 순수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인식은 그것에 어떠한 경험도 감각도 전혀 섞여 있지 않고, 완전히 선험적으로만 가능한 경우 순수하다고 명명된다. 그런데 이성은 선험적인 인식의 원리들을 주는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이성은 오로지 선험적으로만 어떤 것을 인식하는 원리들을 포함하는 그와 같은 것이다. 순수이성의 기관은 선험적인 순수한 인식을 모두 획득할 수 있게 해주고 현실적으로 성립되도록 해주는 원칙들을 총괄한다. 이러한 기관을 주도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순수이성의 체계를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매우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인식을 이렇게 확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이성과 그것의 원천과 한계들을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을 순수이성의 체계에 대한 예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이론적 학설이 아니라 단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 유용성은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이성을 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그야말로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비판은 이성을 그 과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와 같은 작업은 이미 매우 많은 소득을 올리는 셈이 될 것이다.
(P.72)



  학문을 구분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경험적인 어떤 것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은 전혀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선험적 인식은 완전히 순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고 원칙과 그것의 근본 개념은 비록 선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초월철학에 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에는 전적으로 경험에 원천을 두고 있는 쾌나 불쾌, 욕망과 경향성, 자유로운 의지 같은 개념들이 전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철학은 오로지 순수한 사변이성이 세계에 대해서 갖게 되는 앎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인 것은 모두 그것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 있는 한,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감정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P.76)



  어떤 인식은 모든 경험의 영역을 떠나 경험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대상도 주어질 수 없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판단 범위를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 그 외관을 넓혀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이성의 탐구는 감성계를 넘어서는, 그래서 경험이 그 어떤 실마리도 수정도 전혀 제시할 수 없는 바로 이러한 후자의 인식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탐구를 지성이 현상 분야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탐구가 지향하는 궁극적 의도가 훨씬 더 숭고하다고 여긴다. 순수이성 자체가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은 바로 자유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이다. 그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오로지 이와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학문은 형이상학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 형이상학의 방법은 처음에는 독단적이다. 즉 이성이 이렇게 엄청난 기획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 관련하여 자신의 능력과 무능력을 사전에 검토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그것을 성취하는 일을 도모한다.
(P.86)



  순수이성은 원리. 즉 오로지 선험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담고 있는 이성이다. 순수이성의 기관이라면 그것은 모든 순수한 인식을 선험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현실적으로 성립시켜줄 수 있는 원리들을 총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기관을 주도면밀하게 적용하면, 순수이성의 체계를 마련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대단히 수고스러우며, 또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도대체 이 경우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이성과 그것의 원천, 한계에 관해서 단순히 평가만 내리는 이와 같은 학문을 순수이성의 체계에 관한 예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교설Doktrln이 아니라 단지 비판Kritikdl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P.104)



  순수이성의 비판에는 초월철학에 본질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비판은 초월철학의 완전한 이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학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비판은 선험적인 종합 인식을 완전하게 평가하는 데 필요한 한에서만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문을 구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주목할 것은 경험적인 어떤 것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개념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선험적 인식은 완전히 순수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고 원칙과 그것의 근본 개념은 비록 선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초월철학에 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도덕의 최상의 원칙과 그 기본 개념은 전적으로 경험에 원천을 두고 있는 쾌나 불쾌. 욕망과 경향성. 자유로운 의지 같은 개념들을 명령의 근거로 두지는 않으나 의무의 개념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로, 또는 움직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극으로, 순수한 도덕성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필연적으로 함께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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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쉽게 읽는 칸트) (쉽게 읽는 철학 시리즈 1)
랄프 루드비히 / 박중목 / 이학사 / 204쪽
(2108.4.22.)
​  

  
  칸트를 읽는 것은 어렵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구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란 노력을 요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까닭에 그 속에는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칸트에게서 그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책은 가장 적게 읽히는 독일 철학자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상을 받는 이유는. 과감하게 칸트 강독을 시도하려는 사람의 정신적 한계성이나 경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칸트의 참으로 복잡하고 거대한 사유 구조물에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칸트의 철학적 공간이 유럽의 계몽주의였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어려움을 감수 하면서 칸트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P.6)   

​   
   칸트의 사상적 전제 조건
  생각하는 모든 인간은 오늘날에도 칸트가 대답해야만 했던 동일한 물음 앞에 서 있다. 즉,  나의 인식의 한계는 나의 다섯 감각 기관이 만들어 내는 경험에 의해 정해지는가? 혹은  오성悟性의 영역에 속하는가? 이 두 물음은 철학사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우리는
- 첫번째 대답에 경험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있고.
-두 번째 대답에 합리론이라는 이름올 부여하있다.    
(P.18)

​   
 초판의 머리말에서 칸트는 자신에게 있어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하고 있다.

