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 비판 서문
임마누엘 칸트 / 김석수 / 책세상 / 224쪽
(2018. 5. 6.)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초로 붙여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다 태양의 열기에 녹아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 의 운명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의 운명은 어쩌면 이 카로스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이 신화의 인물은 너무 높게 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낮게 날 수도 없으며, 그저 높음과 낮음 사이에서 끝없이 날이야 하는 수고로움을 견디어내야 했으나 그 새는 지신의 날개가 안고 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한 채 하늘 높이 오르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비극에 이른다.
인간 역시 이카로스와 같은 비극을 수없이 겪어간다. 인간은 세계와의 대면에서 자신에게 스며드는 낯설음이 가져다주 는 불안과 초조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와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 이 시간 속에서 좀처럼 실현되지 못할 때 그는 환상과 좌절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함부로 다가서서는 안 되는 태양으로 비약하려고 하거나 서둘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연으로 추락함을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그러나 이 두 길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이 양 극단의 길이 아니라 '사이의 길' , '비판의 길' 을 선택한다. 그는 이와 같 은 정신에 입각하여 회의주의의 길도 독단주의의 길도 거부했으며, 끊임없는 비판 활동으로 '사이의 길' 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신앙 절대주의나 이성 절대주의 어느 한쪽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가 이성의 계몽을 노래할 때도 이성의 무력함이나 이성의 오만함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감성, 지성. 이성 중 어느 한 능력에 절대권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이 둘 사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판단력의 반성적 기능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이와 같은 태도에 입각히여 과학의 길. 도덕의 길, 예술의 길, 종교의 길, 이 모두가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칸트의《순수이성 비판》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의 이 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기존의 모든 철학을 비판의 법정에 올려놓고 엄숙하게 심판하며, 나아가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제반 철학도 엄정하게 심판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생명은 '비판' 이다.
(P.7)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인식하는 어떤 종류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성 자신의 본성상 그 자체에 부여되어 있고 그래서 달리 피해볼 수도 없는 물음들로 인해, 더군다나 그러한 물음들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있어 스스로 답할 수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이성이 이렇게 어려운 상횡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이성 자체의 책임은 아니다. 이성은 원칙에서 출발하며, 이 원칙들을 사용하는 것은 경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동시에 이러한 경험을 통해 충분히 정당화된다. 이성은 이런 원칙들과 더불어 항상 더 높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은 거슬러 올라감은 이성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물음은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자신의 작업이 언제나 미완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적 사용을 넘어서면서도 아마 보통의 인간 이성도 동의할 정도로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원칙들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바로 이 때문에 혼미함과 모순에 빠지게 된다. 비록 이성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디엔가 숨겨진 잘못이 근저에 놓여 있음을 간파해낼 수 있지만, 그 잘못을 들추어낼 수는 없다. 왜쀄면 이성이 시용하는 원칙들은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으므로 더이상 경험이 제시하는 그 어떤 시금석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없이 전개되는 논쟁의 싸움터를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다
(P.15)
우리가 한 권의 책이 위대함을 그 책의 쪽수가 아니라 그 책을 이해하는 데 소일되는 시간으로 측정한다면. 우리는 많은 책에 관해 이렇게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이 너무 짧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책은 훨씬 더 짧아졌을 것이다. 즉 책 쪽 수를 줄이기 위해서 책을 너무 짧게 쓰게 되면 그 책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어 결국 그 책을 더 두껍게 만드는 꼴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광범위하지만 하나의 원리에 통일되어 있는 사변적 인식의 전체를 파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아주 당연히 많은 책은 스스로 너무 명료해지려고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훨씬 더 명료해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료함에 대한 도움들은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가 전체를 파악하는 데는 종종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다지 신속하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게 하며, 뜻을 해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내용물의 밝은 채색은 오히려 체계의 연결 구조와 조직을 덮어씌워 알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이 체계가 지니고 있는 통일성과 견고성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P.24)
학문 안에 이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그 안에서 선험적인 어떤 것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이성의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객체에 관계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인식은 한편으로는 객체와 (다른 어딘가에서 주어져야 하는) 그것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에만 관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관계한다. 전자는 이성의 이론적 인식이며. 후자는 이성의 실천적 인식이다. 이 두 인식 중에서 이성이 완전히 선험적으로 자신의 객체를 결정하는 부분, 즉 순수한 부분은-이 부분이 포함하는 정도가 많든 적든-우선 별도로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른 원천들에서 나온 것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들어온 것을 함부로 지출해서 나중에 경제가 어려음에 처했을 때. 수입의 어느 부분이 그러한 지출을 부담해낼 수 있고, 또 그중 어느 부분이 절약되어야 하는지를 식별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나쁜 경제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P.32)
