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쉽게 읽는 칸트) (쉽게 읽는 철학 시리즈 1)
랄프 루드비히 / 박중목 / 이학사 / 204쪽
(2108.4.22.)
칸트를 읽는 것은 어렵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구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란 노력을 요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까닭에 그 속에는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칸트에게서 그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책은 가장 적게 읽히는 독일 철학자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상을 받는 이유는. 과감하게 칸트 강독을 시도하려는 사람의 정신적 한계성이나 경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칸트의 참으로 복잡하고 거대한 사유 구조물에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칸트의 철학적 공간이 유럽의 계몽주의였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어려움을 감수 하면서 칸트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P.6)
칸트의 사상적 전제 조건
생각하는 모든 인간은 오늘날에도 칸트가 대답해야만 했던 동일한 물음 앞에 서 있다. 즉, 나의 인식의 한계는 나의 다섯 감각 기관이 만들어 내는 경험에 의해 정해지는가? 혹은 오성悟性의 영역에 속하는가? 이 두 물음은 철학사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우리는
- 첫번째 대답에 경험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있고.
-두 번째 대답에 합리론이라는 이름올 부여하있다.
(P.18)
초판의 머리말에서 칸트는 자신에게 있어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하고 있다.
머리말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왜si하면 이 문제들이 이성의 모든 능력 밖에 있고, 동시에 대답할 수 없는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성이 이러한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성의 책임이 아니다. 이성은 경험의 진행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동시에 경험에 의해 충분히 확증된 원칙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원칙에 의거해 이성은 (이것이 이성의 본성상 당연하다는 듯이) 더 근원적인 제약들로 점점 더 높이 나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들이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자신의 과업이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가능한 모든 경험적 사용을 뛰어넘으면서도, 동시에 일상적인 상식에도 일치할 만큼 확실한 듯한 원칙들에게서 도피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성은 혼미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혼미와 모순으로 인해 이성은 어딘가 밑바닥에 오류가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찾 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사용하고 있는 원칙들은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어 어떠한 경험으로도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끝없는 논쟁들의 싸움터가 바로 형이상학이다.
(P.33)
형이상학에서는 어떤 물음을 중요시하는가? 우리는 그중 하나의 물음을 이미 앞에서 제기하있으며,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다. 모든 존재자의 배후에는 어떤 근거가 숨어 있는가?
칸트 시대에는 합리론자들(칸트는 머리말에서 그들을 독단론자라고 불렀다)과 경험론자들(칸트는 이들을 무관심자라고 불렀다)이 형이상학의 싸움터에서 서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싸움터에서 이제 칸트가 공격을 개시한다. 그의 무기는『순수이성 비판』이다. 특이한 책제목에 대해 우리는 이미 고찰하였다. 다음의 강 독에서 칸트는 제목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그의 계획을 설명 한다. 즉, 비판Kritik은 결코 부정적인 판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단지 “검사하다" 혹은 “조사하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밝혀야 할 중요한 단어는 “ 순수rein”이다. 이성 활동이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 이성 활동은 순수하다. 따라서『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을 통한. 더욱이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 인식의 탐구이다. 즉, 『순수이성비판 』 의 주제는 이성의 자기 인식이다.
(P.35)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나 대상에 관한 무엇인가를 개념을 통해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그 개념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인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는 전제를 무너뜨렸다. 그러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형이상학의 여러 가지 과제가 좀 더 잘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시도는 한번 해볼 만하다. 형이상학에서는 선천적 인식. 즉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앞서 대상에 관해 무엇인가를 결정하 게 되는 인식의 가능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또한 지금 말한 가정만으로도 벌써 이러한 요구와 더욱 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생각과도 같다. 그는 모든 천체가 관찰자의 주위를 운행한다고 가정 했을 때 천체 운동의 설명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관찰자가 돌고 반면에 별들을 고정시키면 그 설명이 전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시도하였다. 형이상학에서도 대상의 직관에 이와 유사한 방법을 지도해 볼 수 있다.
(P.43)
별, 행성, 구, 테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 성이라는 이름의 개념들은 오성의 산물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토성이라는 행성은 인식 행위 속에서 점점 변화하며 우리의 오성에 따라 성립된다. 단, 토성 자체는 번화하지 않는다.