  머리말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왜si하면 이 문제들이 이성의 모든 능력 밖에 있고, 동시에 대답할 수 없는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성이 이러한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성의 책임이 아니다. 이성은 경험의 진행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동시에 경험에 의해 충분히 확증된 원칙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원칙에 의거해 이성은 (이것이 이성의 본성상 당연하다는 듯이) 더 근원적인 제약들로 점점 더 높이 나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들이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자신의 과업이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가능한 모든 경험적 사용을 뛰어넘으면서도, 동시에 일상적인 상식에도 일치할 만큼 확실한 듯한 원칙들에게서 도피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성은 혼미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혼미와 모순으로 인해 이성은 어딘가 밑바닥에 오류가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찾 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사용하고 있는 원칙들은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어 어떠한 경험으로도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끝없는 논쟁들의 싸움터가 바로 형이상학이다.    
(P.33)

​   
     형이상학에서는 어떤 물음을 중요시하는가? 우리는 그중 하나의 물음을 이미 앞에서 제기하있으며,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다. 모든 존재자의 배후에는 어떤 근거가 숨어 있는가?
  칸트 시대에는 합리론자들(칸트는 머리말에서 그들을 독단론자라고 불렀다)과 경험론자들(칸트는 이들을 무관심자라고 불렀다)이 형이상학의 싸움터에서 서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싸움터에서 이제 칸트가 공격을 개시한다. 그의 무기는『순수이성 비판』이다. 특이한 책제목에 대해 우리는 이미 고찰하였다. 다음의 강 독에서 칸트는 제목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그의 계획을 설명 한다. 즉, 비판Kritik은 결코 부정적인 판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단지 “검사하다" 혹은 “조사하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밝혀야 할 중요한 단어는 “ 순수rein”이다. 이성 활동이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 이성 활동은 순수하다. 따라서『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을 통한. 더욱이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 인식의 탐구이다. 즉, 『순수이성비판 의 주제는 이성의 자기 인식이다.  
(P.35)      
   ​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나 대상에 관한 무엇인가를 개념을 통해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그 개념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인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는 전제를 무너뜨렸다. 그러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형이상학의 여러 가지 과제가 좀 더 잘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시도는 한번 해볼 만하다. 형이상학에서는 선천적 인식. 즉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앞서 대상에 관해 무엇인가를 결정하 게 되는 인식의 가능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또한 지금 말한 가정만으로도 벌써 이러한 요구와 더욱 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생각과도 같다. 그는 모든 천체가 관찰자의 주위를 운행한다고 가정 했을 때 천체 운동의 설명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관찰자가 돌고 반면에 별들을 고정시키면 그 설명이 전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시도하였다. 형이상학에서도 대상의 직관에 이와 유사한 방법을 지도해 볼 수 있다.​
​(P.43)


​     별, 행성, 구, 테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 성이라는 이름의 개념들은 오성의 산물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토성이라는 행성은 인식 행위 속에서 점점 변화하며 우리의 오성에 따라 성립된다. 단, 토성 자체는 번화하지 않는다.
  외견상 별도로 토성 자체라고 언급된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칸트 철학의 중요한 핵심과 마주친다. 그것은 바로 물자체이다. 우리가 토성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칸트는 우리가 토성에 도착하여 토성을 관찰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른 대상들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즉, 대상 자체는 인간 마음대로 규정할 수 없는 물자체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그의 감각으로도, 이성으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물자체가 우리의 오성에 의해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만을 진술할 수 있다. 혹은 칸트의 표현에 의하면 물자체가 오성에 의해 어떻게 현상되어지는가만을 진술할 수 있다. 앞에서 인규된 인용문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음의 내용이다.

