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정신의 체계, 자유와 이성의 날개를 활짝 펼치다)

(인문고전 깊이읽기 15)

김준수 / 한길사 / 628쪽

(2018.10.28.)

헤겔은 일반적으로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근대를 특징짓는 휴머니즘적 세속성, 이성에 대한 신뢰, 세계를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질서로 개편하려는 열망, 민중을 계몽된 주기로 세우려는 도덕적 확신,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해겔의 철학에서 정교하게 정당화되고 체계화된 학문적 표현을 얻는다. 그래서 사림들은 그를 이미 생전에 '근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일컬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그리스의 마지막 깊은 숨결이었듯이, 헤겔의 철학은 근대의 막바지에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황혼의 햇살이었다.

그러나 헤겔의 탁월함은 그가 단지 근대의 가장 높은 지점을 사유의 지평으로 삼아 근대 철학을 완성했디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지평인 근대성 자체를 반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이다. 그는 혁명의 환희만큼이나 전쟁의 비극과 처참함도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 계몽적 합리성 이면에 있는 근대적 주체의 욕망과 불안과 동요, 근대적 질서의 허약함과 파편성, 근대적 합리성 자체의 자기 해체적 경향에 대해서도 그는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의 철학은 황혼과 함께 저물어가는 근대의 절벽 위로 날아오른 미네르바의 올빼미였다. 그는 근대를 대변하면서 동시에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헤겔이 실패한 지점에서조차 우리는 근대의 내부에서 근대와 현대를 균열시키는 결정적인 절리(節理)를 감지할수 있다.

바로 여기에 헤겔의 철학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시의성이 있다. 근대가 남겨놓은 미완의 기획을 완수 하려는 사람도 또 근대의 패러다임 자체를 거부하고 넘어서려는 사람도 자신의 작업이 진지한 노력이 되기 위해서는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현대의 실증주의 논쟁,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등에서 헤겔은 늘 다시 살아난다.

(P.16)

한 철학자의 사상에는 그의 삶과 그의 시대가 묻어 있기 마련 이다.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이자 '세계사의 위대한 시대'로 진단하고 또 '모든 철학은 그 자신의 시대의 철학'이라고 규정했던 헤겔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자신의 철학이 지닌 역사성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의 시대가 이룩한 위대한 성과와 극복되어야 할 한계를 자신의 철학 속에서 명료화하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이 눈앞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직접 적인 응답은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은 그의 사유 속에서 고도로 추상적인 차원에 이를 때까지 삭혀지고 숙성되어 보편적 근본 원리로 정화된 후에 다시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철학 체계의 형태로 전개된다. 그의 철학은 현실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실로부터 이성을 길어내고 또 학문적 반성을 통해 정제된 이성을 가지고서 현실을 진단하며 비판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로서의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했던 시대 상황과 그의 사유가 거쳐간 내적 발전의 상호 작용을 따라서 그의 삶을 조명해야 한다.

(P.21)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청년 헤겔이 품었던 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운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의 시대분열과 적대의 시대, 법률과 소유물 같은 죽은 것이 살아 있는 것을 지배하는 사물화의 시대로 진단했다. 베른 시기에 헤겔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그 탈출구를 모색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칸트의 실천이성을 더 이상 해결책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분열의 산물, 그가 베른 시기에 그토록 비판했던 율법주의의 한 형태로 파악 한다.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성감성과 이성, 자연과 자유, 개별과 보편 사이의 대립을 전제하고 나서 후자에 의한 전자의 지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적인 인간은 이성으로부터 배제된 자연과 대립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이성과 감성, 예지계 와 감성계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성의 율법에 대한 복종만을 낳을 뿐 살아 있는 통일과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런 분열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대립자들이 자신의 배타적 개별성을 스스로 지양하고 보편으로 고양시켜 서로 안에서 융화되어 생동하는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것들의 생동하는 합일을 헤겔은 '사랑'이라고 일컫는다. 분열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원리는 바로 사랑에 있다.