외견상 별도로 토성 자체라고 언급된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칸트 철학의 중요한 핵심과 마주친다. 그것은 바로 물자체이다. 우리가 토성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칸트는 우리가 토성에 도착하여 토성을 관찰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른 대상들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즉, 대상 자체는 인간 마음대로 규정할 수 없는 물자체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그의 감각으로도, 이성으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물자체가 우리의 오성에 의해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만을 진술할 수 있다. 혹은 칸트의 표현에 의하면 물자체가 오성에 의해 어떻게 현상되어지는가만을 진술할 수 있다. 앞에서 인규된 인용문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음의 내용이다.
대상들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오로지 (주어진 대상들로서) 인식되는 경험이 그러한 개념들에 따른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B WII)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명백하다.
(P.47)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명백하다. 동시에 이는 다음과 연결되고 있다. 즉. 물자체는 결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언제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물자체 대신에 물자체의 현상을, 또는 내가 인식할 수 있도록 경험을 상정한다면 이 위험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은 나의 오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파악한 것을 인간의 이성이 자기 자신의 경험과 함께 검토하는 장점을 가진다.
이것은 지금부터 학의 체계 자체가 아닌, 하나의 방법론으로서의 형이상 학의 과제이다. (B Mll)
(P.48)
| . 순수 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구별에 관하여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에 의해서 그 활동을 개시하도록 깨우쳐지겠는가? 대상은 우리의 감관Sinn을 자극하여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상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오성 능력을 활동시킨다. 오성 능력이란 표상을 비교하고 결합하거나 분리시켜서 감성적 인상이리는 원재료를 대상의 인식. 즉 경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볼 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앞서지 못하며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인식이라는 것도 우리가 인상을 통해 받이들인 것과 (감성적 인상에 의해 단지 야기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고유한 인식 능력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 능력의 부가물을 인식의 원소재와 구별하는 일은 오랜 훈련에 의해 이 부가물에 주의하게 되고 그것을 분리하는 데 숙달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또한 감관의 모든 인상으로부터 독립된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더 깊은 연구를 요하며, 한 번 보고 당장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선천적a priori 인식이라 부르고, 이를 경험적 인식과 구별한다. 경험적 인식이란 그 원천이 후천적a posteriori. 즉 경험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B 1 ff.〉
모든 인식의 시간적 시작에는 경험이 서 있다.
(P.50)
ll. 우리는 어떤 선천적 인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상식 자체에도 그런 것이 없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 인식과 경험적 인식을 구별할 수 있는 징표를 문제 삼고자 한다. 경험은 물론 어떤 사물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그것이 그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첫째,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명제는 선천적 판단이다. 그 밖에 그 명제 자체가 다시금 필연적 명제로서 타당하다는 것 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명제는 절대적으로 선천적인 것이다. 둘째, 경험은 결코 그것의 판단에 참된 혹은 엄밀한 보편성을 제공하지 못하고, 단지 (귀납을 통하여) 가정된, 즉 비교적인 보편성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지각해 온 범위 내에서는 이 규칙이나 혹은 저 규칙에 예외가 없었다고 원래 말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판단이 엄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즉 어떠한 예외도 가능하지 않다고 인정되면 그것은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천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보편성은 대다수의 경우 타당한 것을 모든 경우에 타당한 것으로 타당성의 정도를 마음대로 끌어올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하나의 판단이 본질적으로 엄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보편성은 판단의 특수한 인식의 원천, 즉 선천적 인식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은 선천적 인식의 확실한 특징이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두 특징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판단에서의 우연성 보다는 판단의 경험적 제한성을 지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 한결 더 쉬울 수 있으며, 또는 판단의 필연성보다는 우리가 판단에 부여하는 무제한적인 보편성을 지시하는 것이 우리가 납득하기에 더 쉬운 경우가 많으므로. 지금까지 말한 두 기준은 각각 하나만으로도 확실한 것이지만 서로 구분하여 사용히는 것이 좋다.