  대상들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오로지 (주어진 대상들로서) 인식되는 경험이 그러한 개념들에 따른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B WII)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명백하다. ​
​(P.47)​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명백하다. 동시에 이는 다음과 연결되고 있다. 즉. 물자체는 결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언제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물자체 대신에 물자체의 현상을, 또는 내가 인식할 수 있도록 경험을 상정한다면 이 위험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은 나의 오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파악한 것을 인간의 이성이 자기 자신의 경험과 함께 검토하는 장점을 가진다.

  이것은 지금부터 학의 체계 자체가 아닌, 하나의 방법론으로서의 형이상 학의 과제이다. (B Mll)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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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순수 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구별에 관하여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에 의해서 그 활동을 개시하도록 깨우쳐지겠는가? 대상은 우리의 감관Sinn을 자극하여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상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오성 능력을 활동시킨다. 오성 능력이란 표상을 비교하고 결합하거나 분리시켜서 감성적 인상이리는 원재료를 대상의 인식. 즉 경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볼 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앞서지 못하며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인식이라는 것도 우리가 인상을 통해 받이들인 것과 (감성적 인상에 의해 단지 야기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고유한 인식 능력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 능력의 부가물을 인식의 원소재와 구별하는 일은 오랜 훈련에 의해 이 부가물에 주의하게 되고 그것을 분리하는 데 숙달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또한 감관의 모든 인상으로부터 독립된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더 깊은 연구를 요하며, 한 번 보고 당장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선천적a priori 인식이라 부르고, 이를 경험적 인식과 구별한다. 경험적 인식이란 그 원천이 후천적a posteriori. 즉 경험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B 1 ff.〉

모든 인식의 시간적 시작에는 경험이 서 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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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 우리는 어떤 선천적 인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상식 자체에도 그런 것이 없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 인식과 경험적 인식을 구별할 수 있는 징표를 문제 삼고자 한다. 경험은 물론 어떤 사물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그것이 그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첫째,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명제는 선천적 판단이다. 그 밖에 그 명제 자체가 다시금 필연적 명제로서 타당하다는 것 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명제는 절대적으로 선천적인 것이다. 둘째, 경험은 결코 그것의 판단에 참된 혹은 엄밀한 보편성을 제공하지 못하고, 단지 (귀납을 통하여) 가정된, 즉 비교적인 보편성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지각해 온 범위 내에서는 이 규칙이나 혹은 저 규칙에 예외가 없었다고 원래 말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판단이 엄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즉 어떠한 예외도 가능하지 않다고 인정되면 그것은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천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보편성은 대다수의 경우 타당한 것을 모든 경우에 타당한 것으로 타당성의 정도를 마음대로 끌어올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하나의 판단이 본질적으로 엄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보편성은 판단의 특수한 인식의 원천, 즉 선천적 인식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은 선천적 인식의 확실한 특징이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두 특징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판단에서의 우연성 보다는 판단의 경험적 제한성을 지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 한결 더 쉬울 수 있으며, 또는 판단의 필연성보다는 우리가 판단에 부여하는 무제한적인 보편성을 지시하는 것이 우리가 납득하기에 더 쉬운 경우가 많으므로. 지금까지 말한 두 기준은 각각 하나만으로도 확실한 것이지만 서로 구분하여 사용히는 것이 좋다.    
(P.52)
​   
   ​   
  분석 판단은 나의 지식 상태를 확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석 판단 역시 중요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많은 개념들을 명확하게 할 따름이다. 반면 종합 판단은 나의 지식이 실질적으로 확장되는 데 기여한다. 단지 내가 경험에 의존한디는 사실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 딜레마는 칸트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한다. 즉, 나의 인식을 실질적으로 확장시키면서도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타당한 판단이 있는가? 칸트의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분석 판단과 같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종합 판단은 있는가? 혹은 더 간단하게 묻는다면, 선천적 종합 판단은 있는가?
​  칸트는 이 물음에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그는 다른 학문의 예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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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가 염려한 것처럼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다루는 문제는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가능한 인식의 무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단지 형이상학 그 자체와 이성학으로서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과제이다.  칸트는 이성이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체계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이 체계를 선험 철학이라고 부른다.
  칸트 철학의 핵심적인 용어인 선험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 선험적transzendental”과 아주 비슷하게 들리는 “ 초월적transzendent" 이라는 용어와 함께 시작해 보자. 아마도 독자는 이 용어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선험적”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초월적 이라는 말은 라틴어 transcedere에서 파생된 것으로 뛰어넘다 hinüberschreiten, 경계를 벗어나 eine Grenzeüberschreiten라는 뜻이다. 벗어나게 되는 경계는 우리의 오감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계와 같은 인 간의 현실성을 말한다. 신 또는 무한성 같은 개념들은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칸트의 개념인 선험적 (이 말은 칸트 이전에 이미 있었으나 다른 의미 로 사용되었다)이라는 말 역시 경계를 벗어난다. 그러나 앞을 향하여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 모든 경험을 뛰어넘어 저편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쪽을 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무엇이 모든 인식의 근거가 되는가? "모든 인식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를 의미 한다.
  그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또는 신학적 방식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서의 인식 가능성의 선천적 조건을 묻는 것이다. 모든 경험 이전에 놓여 있는 경험의 조건에서 중요한 문제는 인식의 대상들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 방식이다.
(P.61)
​  ​
​   
┌ 선험적 원리론 ┌  선험적 감성론 ──────┬ 공간론
│                     │  (감성적 지각에 대한 이론)  └ 시간론
│                     └  선험적 논리학 ──────┬ 선험적 분석론 (주제 : 오성)
│  ​                        (사고의 이론)                    └ 선험적 변증론 (주제 : 이성)
└ 선험적 방법론
(P.67)