그러나 헤겔은 이미 프랑크푸르트 시기부터 점차 사랑의 내적 한계를 자각하면서 사회 구성의 보편적 규범 원리를 사랑에서 찾으려는 구상을 곧 포기한다. 하지만 '하나 됨, 분리된 것들,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된 것'이라는 세 가지 계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주고받음'이라는 사랑의 구조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1800년 체계 단편」에서 '대립과 연관의 결합' 또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이리는 공식화를 거치면서 헤겔 특유의 변증법 논리와 승인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P.36)​

'운명' 개념 역시 헤겔이 횔덜린의 도움으로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 그리고 횔덜린 자신의 비극적인 삶으로부터 배운 것이 다. 헤겔에게 운명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강요된 우연의 힘이 아니다. 운명인간 스스로 자연(본성)과의 통일된 삶을 파괴한 행위에서 초래된 '분리된 적대적인 삶'이고 이렇게 '침해받은 삶'이 침해하는 행위자 자신의 삶에 형벌의 형태로 반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운명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리고 이처럼 운명을 그 필연성 속에서 파악하고 나면 고통은 남을지라도 괴로움과 적대는 사라지고 운명과 화해할 수 있 게 된다. 운명, 즉 분리된 것과의 화해가 바로 사랑이며, 파악된 필연성은 곧 자유이다. 운명은 거부하거나 아니면 복종해야 할 낯선 힘이 아니라 유화되어야 할 삶 자체의 필연적 계기이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헤겔은 시대의 분열이 인간 역사의 필연적인 운명이며 진정한 자유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과정 중의 한 계기 임을 깨닫게 된다,

(P.38)

의식철학적 • 행위이론적 서술 방식의 도입 못지않게 헤겔 고유의 변증법 논리를 개발하고 승인이론을 체계화한 것도 이 시기에 헤겔이 이루어낸 핵심적인 성과들이다. 예나 초기까지도 헤겔은 개념을 통한 반성적 사유가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전제 하기 때문에 절대자를 포착하는 데에 부적합하며.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개념적 사유우의 형식적 법칙을 다루는 논리학은 진리의 학인 형이상학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헤겔은 이제 의식의 개념적 사유가 대상에 대한 반성 속에서 동시에 자기에 대한 반성을 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 수정하고 지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내제적 비판과 초월의 논리, 즉 변증법을 발견한다. 개념적 사유를 통해 사변적 통일로서의 절대자에 도달하고 이를 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길을 확립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예나 중기 이후의 헤겔은 논리학을 더 이상 형이상학의 예비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포괄한 원리들의 체계적인 사변적 논리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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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에서 헤겔은 근대적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규범 원리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법적 • 도덕적 • 제도적 형태로 구체화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그런 규범 원리를 '인륜성'이라고 규정했으며, 상호주관적으로 연대한 개인들의 유로운 의지를 인륜성의 출발점이자 근원으로 삼았다. 이 저서에는 헤겔이 청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고심하며 가다듬어온 그의 실천철학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평가는 이런 본질적인 내용보다는 책의「서문」에서 헤겔이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발언한 몇몇 구절들에 집중되었다. 여기서 헤겔은 공공연하게 학생조합과 그의 오랜 경쟁자인 프리스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그 맥락에서 은연중에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했다. 그러고는 '현실적인 것'을 이성적이라고 선언했다.

(P.73)

헤겔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그 내부에서 탐사하기에 앞서 먼저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그의 철학 체계와 서술 방식을 큰 들에서 조망해보는 것으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하자. 이 첫 접근을 통해 우리는 헤겔 철학의 전체적인 윤곽과 구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① 헤겔의 철학 체계는 어떤 분과 학문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② 이 분과 학문들은 서로 어떤 논리적 연관을 통해 하나의 체계로 결합되어 있는가? ③ 이렇게 철학 체계를 하나의 유기적 총체로 전개하는 헤겔의 독특한 서술 방식은 무엇인가? ④ 그는 왜 철학이 '체계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헤겔의 철학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 한 가지로 가히 '체계의 철학'이라고 불릴 만하다. 헤겔은 철학이 유기적인 체계의 형태로 서술될 때에만 참다운 철학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런 신념에 따라 오랜 기간 자신의 철학 체계를 끊임없이 구상하고 가다듬었다. 그리고 18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이런 노력은 그 폭과 높이와 깊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장대하면서도 정교한 철학 체계를 낳게 되었다.

(P.87)

『철학 백과전서』에 집약되어 있는 헤겔의 본격적인 철학 체계를 살펴보자. 이 체계는 사변적 순수 사유의 학인 논리학, 그리고 실재철학의 두 축인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을 포함하는 총 3부로 구성 되어 있다.