직관이 대상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대상의 성질에 관해 선험적으로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 통찰할 수 없다. 오히려 (감각의 객체로서) 대상이 우리의 직관 능력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에 나는 이러한 가능성. 즉 대상의 성질을 선험적으로 잘 알 수 있음을 완전히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직관들이 인식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직관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표상으로서의 직관을 대상 외의 다른 어떤 것에 관련시켜야 하고 대상을 표상을 통해 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렇게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개념이 대상에 따르는 경우인데, 그러나 이 경우는 내가 대상에 관해서 어떻게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직관이 대상에 따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대상이나, 아니면 같은 것이지만 그 대상이 (주어진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경험이 이러한 개념들을 따르게 되는 경우이다. 나는 이 경우의 결과가 더 희망적임을 알게 된다. 이 경우에는 경험 그 자체가 지성이 요구하는 종류의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인식은 지성의 규칙을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가 내 안에서, 따라서 선험적으로 전제하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규칙은 개념 안에서 선험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경험의 모든 대상은 필연적으로 이 개념에 따라야 하며. 이 개념과 일치해야 한다. 대상 들과 관련해서 볼 때. 이 대상들 중에는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그것도 필연적으로 사유되지만, (적어도 이성이 그것들을 사유하는 그대로) 경험에서는 전혀 주어질 수 없는 대상도 있다. 그런 한에서 대상을 사유하려는 시도는 (어쨌든 우리가 이런 대상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사유 방식의 변화된 방법으로 수용한 것. 이른바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서 우리 자신이 그 사물들에 집어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해서 훌륭한 시금석을 제공해줄 것이다.
(P.38)
비판은 이성이 학문으로서 스스로 순수하게 인식하는데 이성 자신의 독단적 방법에 대립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학문은 언제나 독단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확고한 선험적 원리에서 엄밀하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은 독단주의에 대립하고 있다. 즉 비판은 오로지 개념으로부터의 순수한 인식(요컨대 철학적 인식)에 의해서만. 또한 이성이 스스로에게 이룰 수 있는 방식과 자격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오래도록 사용해왔던 원리를 그저 좇아서만 자신이 추구해 왔던 직업이 성공하리라고 자만하는 월권에 맞선다. 그러므로 독단주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 능력을 먼저 비판해보지 않고 순수이성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니 이렇게 독단론에 반대하는 것은 통속성이라는 부당한 이름 아래 지껄이는 천박한 언행을 변호하거나 전체 형이상학을 간단히 처리해버리는 회의론을 싸고 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학문으로서의 근원적 형이상학을 촉진시키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미리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근원적 형이상학은 일정한 이론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며 가장 엄밀한 요구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논술되며, 따라서 (통속적이지 않고) 학문적으로 논술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는,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따라서 사변이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로 자신의 일을 왼수해내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기 때문 이다.
(P.54)
초월철학의 이념
경험은 의심할 것 없이 우리 지성이 감성적 감각의 원재료를 가공하서 산출하는 최초의 산물이다 따라서 경험은 우리에게 최 초의 가르침이 되며.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진행됨에 따라 끝없이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산출될 모든 결실이 연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삶은 바로 이 경험이라는 지반에서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앎에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럼에도 물구하고 경험은 우리의 지상이 제한되어 갇히게 되는 유일한 분야는 결코 아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달리 존재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경험은 우리에게 그 어떤 참된 보편성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성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보편성에 관한 인식을 얻기를 열망하며. 경험을 통해서 만족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자극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내적인 필연성이라는 특징이 있는 그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경험에서 독립되어 자체적으로 명확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인식을 선험적 인식이라고 한다. 그와는 반대로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단지 후험적으로나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경험 중에는 그 경험이 자신의 원천을 선험적으로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우리 감관의 표상들을 결 합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인식과 섞여 있음이 드러나게 되며, 이와 같은 사실은 정말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에서 감관에 속하는 것들을 모두 제거 할 때도 여전히 어떤 근원적인 개념들과 그 개념에서 산출되는 판단들이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완전히 선험적인 것으로 경험에서 독립하여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감관에 나타나는 대상들에 관해서 단순한 경험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며, 또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와 같은 것들은 단순히 경험적 인식만으로는 제공해줄 수 없는 참된 보편성과 엄격한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P.63)
모든 판단 안에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정해져 있으며, (나는 긍정 판단을 먼저 고려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에 연이어 이루어지는 부정 판단에는 쉽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하다. 술어 B가 A라는 개념 안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주어 A에 속해 있든지. 아니면 B가 A와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A라는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든지,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와 관련된 판단을 나는 분석적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와 관련된 판단을 종합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분석적 판단(긍정적 판단)은 술어와 주어가 결합하는 것이 동일성을 통해 생각되는 판단이며. 반면 종합적 판단은 이러한 동일성을 통하지 않고 결합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판단이다. 또한 우리는 전자의 판단을 해명 판단이라고 하며. 후자의 핀단 을 확장 판단이라고 한다. 전자는 술어를 통해 주어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않고, 단지 주어 개념을 분석하여 이것을 그 자체 안에서 (비록 불투명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먼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부분 개념으로 분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전자외는 반대로 주어개념에서 그것 자체 안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술어를, 따라서 주어를 분석해도 그것에서 도출할 수 없는 술어를 첨가한다.