   1.  감성 Sinniichkeit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보고 있는 서가書架는 나의 시각에 작용하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나의 촉각에 작용한다(촉발하다=작용하다. 자극하다).

  2. 대상들의 이러한 작용은 우리에게  직관 Anschauungen들을 제공한다.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대상들을 보고 / 느낀다.

  3. 이것이 오성과 함께 사고되어지면 오성에서 개념 Begriffe들이 생겨난다(의자/서가).

  4. 대상들이 우리의 감성에 미치는 결과를 칸트는 감각 Empfindung 혹은 경험적 직관 empirische Anschauung이라 부른다(개념과 직관의 합주).

  5. 이 직관의 대상을 칸트는 이제 현상Erscheinuung이라 부른다.

  이제 주의 깊은 독자는 들릮없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5번에서 언금된 “현상”과 1번에서 언급된 “대상” 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결론을 말한다면.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P.72)

​   
  감성의 모든 선천적 원리에 관한 학문을 나는 선험적 감성론이라 부른다. 이것은 순수 사고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선험적 논리학에 맞서는 학문으로. 선험적 원리론의 제1부를 형성하여야 한다.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우선 감성을 고립시켜야 되는데, 이 일은오성이 그 개념을 통해 사고하는 일체를 분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런 조지를 취하는 것은 경험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경험적 직관으로부터 감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이것은 감성이 선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순수 직관과 현상의 단순한 형식 이외에 이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연구해 나감으로써 선전적 인식의 원리로서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이 있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는 일 에 몰두하기로 한다.〈B 35 f.>
​    
   ​   
  칸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한 다음 단계에 착수하면서 “선험적 논리학의 개념을 소개한다. 순수 논리학과 선험적 논리학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음의 텍스트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순수 직관도 아니고 감성적 직관도 아닌 순수한 사고의 작용인 개념들, 즉 경험적 근원에서도 감성론적 근원에서도 생기지 않는 개념들이 선천적으로 대상에 관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아래 우리는 미리 순수 오성 인식과 순수 이성 인식에 관한 학문의 이념을 형성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선천적으로 사고한다. 인식의 근원 • 범위 •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이러한 학문을 우리는 선험적 논리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험적 논리학은 단지 오성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만을 다루지만, 그 법칙들이 선천적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범위 내에서 다를 뿐이지 일반 논리학처럼 경험적 인식과 무차별적으로 관계를 갖는 범위 내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B 81〉
​(P.86)