이처럼 학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I. 논리학, 즉자 대자적 이념의 학

II. 그 타자 존재 속에 있는 이념의 학으로서 자연칠학

III. 그 타자 존재에서 자기 안으로 복귀한 이념으로서 정신의 철학.(E,§18)

철학은 근본적으로 사유와 존재의 통일로서 진리 자체인 '절대 이념'의 학인데, 그것이 다시 순수 사유라는 내재적 형식 속의 이념, 외면적 현존재로 외화되고 분산된 타자 존재라는 형식 속의 이념, 타자 존재 속에서 자신을 자아로서 자각하고 결집하는 현실적 자기 존재라는 형식 속의 이념, 이렇게 세 가지 상이한 규정과 그 고유한 요소에 따라 각각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분화된다.

(P.97)

헤겔에게 논리학은 “본래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며 순수한 사변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및 그 아류들, 그리고 셸링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헤겔에게서는 논리학이 한낱 사유의 '도구'(organon)가 아니라 기존의 형이상학을 대체하면서 그것이 곧 진리의 학인 형이상학이 된다. 이러한 대담한 전환은 헤겔이 변증법이라는 고유한 논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변증법개념적 파악의 한계를 개념의 자기 운동을 통해 내재적으로 초월하여 진리에 도달하는사변적 논리이기 때문이다.

(P.100)

​​

​​

'관념론'(Idealisms)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헤겔 철학과 관련 되는 한에서는 이러한 '이념'(Idee)에서 파생된 것이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관념론, 그것도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참다운 철학은 관념론”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념론이란 바로 이념 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사변적 이성의 관점에서 세개를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대하는 사상 체계를 일컫는 것이다.

​ 그런데 독일 관념론 일반, 특히 헤겔의 관념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오해와 편견이 있다. 우선 '관념론'이라는 번역어의 적절성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는 헤겔의 '이념'보다는 근대 경험론자들의 '관념'(idea)을 더 쉽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상 '관념적'이라고 말할 때 '그 자체로는 실재성을 결여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표상에 입각하여' 정도의 의미를 염두에 두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경험론에서 말하는 '관념'의 뜻이다. 만약 관념론이 이런 의미에서의 관념에 의해 현실이 규정되고 더 나아가 물질 세계가 창출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관념론은 일종의 비상식적인 영성주의(靈性主義)나 유아론(唯我論)에 가까울 것이다. 헤겔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만큼이나 이런 의미의 '관념'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헤겔의 '이념'은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P.152)

헤겔은 자신이 내세우는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요악하여 정의한다. ​

보편의 특수화를 해소하면서 또한 산출해내는 개념의 운동 원리를 나는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 부정적인 방식의 변증법은 다만 어떤 생각에 반대되는 것이라든가 또는 고대의 회의주의처럼 그 어떤 생각이 지닌 모순을 변증법의 궁극적인 결과로 간주하기도 하고 또 그보다 더 진부한 방식으로 진리로의 접근이라는 현대의 어중간한 입장을 궁극적인 결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차적인 의미에서 개념의 변증법은 규정을 한낱 제한이나 반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규정으로부터 긍정적인 내용과 귀결을 산출해내고 또 그렇게 파악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 개념의 변증법은 발전과 내재적 전진을 이루는 것이다.(『법철학』)

주지하다시피 헤겔의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3단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부정의 이중성 또는 관계항들의 분회된 내부 연관을 감안하여 4단계나 5단계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런 변증법의 3단계 구조는 '자기 안에 머무름'(즉자, 존재, 동일성, 주관성, 보편성), '외화와 타자 존재'(대자, 본질적 관계, 차이와 모순, 객관성, 특수성),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여 있음'(즉자 대자, 주체로서의 개념, 재구축된 동일성, 이념,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개별자)이라는 정신의 세 가지 운동 계기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를 앞의 인용문에서는 '보편에서 특수를 산출해내면서 이 특수를 다시 해소하는 운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P.215)