(P.52)
분석 판단은 나의 지식 상태를 확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석 판단 역시 중요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많은 개념들을 명확하게 할 따름이다. 반면 종합 판단은 나의 지식이 실질적으로 확장되는 데 기여한다. 단지 내가 경험에 의존한디는 사실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 딜레마는 칸트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한다. 즉, 나의 인식을 실질적으로 확장시키면서도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타당한 판단이 있는가? 칸트의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분석 판단과 같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종합 판단은 있는가? 혹은 더 간단하게 묻는다면, 선천적 종합 판단은 있는가?
칸트는 이 물음에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그는 다른 학문의 예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P.58)
칸트가 염려한 것처럼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다루는 문제는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가능한 인식의 무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단지 형이상학 그 자체와 이성학으로서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과제이다. 칸트는 이성이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체계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이 체계를 선험 철학이라고 부른다.
칸트 철학의 핵심적인 용어인 선험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선험적transzendental”과 아주 비슷하게 들리는 “ 초월적transzendent" 이라는 용어와 함께 시작해 보자. 아마도 독자는 이 용어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선험적”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초월적 이라는 말은 라틴어 transcedere에서 파생된 것으로 뛰어넘다 hinüberschreiten, 경계를 벗어나 다 eine Grenzeüberschreiten라는 뜻이다. 벗어나게 되는 경계는 우리의 오감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계와 같은 인 간의 현실성을 말한다. 신 또는 무한성 같은 개념들은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칸트의 개념인 선험적 (이 말은 칸트 이전에 이미 있었으나 다른 의미 로 사용되었다)이라는 말 역시 경계를 벗어난다. 그러나 앞을 향하여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 모든 경험을 뛰어넘어 저편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쪽을 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무엇이 모든 인식의 근거가 되는가? "모든 인식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를 의미 한다.
그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또는 신학적 방식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서의 인식 가능성의 선천적 조건을 묻는 것이다. 모든 경험 이전에 놓여 있는 경험의 조건에서 중요한 문제는 인식의 대상들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 방식이다.
(P.61)
┌ 선험적 원리론 ┌ 선험적 감성론 ──────┬ 공간론
│ │ (감성적 지각에 대한 이론) └ 시간론
│ └ 선험적 논리학 ──────┬ 선험적 분석론 (주제 : 오성)
│ (사고의 이론) └ 선험적 변증론 (주제 : 이성)
└ 선험적 방법론
(P.67)
1. 감성 Sinniichkeit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보고 있는 서가書架는 나의 시각에 작용하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나의 촉각에 작용한다(촉발하다=작용하다. 자극하다).
2. 대상들의 이러한 작용은 우리에게 직관 Anschauungen들을 제공한다.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대상들을 보고 / 느낀다.
3. 이것이 오성과 함께 사고되어지면 오성에서 개념 Begriffe들이 생겨난다(의자/서가).
4. 대상들이 우리의 감성에 미치는 결과를 칸트는 감각 Empfindung 혹은 경험적 직관 empirische Anschauung이라 부른다(개념과 직관의 합주).
5. 이 직관의 대상을 칸트는 이제 현상Erscheinuung이라 부른다.
이제 주의 깊은 독자는 들릮없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5번에서 언금된 “현상”과 1번에서 언급된 “대상” 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결론을 말한다면.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P.72)
감성의 모든 선천적 원리에 관한 학문을 나는 선험적 감성론이라 부른다. 이것은 순수 사고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선험적 논리학에 맞서는 학문으로. 선험적 원리론의 제1부를 형성하여야 한다.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우선 감성을 고립시켜야 되는데, 이 일은오성이 그 개념을 통해 사고하는 일체를 분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런 조지를 취하는 것은 경험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경험적 직관으로부터 감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이것은 감성이 선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순수 직관과 현상의 단순한 형식 이외에 이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연구해 나감으로써 선전적 인식의 원리로서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이 있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는 일 에 몰두하기로 한다.〈B 35 f.>
칸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한 다음 단계에 착수하면서 “선험적 논리학의 개념을 소개한다. 순수 논리학과 선험적 논리학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음의 텍스트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순수 직관도 아니고 감성적 직관도 아닌 순수한 사고의 작용인 개념들, 즉 경험적 근원에서도 감성론적 근원에서도 생기지 않는 개념들이 선천적으로 대상에 관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아래 우리는 미리 순수 오성 인식과 순수 이성 인식에 관한 학문의 이념을 형성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선천적으로 사고한다. 인식의 근원 • 범위 •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이러한 학문을 우리는 선험적 논리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험적 논리학은 단지 오성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만을 다루지만, 그 법칙들이 선천적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범위 내에서 다를 뿐이지 일반 논리학처럼 경험적 인식과 무차별적으로 관계를 갖는 범위 내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B 81〉
(P.86)
선험적 분석론
이 분석론은 우리의 모든 선천적 인식을 순수 오성 인식의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네 가지 점이 중요시 된다.