​   선험적 분석론
  이 분석론은 우리의 모든 선천적 인식을 순수 오성 인식의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네 가지 점이 중요시 된다.
  1. 개념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개념이다.
  2. 개념은 직관이나 감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오성에 속한다.
  3. 개념은 기본적 개념으로, 파생적 개념 또는 이것으로부터 합성된 개념과 구별된다.
  4. 개념의 표는 완전하고, 순수 오성의 모는 분야와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순수 오성은 모든 경험뿐 아니라 모든 감성에서도 구별된다. 그러므로 순수 오성은 자립적이며 자족적인 통일체이지 결코 외부로부터 부가되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논리학의 모든 부분은 두 편으로 이루어졌다. 제l편에서는 순수 오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제2편에서는 순수 오정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P.88)

​   
  개념의 분석론
  나는 개념의 분석론을 개념의 분해로 이해하거나, 또는 제시된 개념을 분석하여 판명하는 철학적 연구의 통상적 방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개념의 분석론이란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오성 능력 자체 의 분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선천적 개념들의 출생지인 오성 안에서만 그린 개님들을 발견합으로씨, 그리고 오성 능력의 순수한 사용 일반을 분석함으로써 선천적 개념들의 가능성을 탐구혀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험 철학의 진정한 과업이다.​
(P.89)      
   ​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간단하 게 요약하고, 짤막한 문장으로 되새겨 볼 것이다.

  1, 감성의 범위 내에서 시간과 공간은 모든 감각을 정돈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선험적 감성론을 다루면서 밝혔다. 즉.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2. 오성은 정돈된 감각들을 지속적으로 틀로 만들어 그것을 대상과 관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선험적 논리학을 다루면서 이 사실을 밝혔다. 즉, 대상은 사고되어진다.

  3. 이제 개념은 오성에 의해 판단에 결합된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논리학의 하위 분과로서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이다. 

  칸트는 판단을 결합시키는 활동에서 발견할 정돈 요인들을 선험적 근본 개념 혹은 범주들(여기에 서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부른다.
(P.93)​
​   
   ​   
   지금까지는 선천적 순수 오성 개념 일반으로서의 범주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선험적 연역에서는 범주와 그 범주의 사용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바로 “연역” (라틴어: Deduktion, 독일어: Ableitung)을 의미한다. 순수 개념의 정당성은 오성에서 나온 이 순수 개념의 연역을 통해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연역은 선험적 연역으로서 개념의 가능한 인식의 조건도 정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선험적 연역의 첫 번째 중요한 과제이다.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순수 오성 개념이 즉자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이 물음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칸트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물음의 중요성을 파악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99)
​   

​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중요하나 취약한 부분으로 이미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선험적연역에서 그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이 취약한 부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단을 요구한다.

  대상이 있기 때문에 범주가 있느냐, 아니면 범주가 있기에 대상이 있느냐?

  주의 깊은 독지는 칸트에게는 후자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오성이 범주와 더불어 어떻게 대상과 관계하고 있는지의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시 고양이의 예를 살펴보자. 즉, “범주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라는 답변에서 단일성의 범주가 콧수염과 귀여운 발을 가진 모피의 존재를 산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단일성의 범주는 콧수염과 귀여운 발을 가진 모피 존재의 직관을 산출한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P.102)​

​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선천적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필연적으로 대상과 관계하며, 또 어떻게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상의 종합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지 우리는 감성론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대상은 감성의 순수 형식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현상될 수 있기 때문에, 즉 경험적 직관의 객관일 수 있기 때문에, 시공은 현상으로서 대상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조건을 포함한 순수 직관이요. 시공 안에서의 종합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
  반면에 오성의 범주는 대상들이 직관 속에서 주어지기 위한 조건을 우리에게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상들은 오성 기능에 필연적으로 관계 하지 않더라도, 동시에 오성이 대상의 조건을 선천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확실히 현상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성의 영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하나의 곤란한 점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게 되느냐, 다시 발해 어떻게 대상의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주어지느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성의 기능이 없더라도 현상은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103)

​   
  현상들 중에는 어떤 규칙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규칙에 따라 어떤 일이 습관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는 있어도 결코 그 결과가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종합은 결코 우리가 경험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즉, 결과는 원인에 덧붙여질 뿐 아니라, 원인을 통해 정립되고,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규칙의 엄밀한 보편성은 결코 경험적 규칙의 성질이 아니다. 경험적인 규칙은 귀납을 통해 오직 비교적인 보편성, 즉 광범위한 유효성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일 순수 오성 개념을 경험의 산물로 다룬다면, 이 개념의 시용은 전적으로 변경될 것이다.