​​

마지막으로 철학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헤겔이 전하는 조언을 들어보자. 철학은 결코 특정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 철학을 시작하는 데에 요구되는 전제 조건은 천재적인 재능도 아니고 세상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아니다. 다만 “순수하게 사유하겠다는 결단”, '스스로 끝에 이를 때까지 생각하겠다는 결심'만이 유일하게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고 철학적 진리가 아무런 수고나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자만이 순수하게 사유할 수 있으며,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념적 사유의 팍팍한 사막을 건너기는 힘겨운 노동의 길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철학의 진리는 만인에게 열려 있는 맑고 투명한 샘물이고 누구나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장미이다. 진리는 시기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학문과 예술과 숙련된 기능과 수공업에 관해서는 이를 터득하는 데에 다방면의 노력을 수반하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통상 확신한다. 반면에 철학과 관련해서는 엉뚱한 편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즉 눈과 손이 있고 거기에 가죽과 도구가 주어져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든 자신의 자연적 이성에 그 기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철학을 할 수 있고 또 철학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는 편견 말이다. 그것은 마치 누구든 자신의 발을 신발의 척도로 가지고 있 기 때문에 구두를 만들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더 나아가 이는 지식이나 연구가 없어야만 철학을 얻을 수 있고 지식이나 연구가 시작되면 이미 철학은 끝난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정신현상학 1』)

참다운 사상과 학문적 통찰은 오직 개념의 노동 속에서만 얻어진다. 오직 개념만이 지(知)의 보편성을 창출해낸 수 있으니, 이러한 보편성은 평범한 상식이 지닌 저속한 모호함과 빈약함이 아니라 세련되고 완전한 인식이다. 또한 그 보편성은 천재의 나태함과 아집으로 인해 손상되는 이성의 소질이 내보이는 비범한 보편성이 아니라 그 고유한 형식을 향해 뻗어나간 진리 - 자기의식적 이성을 지닌 만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진리이다.(『정신현상학 1』)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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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21

가라타니 고진 / 윤인로, 조영일 / 비 / 238쪽

(2018.10.9.)

일본에서 연소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항상 등장하는 담론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책임'이라는 담론입니다. 예를 들어 그 소년의 부모는 매스미디어의 공격을 받으며 계속해서 사죄하기를 요구당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죄를 합니다. 그런 추궁을 특히나 가혹하게 행하는 저널리즘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태도를 냉소할 뿐만 아니라 사죄에 적극적인 정치가들을 규탄합니다.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도대체 왜 자신이 입은 피해도 아닌데 그토록 열심히 부모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일까요 애당초 그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책임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P.20)

자식이 행한 일에 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경우 누구에 대한 책임일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죄를 범한 아이는 나름대로 처벌을 받으며 부모도 그 일로 인해 충분히 괴로워하며 벌을 받습니다. 피해자의 부모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세상'이 -현실에서는 저널리즘이-그 분노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 결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은 부모가 자살하면, '세상'은 그에 대해 책임을 질까요. '세상'이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분명 한 주체가 없지요. 누군가가 부모를 추궁한다면, 그 사람은 여하튼 '세상이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요. 흔히 서구에는 기독교적인 도덕이 있는데, 그것이 개인주의의 기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유교권의 중국이나 한국에도 도덕적 기축(基軸)이 있어서 역설적으로 일종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일본에는 그러한 것이 없지요. 그 대신에 '세상'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도덕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옛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또 있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지적은 옳습니다. 일본인은 도덕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거북스러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후 아메리카화 과정에서 도덕관이 붕괴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도덕적 규범이 없다는 말이 완전히 자유롭고 공동체의 규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것을 통해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상'의 규제는 매우 강하게 존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27)

병의 원인이란 실제 증세가 나타났을 때만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지 일정한 원인이 있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이을 알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인식을 언제나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찾으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사회와 같은 것으로 소급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런 행동을 한 이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인이 어떻든 간에 그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요. 그 결과 여러 원인에 대한 해명은 잊히고 맙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인은 철저하게 추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문제와는 구별 되어야 합니다.