1. 개념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개념이다.
2. 개념은 직관이나 감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오성에 속한다.
3. 개념은 기본적 개념으로, 파생적 개념 또는 이것으로부터 합성된 개념과 구별된다.
4. 개념의 표는 완전하고, 순수 오성의 모는 분야와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순수 오성은 모든 경험뿐 아니라 모든 감성에서도 구별된다. 그러므로 순수 오성은 자립적이며 자족적인 통일체이지 결코 외부로부터 부가되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논리학의 모든 부분은 두 편으로 이루어졌다. 제l편에서는 순수 오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제2편에서는 순수 오정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P.88)
개념의 분석론
나는 개념의 분석론을 개념의 분해로 이해하거나, 또는 제시된 개념을 분석하여 판명하는 철학적 연구의 통상적 방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개념의 분석론이란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오성 능력 자체 의 분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선천적 개념들의 출생지인 오성 안에서만 그린 개님들을 발견합으로씨, 그리고 오성 능력의 순수한 사용 일반을 분석함으로써 선천적 개념들의 가능성을 탐구혀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험 철학의 진정한 과업이다.
(P.89)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간단하 게 요약하고, 짤막한 문장으로 되새겨 볼 것이다.
1, 감성의 범위 내에서 시간과 공간은 모든 감각을 정돈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선험적 감성론을 다루면서 밝혔다. 즉.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2. 오성은 정돈된 감각들을 지속적으로 틀로 만들어 그것을 대상과 관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선험적 논리학을 다루면서 이 사실을 밝혔다. 즉, 대상은 사고되어진다.
3. 이제 개념은 오성에 의해 판단에 결합된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논리학의 하위 분과로서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이다.
칸트는 판단을 결합시키는 활동에서 발견할 정돈 요인들을 선험적 근본 개념 혹은 범주들(여기에 서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부른다.
(P.93)
지금까지는 선천적 순수 오성 개념 일반으로서의 범주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선험적 연역에서는 범주와 그 범주의 사용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바로 “연역” (라틴어: Deduktion, 독일어: Ableitung)을 의미한다. 순수 개념의 정당성은 오성에서 나온 이 순수 개념의 연역을 통해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연역은 선험적 연역으로서 개념의 가능한 인식의 조건도 정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선험적 연역의 첫 번째 중요한 과제이다.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순수 오성 개념이 즉자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이 물음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칸트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물음의 중요성을 파악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99)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중요하나 취약한 부분으로 이미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선험적연역에서 그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이 취약한 부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단을 요구한다.
대상이 있기 때문에 범주가 있느냐, 아니면 범주가 있기에 대상이 있느냐?
주의 깊은 독지는 칸트에게는 후자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오성이 범주와 더불어 어떻게 대상과 관계하고 있는지의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시 고양이의 예를 살펴보자. 즉, “범주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라는 답변에서 단일성의 범주가 콧수염과 귀여운 발을 가진 모피의 존재를 산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단일성의 범주는 콧수염과 귀여운 발을 가진 모피 존재의 직관을 산출한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P.102)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선천적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필연적으로 대상과 관계하며, 또 어떻게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상의 종합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지 우리는 감성론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대상은 감성의 순수 형식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현상될 수 있기 때문에, 즉 경험적 직관의 객관일 수 있기 때문에, 시공은 현상으로서 대상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조건을 포함한 순수 직관이요. 시공 안에서의 종합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
반면에 오성의 범주는 대상들이 직관 속에서 주어지기 위한 조건을 우리에게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상들은 오성 기능에 필연적으로 관계 하지 않더라도, 동시에 오성이 대상의 조건을 선천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확실히 현상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성의 영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하나의 곤란한 점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게 되느냐, 다시 발해 어떻게 대상의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주어지느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성의 기능이 없더라도 현상은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103)
현상들 중에는 어떤 규칙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규칙에 따라 어떤 일이 습관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는 있어도 결코 그 결과가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종합은 결코 우리가 경험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즉, 결과는 원인에 덧붙여질 뿐 아니라, 원인을 통해 정립되고,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규칙의 엄밀한 보편성은 결코 경험적 규칙의 성질이 아니다. 경험적인 규칙은 귀납을 통해 오직 비교적인 보편성, 즉 광범위한 유효성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일 순수 오성 개념을 경험의 산물로 다룬다면, 이 개념의 시용은 전적으로 변경될 것이다.