  칸트의 물음은 원인 개념 또는 인과성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고의 주관적 조건”으로서의 인과성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B 122〉현상들에 대한 어떤 합규칙성의 관찰로는 결코 이러한 타당성을 도출할 수 없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순한 공상'이 될 것이다.
  인과성의 개념에 관해 칸트의 판단표에서 우리가 제시한 예, “태양이 비추고 있기 때문에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버터가 녹는다"를 적용해 보자. 우리의 감성적 경험은 태양, 탁자 및 버터의 액화는 지각하지만 “때문에”, 즉 태양과 액화의 인과성은 지각하지 않는다. 인과성은 오성에서 나은 것이지만 모든 경험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이것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오성은 인과성의 범주를 도장처럼 감성적 지각의 조야한 재료들에 새겨 놓고, 지각 속에서 인과성을 재발견한다.   
(P.105)

​   
  주관성과 객관성은 선험적 자아 의식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이렇듯 가깝게 놓여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아마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두 개념을 절대적인 대립 개념으로 보는 데 익숙하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칸트만 알았던 것은 아니다. 철학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독자 역시 이러한 사실에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을 명백하게 확증된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 자신도 소위 명백성은 우선 주관적인 관찰자에 의해 확증된 것임을 시인해야 한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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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오성이 오직 섬을, 즉 경험적 사물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섬에서 오성은 안전하다. 그러나 오성은 섬을 벗어날 수 없다. 섬의 측량은 우리가 섬의 현상 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오직 우리의 측량 기구(감성적 지각, 범주 그리고 도식)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오성은 이미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측량 도구는 한계를 벗어나서는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도구는 가상假象의 대양에서 떠돌아다니는 안개 봉우리와 녹아 내리는 빙산을 조사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
  칸트는 섬과 대양에 각각의 명칭을 부여했으며, 이 명칭은 그의 실천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섬은 현상체Phaenomenon의 세계요, 대양은 물자체 혹은 가상체Noumenon의 세계이다. 이 가상체는 사고될 수 있으며, 더욱이 사고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결코 인식될 수는 없다.
(P.131)
​   
      
  선험적 가상은 해결되지 않은 채 이성에 속해 있다. 이성-이것이 바로 선험적 변증론의 주제이다. 우리는 오성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상당히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 오성을 규칙들의 능력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성을 오성과 구별하여 원리들의 능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B 356〉

  모든 인식은 감각적 지각에서 출발하고, 알다시피 오성은 이 지각들을 개념들의 형식으로 통일화시킨다. 그러나 “최고의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의 과제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가공하여 그것을 사고의 최고 통일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P.136)
​   
 
  칸트가 형이상학은 세 가지의 (선험적) 이념들. 즉 영혼 불멸, 자유 그리고 신만을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a) 인간이 종속되는 제약들에 대해 무제약적인 어떤 것. 즉 이 무제약들의 통일로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칸트는 이 무제약적인 것을 (영혼의) 불멸이라고 부른다. 영혼의 불멸은 심리학의 대상이다.

  b) 모든 현상의 조건인 세계가 종속되는 제약들에 대해 이 제약들의 통일로서 무제약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 무제약적인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는 우주론의 대상이다.

  c) 사고와사고된 것 모두가 종속되는 모는 제약들에 대해 이 제약들의 통일로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 통일을 하나의 필연적 존재에서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신은 신학의 대상이다.
(P.139)

 
  변증론 Dialektik이란무엇인가?
  변증론이란 희랍어인 dialegomai, 즉 "나는 대화한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것은 독일어 "Dialog(대화)”와 거의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 Dialektlk의 가장 간단한 번역은 “담화술Untetrdungskunst" 이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편을 기억하는 사람은 변증론을 “변론과 항변에 관한 방법"으로, 즉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어떤 명제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의 특정한 질문에 대한 찬반의 균형으로 번역할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변증론은 가상의 논리학을 말한다 이성은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동안 모순에, 즉 앞에서 언급된 오류 추리에 빠져 버린다. 그리하여 칸트 이후에, 위대한 철학자 헤겔이 (간단하게 언급한) 테제 These, 안티데제Antithese, 진테제synthese라고 부른 변증법의 초석을 마련한다.
(P.144)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신학에 대해 이성을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라고 하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이고, 또한 이와 반대로 이성을 자연에 사용하려는 원리 들도 어떠한 이론에 도달하지 못하며. 따라서 만일 우리가 도덕법을 근저에 두거나 길잡이로 삼지 않는다면. 무릇 이성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최고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오성은 이런 초월적 사용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B 664)

