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혹은 그림자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 / 이진 / 문학동네 / 440쪽
(2018.4.8.)
미국에서나 전 세계적으로나 호퍼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환호는 전혀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독서가와 작기들 사이에서 유독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호퍼의 작품들이 이야기에 심취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으며 기쁨을 얻는 사람이건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쁨을 얻는 사람이건, 어느 순간 에드워드 호퍼의 팬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퍼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P.10)
나를 가졌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내가 어떻게 되었건 그녀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은가?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날 키워준 사람들, 나의 부모는 더 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날 입양했을 때 사십대였으니 나이도 더 많았고, 날 집으로 데려가 가족으로 품어주 었다. 뭐, 말하자면 그랬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은 막상 날 입양하고 난 뒤에는 자신들이 굳이 입양까지 해야 했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만 말해두겠다. 사랑이 넘치는 집은 아니었다고. 그들은 날 키워주었고, 내게 머물 곳과 음식과 옷, 그리고 교우를 제공해주였다. 그들이 날 위해 한 일들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에 감사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덜 누리며 차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P.50)
"어쨌든, 완벽한 하루였어요.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두려웠던 것만 빼면. 그래서 난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리처드가 날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아마 그날 들어 스무번째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을 또렷이 기억해요. 우리집 포치에 서 있었어요. 자정이 가까웠는데도 여전히 더웠어요. 집안 불은 전부 꺼져 있었지만 엄마가 2층에서 안 자고 날 기다리고 있디는 건 알 았지요. 어쩌면 엄마는 침실 창문에서 엿듣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더이상 귀가 시간 같은 건 없었지만, 그 모든 일을 치르고 난 뒤에도 엄마는 여전히 내가 집에 들어갈 “기까지 잠자리에 들지도. 포치불을 끄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말했나요? 아기에 대해?"
“캐럴라인 얘기. 네, 그 얘기를 했어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땅만 보면서 이야기했어요. 생리를 걸렀다는 것, 아침에 속 이 메슥거렸다는 것. 그가 대학으로 떠나기도 전이었다고. 마침내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까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우시더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다음날 양가 어머니가 커피 한 주전자와 전화번호부를 놓고 마주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는 얘기도요. 세인트메리 미혼모의 집과 거기 있던 여자에들에 대해서도, 집을 떠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도 이야기했어요. 얼마나 그가 그리웠고, 얼마나 두려웠는지도. 캐럴라인이 태어나자마자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리더라고 말했어요. 한 번도 그 아이를 안 아보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다고.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나 자신을 증오한다고.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고, 내 손을 잡았고, 청혼을 했어요 만약 자기가 캐럴라인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때 결혼을 해서 우리가 아이를 키웠을 거라고. 캐럴라인이 우리 대신 다른 가족과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P.63)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개였다. 첫번째 문은 가구가 없는 작은 방에 있었고, 곧장 바다로 나 있었다. 그 문은 바다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다. 화창한 날 그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사선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바다 가까이에 있는 벽의 절반을 대각선으로 비추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기는 동안에는 그 벽을 해시계로 삼을 수도 있었다. 햇살이 드리운 벽의 절반은 벽이 완전 히 어두워질 때까지 점점 줄어들었다.
(P.109)
"둘 중 어느 쪽에 공감이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혼자 앉아 있는 남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커플, 그리고 카운터 뒤에서 일하는 남자. 저중 누가 당신인가요?"
보슈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림을 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저야 당연히 혼자 있는 사람이죠. ” 그녀가 말했다. “저 여잔 따분해 보여요.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난 절대 따분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보슈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들 말입니까? 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그림이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저 그림 제목이 왜 '밤을 새우는사람들'인지 아세요?"
“아뇨, 잘 모르겠어요."
"왜 밤인지는 아주 분명해요.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의 '매부리 코를 보세요."
보슈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그것을 처음 보았다. 남자의 코는 날카로웠고 새의 부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쏙독새*.
“그렇군요.”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하나 배웠다.
“하지만 빛을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림 속의 모든 빛은 커피숍 안에서 흘러나와요.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바로 그 불빛이 죠. 빛과 어둠, 음과 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요."
* 그림의 제목 'nighthawks'에는 '쏙독새'라는 의미도 있다.
(P.138)
“영감을 얻으러 왰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림에 관해 백만자는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든 일이 생기면 여기로 와요. 내가 이겨낼 수 있게 도외주거든요."
"어떤 힘든 일을 말하는 건가요?”
“글을 쓴다는 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는 거잖아요. 때론 그게 쉽게 안 떠올라요. 그래서 여기 와서 이런 걸 보는 거예요."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림 가리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보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한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어떻게 옮겨가는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노력을 통해 어떻게 그것이 떠오르는지 자신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