칸트의 물음은 원인 개념 또는 인과성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고의 주관적 조건”으로서의 인과성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B 122〉현상들에 대한 어떤 합규칙성의 관찰로는 결코 이러한 타당성을 도출할 수 없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순한 공상'이 될 것이다.
인과성의 개념에 관해 칸트의 판단표에서 우리가 제시한 예, “태양이 비추고 있기 때문에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버터가 녹는다"를 적용해 보자. 우리의 감성적 경험은 태양, 탁자 및 버터의 액화는 지각하지만 “때문에”, 즉 태양과 액화의 인과성은 지각하지 않는다. 인과성은 오성에서 나은 것이지만 모든 경험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이것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오성은 인과성의 범주를 도장처럼 감성적 지각의 조야한 재료들에 새겨 놓고, 지각 속에서 인과성을 재발견한다.
(P.105)
주관성과 객관성은 선험적 자아 의식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이렇듯 가깝게 놓여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아마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두 개념을 절대적인 대립 개념으로 보는 데 익숙하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칸트만 알았던 것은 아니다. 철학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독자 역시 이러한 사실에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을 명백하게 확증된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 자신도 소위 명백성은 우선 주관적인 관찰자에 의해 확증된 것임을 시인해야 한다.
(P.113)
우리의 오성이 오직 섬을, 즉 경험적 사물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섬에서 오성은 안전하다. 그러나 오성은 섬을 벗어날 수 없다. 섬의 측량은 우리가 섬의 현상 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오직 우리의 측량 기구(감성적 지각, 범주 그리고 도식)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오성은 이미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측량 도구는 한계를 벗어나서는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도구는 가상假象의 대양에서 떠돌아다니는 안개 봉우리와 녹아 내리는 빙산을 조사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
칸트는 섬과 대양에 각각의 명칭을 부여했으며, 이 명칭은 그의 실천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섬은 현상체Phaenomenon의 세계요, 대양은 물자체 혹은 가상체Noumenon의 세계이다. 이 가상체는 사고될 수 있으며, 더욱이 사고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결코 인식될 수는 없다.
(P.131)
선험적 가상은 해결되지 않은 채 이성에 속해 있다. 이성-이것이 바로 선험적 변증론의 주제이다. 우리는 오성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상당히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 오성을 규칙들의 능력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성을 오성과 구별하여 원리들의 능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B 356〉
모든 인식은 감각적 지각에서 출발하고, 알다시피 오성은 이 지각들을 개념들의 형식으로 통일화시킨다. 그러나 “최고의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의 과제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가공하여 그것을 사고의 최고 통일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P.136)
칸트가 형이상학은 세 가지의 (선험적) 이념들. 즉 영혼 불멸, 자유 그리고 신만을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a) 인간이 종속되는 제약들에 대해 무제약적인 어떤 것. 즉 이 무제약들의 통일로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칸트는 이 무제약적인 것을 (영혼의) 불멸이라고 부른다. 영혼의 불멸은 심리학의 대상이다.
b) 모든 현상의 조건인 세계가 종속되는 제약들에 대해 이 제약들의 통일로서 무제약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 무제약적인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는 우주론의 대상이다.
c) 사고와사고된 것 모두가 종속되는 모는 제약들에 대해 이 제약들의 통일로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 통일을 하나의 필연적 존재에서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신은 신학의 대상이다.
(P.139)
변증론 Dialektik이란무엇인가?