(P.43)​

아이들은 결코 백지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아무리 자유롭고 평화주의적으로 키워도 공격성은 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인식한다고 해서 사태가 바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대처나 환멸이나 좌절은 없어질 것입니다. 요컨대 책임이라는 것과 인식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P.54)

​ 스피노자의 사고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연필연적으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인과성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자유를 상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행위를 할 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것이 어디까지 인과성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원인에 의한 결정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예컨대 여기 범죄자 한 사림이 있다고 칩시다. 그의 범죄에는 다양한 원인들 - 사회적인 것을 포함하여 - 이 있습니다. 그 원인들을 열거하면 그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것이 되며, 따라서 책임이 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변호나 변명에 격분하고 그 범죄자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인에 의한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적당히 섞어서 생각하는 것입 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자연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가 있다는 것입 니다. 이를 부정한 이가 스피노자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전부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유란 실제로는 자기원인입니다. 그것은 원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자율성이기에 통상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우리들이 흔히 자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자살도 그렇습니다. 스피노자는 다만 원인이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자유라고 상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원인이라고 하면 의미가 협소해지는데, 좀 더 넓혀서 생각하면 그것은 사회적 • 역사적 원인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들의 행동에는 모두 원인이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자연(정념)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원인을 알려고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식만이 자유를 가져오고 그런 인식하려는 의지만이 자유라고 생각했습 니다. 말하자면 인식이야말로 '에티카'인 셈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식 없이는 윤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 계열의 인물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P.59)​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세상의 도덕입 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 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도덕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 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나마타병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이후부터 괴로워한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괴로움은 세상의 비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도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었다"리고 변호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공격한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후로도 같은 케이스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로 칸트적인 '의무'에 따를 때 많은 경우 불행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신이나 영혼, 저세상)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며 논박하였습니다. 또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를 미신이나 몽매로서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윤리적(실천적)으로 요청 되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였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전부여서 죽으면 그것으로 모두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윤리적이기보다는 현실의 행복을 지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생명이나 심판이 있다는 신앙은 윤리성을 강화시킵니다. 칸트는 종교를 윤리적일 때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면 저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로위지라”는 지상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러한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후에 자신이 어떻게 평가될 지에 신경을 쓴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후의 삶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P.102)​

헤겔은 '몰랐다'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헤겔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엉뚱하게 칸트를 공격합니다. 칸트는 행위자가 무지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덕법칙'을 알고 있어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할지 어떨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거기에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위지라"는 도덕법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정말 '몰랐는가'와는 무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원인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헤겔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P.118)

봉건제 국가나 절대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는 대폭 제한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낸 것이 부르주아 혁명입니다. 하지만 독일(프러시아)에서는 아직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 칸트의 종교론도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판의 자유'가 불가결하다고 썼습니다. 현재도 그와 같은 나라가 많이 존재하며, 그런 나라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유가 당연시되는 선진국에서는 어떨까요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곳에서 타율성-자율성은 분명하지만, 정치적 • 경제적 자유가 실현되면 자율성은 애매해집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율적(자유) 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칸트의 '자유'론이 중요한 것은 오히려 행복주의를 당연시하는 나라에서 입니다. 예를 들어 전전戰前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읽히면, 칸트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영미 계열 윤리학에서 자유란 타인에게 위해만 끼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그것에 반대한 것은 전통적 규범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별히 '자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이는 것도 실은 내외적 여러 원인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타율적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물건을 너무나 갖고 싶어하고 그것을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헤겔이 말했지만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입니다. 저의 욕망은- 단순한 욕구와는 달라서 -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 바꿔 말해 타자에게 승인받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욕망이 자발적(자유) 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일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율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통적

규범으로 억압하는 것도 타율적입니다.

(P.123)