  여기에서 모든 합리적 신학. 즉 이성에 근거한 신학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이성은 방금 읽었던 부문에 거의 숨겨져 있는 신학의 과제, 즉 도덕 법칙을 위한 정초만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의 사변적인 물음은 실제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즉, 도덕은 신학 내에서 이성의 유일한 현존 권리인가? 혹은 도덕은 이성을 위한 신학의 유일한 현존 권리인가?
  칸트는 끝을 맺는다. 신 증명은 반박되었다. 그러나.

  그러므로 최고 존재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상 이기는 하지만 오류가 없는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을 완결시키고 영예롭게 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증명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반박될 수도 없다. (B 670)

이와 함께 칸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도를 500년 후에 반박하였고, 신의 비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하Ludwig Feuerbach보다 100년 앞서 그 증명 역시 불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다.
(P.182)
​   

   칸트를 읽는 것이 진정 유익한 것인가?
우리가 칸트를 선택하기 위해 선전해야 할 이유를 이 소책자의 서두에 열거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은 이미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단지 몇 줄로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하도록 유혹해서는 안될 것이다.
  칸트에 관한 참고 서적에서 우리는 칸트의 공로에 대한 다양한 경외심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칸트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성의 수행 능력에 관한 연구를 앞서 추진했던 철학자였다고, 다른 주석자는 칸트가 분명 계몽주의를 주도한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계몽주의가 근대의 모든 정치적 운동과 서구의 민주주의 그리고 동구의 사회주의 발생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많은 사상가들은 칸트와의 대립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철학으로 매진했다고. 그리고 칸트 이후의 철학적 사유는 칸트 없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옳다. 그러나 칸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우리의 책이 단지 주변적으로 다루었던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정언 명령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자유와 자연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에서 찾아 볼수있다.
  이에 관해서는『쉽게 읽는 칸트』의 두 번째 권에서 다룬다. 그러나 이 사상은『순수이성비판』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P.193)


  형이상학은 선험 철학으로서 인식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다 우선 감성적 지각이 탐구되면서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두 형식. 즉 공간과 시간이 발견된다. 시공과 함께 모는 감각들은 정돈되고 연이어 오성에 의 해 개념으로 형성된다. 이와 연관된 사고의 탐구에서 범주가 발견된다. 법주는 개념을 판단하게 하고 결합시키며, 오성에 의해 도장처럼 감성적 지각 속에 각인된다. 그러나 우리의 오성 지식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과 함께 단지 현상계에 제한되어 있다.
  오성이 추론하는 이성으로 확장되면서 우리의 현상계를 넘어 현실성의 본질 자체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오성은 모순에 빠지게 되며 추락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성은 체념한 채 절대적인 것의 표지로서의 이념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P.194)
​     


   칸트 철학은 그 내용이 너무나 심오하고 방대하기에 초보자는 물론이고 철학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가 스스로 제기한 물음을 통해 그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철학적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질문은 단 네 가지이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답하 려고 칸트는 일생 동안 노력해 왔다.『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첫 번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칸트는 이성 능력 자체를 검사하고 비판한다. 이성 능력 자체의 비판을 통해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이 책은 칸트가 제기한 네 가지 질문과 연관하여『순수이성비판』을 다루고 있다. 이는 초보자가 칸트 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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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 / 이진 / 문학동네 / 440쪽
(2018.4.8.)