1. 분석적 판단을 통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전혀 확장되지 않으며.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개념이 분해되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종합적 판단에서는 내가 주어 개념 외에 다른 어떤 것(X)을 가져야 하고. 지성은 주어 개념 안에 놓여 있지 않은 술어를 주어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바로 이 X에 의지하고 있다.
(P.68)
그 어떤 낯선 것과도 섞여 있지 않은 그와 같은 인식이 순수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인식은 그것에 어떠한 경험도 감각도 전혀 섞여 있지 않고, 완전히 선험적으로만 가능한 경우 순수하다고 명명된다. 그런데 이성은 선험적인 인식의 원리들을 주는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이성은 오로지 선험적으로만 어떤 것을 인식하는 원리들을 포함하는 그와 같은 것이다. 순수이성의 기관은 선험적인 순수한 인식을 모두 획득할 수 있게 해주고 현실적으로 성립되도록 해주는 원칙들을 총괄한다. 이러한 기관을 주도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순수이성의 체계를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매우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인식을 이렇게 확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이성과 그것의 원천과 한계들을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을 순수이성의 체계에 대한 예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이론적 학설이 아니라 단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 유용성은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이성을 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그야말로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비판은 이성을 그 과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와 같은 작업은 이미 매우 많은 소득을 올리는 셈이 될 것이다.
(P.72)
학문을 구분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경험적인 어떤 것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은 전혀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선험적 인식은 완전히 순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고 원칙과 그것의 근본 개념은 비록 선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초월철학에 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에는 전적으로 경험에 원천을 두고 있는 쾌나 불쾌, 욕망과 경향성, 자유로운 의지 같은 개념들이 전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철학은 오로지 순수한 사변이성이 세계에 대해서 갖게 되는 앎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인 것은 모두 그것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 있는 한,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감정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P.76)
어떤 인식은 모든 경험의 영역을 떠나 경험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대상도 주어질 수 없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판단 범위를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 그 외관을 넓혀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이성의 탐구는 감성계를 넘어서는, 그래서 경험이 그 어떤 실마리도 수정도 전혀 제시할 수 없는 바로 이러한 후자의 인식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탐구를 지성이 현상 분야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탐구가 지향하는 궁극적 의도가 훨씬 더 숭고하다고 여긴다. 순수이성 자체가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은 바로 신, 자유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이다. 그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오로지 이와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학문은 형이상학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 형이상학의 방법은 처음에는 독단적이다. 즉 이성이 이렇게 엄청난 기획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 관련하여 자신의 능력과 무능력을 사전에 검토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그것을 성취하는 일을 도모한다.
(P.86)
순수이성은 원리. 즉 오로지 선험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담고 있는 이성이다. 순수이성의 기관이라면 그것은 모든 순수한 인식을 선험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현실적으로 성립시켜줄 수 있는 원리들을 총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기관을 주도면밀하게 적용하면, 순수이성의 체계를 마련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대단히 수고스러우며, 또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도대체 이 경우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이성과 그것의 원천, 한계에 관해서 단순히 평가만 내리는 이와 같은 학문을 순수이성의 체계에 관한 예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교설Doktrln이 아니라 단지 비판Kritikdl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P.104)
순수이성의 비판에는 초월철학에 본질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비판은 초월철학의 완전한 이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학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비판은 선험적인 종합 인식을 완전하게 평가하는 데 필요한 한에서만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문을 구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주목할 것은 경험적인 어떤 것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개념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선험적 인식은 완전히 순수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최고 원칙과 그것의 근본 개념은 비록 선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초월철학에 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도덕의 최상의 원칙과 그 기본 개념은 전적으로 경험에 원천을 두고 있는 쾌나 불쾌. 욕망과 경향성. 자유로운 의지 같은 개념들을 명령의 근거로 두지는 않으나 의무의 개념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로, 또는 움직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극으로, 순수한 도덕성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필연적으로 함께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