변증론이란 희랍어인 dialegomai, 즉 "나는 대화한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것은 독일어 "Dialog(대화)”와 거의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 Dialektlk의 가장 간단한 번역은 “담화술Untetrdungskunst" 이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편을 기억하는 사람은 변증론을 “변론과 항변에 관한 방법"으로, 즉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어떤 명제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의 특정한 질문에 대한 찬반의 균형으로 번역할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변증론은 가상의 논리학을 말한다 이성은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동안 모순에, 즉 앞에서 언급된 오류 추리에 빠져 버린다. 그리하여 칸트 이후에, 위대한 철학자 헤겔이 (간단하게 언급한) 테제 These, 안티데제Antithese, 진테제synthese라고 부른 변증법의 초석을 마련한다.
(P.144)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신학에 대해 이성을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라고 하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이고, 또한 이와 반대로 이성을 자연에 사용하려는 원리 들도 어떠한 이론에 도달하지 못하며. 따라서 만일 우리가 도덕법을 근저에 두거나 길잡이로 삼지 않는다면. 무릇 이성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최고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오성은 이런 초월적 사용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B 664)
여기에서 모든 합리적 신학. 즉 이성에 근거한 신학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이성은 방금 읽었던 부문에 거의 숨겨져 있는 신학의 과제, 즉 도덕 법칙을 위한 정초만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의 사변적인 물음은 실제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즉, 도덕은 신학 내에서 이성의 유일한 현존 권리인가? 혹은 도덕은 이성을 위한 신학의 유일한 현존 권리인가?
칸트는 끝을 맺는다. 신 증명은 반박되었다. 그러나.
그러므로 최고 존재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상 이기는 하지만 오류가 없는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을 완결시키고 영예롭게 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증명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반박될 수도 없다. (B 670)
이와 함께 칸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도를 500년 후에 반박하였고, 신의 비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하Ludwig Feuerbach보다 100년 앞서 그 증명 역시 불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다.
(P.182)
칸트를 읽는 것이 진정 유익한 것인가?
우리가 칸트를 선택하기 위해 선전해야 할 이유를 이 소책자의 서두에 열거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은 이미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단지 몇 줄로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하도록 유혹해서는 안될 것이다.
칸트에 관한 참고 서적에서 우리는 칸트의 공로에 대한 다양한 경외심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칸트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성의 수행 능력에 관한 연구를 앞서 추진했던 철학자였다고, 다른 주석자는 칸트가 분명 계몽주의를 주도한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계몽주의가 근대의 모든 정치적 운동과 서구의 민주주의 그리고 동구의 사회주의 발생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많은 사상가들은 칸트와의 대립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철학으로 매진했다고. 그리고 칸트 이후의 철학적 사유는 칸트 없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옳다. 그러나 칸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우리의 책이 단지 주변적으로 다루었던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정언 명령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자유와 자연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에서 찾아 볼수있다.
이에 관해서는『쉽게 읽는 칸트』의 두 번째 권에서 다룬다. 그러나 이 사상은『순수이성비판』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P.193)
형이상학은 선험 철학으로서 인식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다 우선 감성적 지각이 탐구되면서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두 형식. 즉 공간과 시간이 발견된다. 시공과 함께 모는 감각들은 정돈되고 연이어 오성에 의 해 개념으로 형성된다. 이와 연관된 사고의 탐구에서 범주가 발견된다. 법주는 개념을 판단하게 하고 결합시키며, 오성에 의해 도장처럼 감성적 지각 속에 각인된다. 그러나 우리의 오성 지식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과 함께 단지 현상계에 제한되어 있다.
오성이 추론하는 이성으로 확장되면서 우리의 현상계를 넘어 현실성의 본질 자체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오성은 모순에 빠지게 되며 추락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성은 체념한 채 절대적인 것의 표지로서의 이념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P.194)
칸트 철학은 그 내용이 너무나 심오하고 방대하기에 초보자는 물론이고 철학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가 스스로 제기한 물음을 통해 그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철학적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질문은 단 네 가지이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답하 려고 칸트는 일생 동안 노력해 왔다.『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첫 번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칸트는 이성 능력 자체를 검사하고 비판한다. 이성 능력 자체의 비판을 통해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이 책은 칸트가 제기한 네 가지 질문과 연관하여『순수이성비판』을 다루고 있다. 이는 초보자가 칸트 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