 

 

 

 

 

미국에서나  세계적으로나 호퍼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환호는 전혀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그러나 독서가와 작기들 사이에서 유독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호퍼의 작품들이 이야기에 심취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이야기를 읽으며 기쁨을 얻는 사람이건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쁨을 얻는 사람이건어느 순간 에드워드 호퍼의 팬이 되고 마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호퍼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P.10)


  나를 가졌을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내가 어떻게 되었건 그녀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을 확률이 높다그렇지 않은가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키워준 사람들나의 부모는   나위 없이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입양했을  사십대였으니 나이도  많았고 집으로 데려가 가족으로 품어주 었다말하자면 그랬다는 것이다돌이켜 생각해보면그들은 막상  입양하고  뒤에는 자신들이 굳이 입양까지 해야 했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던  같다이렇게만 말해두겠다사랑이 넘치는 집은 아니었다고그들은  키워주었고내게 머물 곳과 음식과 그리고 교우를 제공해주였다그들이  위해  일들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고그것에 감사한다수많은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누리며 차란다그러나 이제는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P.50)


  "어쨌든완벽한 하루였어요내가 입을  때마다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두려웠던 것만 빼면그래서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리처드가  집으로 데려다주면서아마 그날 들어 스무번째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을 또렷이 기억해요. 우리집 포치에 서 있었어요. 자정이 가까웠는데도 여전히 더웠어요. 집안 불은 전부 꺼져 있었지만 엄마가 2층에서 안 자고 날 기다리고 있디는 건 알 았지요. 어쩌면 엄마는 침실 창문에서 엿듣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더이상 귀가 시간 같은 건 없었지만, 그 모든 일을 치르고 난 뒤에도 엄마는 여전히 내가 집에 들어갈 기까지 잠자리에 들지도. 포치불을 끄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말했나요? 아기에 대해?"
  캐럴라인 얘기. , 그 얘기를 했어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땅만 보면서 이야기했어요. 생리를 걸렀다는 것, 아침에 속 이 메슥거렸다는 것. 그가 대학으로 떠나기도 전이었다고. 마침내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까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우시더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다음날 양가 어머니가 커피 한 주전자와 전화번호부를 놓고 마주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는 얘기도요. 세인트메리 미혼모의 집과 거기 있던 여자에들에 대해서도, 집을 떠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도 이야기했어요. 얼마나 그가 그리웠고, 얼마나 두려웠는지도. 캐럴라인이 태어나자마자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리더라고 말했어요. 한 번도 그 아이를 안 아보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다고.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나 자신을 증오한다고.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고, 내 손을 잡았고, 청혼을 했어요 만약 자기가 캐럴라인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때 결혼을 해서 우리가 아이를 키웠을 거라고. 캐럴라인이 우리 대신 다른 가족과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P.63)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개였다첫번째 문은 가구가 없는 작은 방에 있었고곧장 바다로  있었다 문은 바다를 통해서만 들어올  있는 문이었다화창한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사선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바다 가까이에 있는 벽의 절반을 대각선으로 비추었다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기는 동안에는  벽을 해시계로 삼을 수도 있었다햇살이 드리운 벽의 절반은 벽이 완전  어두워질 때까지 점점 줄어들었다.
(P.109)


  "둘 중 어느 쪽에 공감이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혼자 앉아 있는 남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커플, 그리고 카운터 뒤에서 일하는 남자. 저중 누가 당신인가요?"
  보슈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림을 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저야 당연히 혼자 있는 사람이죠. 그녀가 말했다. 저 여잔 따분해 보여요.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난 절대 따분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보슈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들 말입니까? 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그림이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저 그림 제목이 왜 '밤을 새우는사람들'인지 아세요?"
  아뇨, 잘 모르겠어요."
  "왜 밤인지는 아주 분명해요.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의 '매부리 코를 보세요."
  보슈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그것을 처음 보았다. 남자의 코는 날카로웠고 새의 부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쏙독새*.
   그렇군요.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하나 배웠다.
  하지만 빛을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림 속의 모든 빛은 커피숍 안에서 흘러나와요.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바로 그 불빛이 죠. 빛과 어둠, 음과 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요."

* 그림의 제목 'nighthawks'에는 '쏙독새'라는 의미도 있다.
(P.138)


  영감을 얻으러 왰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림에 관해 백만자는   있을  같아요힘든 일이 생기면 여기로 와요내가 이겨낼 수 있게 도외주거든요."
  "어떤 힘든 일을 말하는 건가요?
  글을 쓴다는 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는 거잖아요. 때론 그게 쉽게 안 떠올라요. 그래서 여기 와서 이런 걸 보는 거예요."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림 가리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보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한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어떻게 옮겨가는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노력을 통해 어떻게 그것이 떠오르는지 자신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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