프로이트는 인간이 유아적 신경증 단계로서의 종교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성이 충동생활에 비해 무력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고, 또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지성의 연약함이란 일종의 독특함이다. 과연 지성의 목소리는 연약하다. 그렇지만 이 지성의 목소리는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게다가 여러 번 묵살당한 후 결국은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이 될 수 있는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인데. 이것 자체도 적잖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삼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성의 우위는 멀고 먼 미래에 실현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위와 같은 사고는 분명 칸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자신은 항상 칸트를 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가 아무리 칸트를 조소한다고 해도 결국 그의 목소 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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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9PM 밤의 시간  
김이은 / 답 / 272쪽
(2018. 9.16.)
  “재는 누굴 닮아 저러는 거야? 말하는 게 어떻게 애 같지가 않고. 어떤 땐 섬뜩하다니까, 눈빛이."
  미주가 가리지도 않고 뇌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걸 또 문자가 거들었다.
  “지 에미 닮았지, 뭐. 계집에가 기가 세니까 진영이가 기를 못 펴고 제 누나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계집에처럼 놀잖아.”
​  문자가 대놓고 해선을 밟는데도 동식은 스테이크를 씹고 맥주를 마시면서 들은 척도 안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더 해선의 부아를 돋웠다.
  해선은 포크로 고기 조각을 푹 찍었다.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고기 조각에서 떨어진 핏국물이 해선의 옷자락. 정확히 심장이 있는 즈음에 물들어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번졌다. 미리 준비 시킨 생일 케이크를 직원이 들고 와 해선은 자신에게 새겨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
(P.27)
  교영은 어른들에게 화를 내거나 을지 않았다. 대신 낮게 내리 깐 눈으로 한 번 진영을 노려보았다. 그게 다였다. 교영은 여느 아이들처럼 미련하게 투정 부려서 이미 갖고 있는 것까지 빼앗길 위험을 피할 줄 아는 아이였다. 대신 교영은 시간을 들여 좀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을 연구할 줄 이는 인내와 영특함을 지녔다.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는 대신 교영은 어른스럽게 분노를 안으로 쌓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나중에, 며칠쯤 뒤 교영은 어른들을 혼내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을 해선에게 제안해 올 것이다. 해선은 그게 뭔지 벌써부터 궁금해 졌다.
  해선은 전혀 다른 성품을 타고난 두 아이가 자신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둘로 나눠가진 것 같다고 느꼈다. 두 아이는 평생 서로의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들을 적절하게 주고받으며 삶의 균형을 이뤄나갈 것이다.
  만약 진영이 혼자라면 멍청하게 남의 말이나 들으면서 끝없는 굴욕에도 분노할 줄 모르고 이십사 평 아파트 따위에나 감사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반대로 교영이 혼자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순간순간 교영의 삶이 어긋날 때, 그럴 때면 진영이 교영에게 올바른 도착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P.29)
  “저는 돼지 비계를 못 삼켜요."
​  뒤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해왔던 것처럼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동식이 빠른 젓가락질로 비계를 깔끔하게 떼어낸 돼지고기를 해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해선이 비계를 삼키지 못하는 건 비계 기름의 느물거리는 식감 때문인데 그래서 삼겹살도 먹지 않으며 마찬가지 이유로 곱이 들어 있는 곱창 따위도 먹지 못한다. 라는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던건 동식이 처음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부터 그랬느냐. 그러면 족발은 어떠나, 콜라겐이 피부에 얼마나 좋은데 그것도 못 먹느냐. 사람들하고 회식 같은 거 할 때 불편하겠다. 그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 부모님이 너무 떠받들어 키운 것은 아니냐, 등등을 캐묻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동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해선은 이상하게 그 점에 마음이 움직였다. 의식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타고난 성품인 듯 자연스러웠다는 점에서 더욱 감동을 느꼈다. 중요한게 적힌 건 아니지만 짧은 메모를 적어놓은 종이쪽지를 잃어버리고 나서 결국 못 찾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쪽지가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잃어버렸을 땐 몰랐는데 찾고 나니까 그 쪽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은. 쪽지에는 '이해하지 말라. 받아들여라.' 와 비슷한 경구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 어디까지 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선에게 믿음과 신뢰란 의심하지 않는 거였으니까. 살코기를 씹으면서 해선은 모처럼 식욕이 돋는다고 생각했 다.
(P.40)
  그 후로도 시간은 가고 봄은 또 왔다. 그런 게 아닌가. 슬픔이나 절망보다 삶이.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무겁고 엄중한 거 니까.
  술에 취해 기차 레일 조립이 맘처럼 되지 않자 동식은 냅다 베란다로 집어던졌다. 앙. 교영이 을-음을 터트렸다. 선 채 오줌을 쌌다.
  “너 나이가 몇 살인데 거기서 오줌을 싸는 거야? 그 더럽고 재수 없는 인형을 버리랬잖아. 너 아빠 말 안 들을 거야?” 
  해선은 교영이 뱃속에 있을 당시 혈서를 쓰듯 자신에게 했던 동식의 맹세를 잊지 않았다. 동식은 그들이 함께 보낸 모든 시간들의 근거였던 약속의 말을 저버린 것이다.
  동식이 작은 소리로 '씨발' 이라고 말함과 거의 동시에 해신이 동식의 빰을 쳤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어서 때려놓고 놀랐다. 놀란 눈으로 동식을 쳐다보았을 때, 동식은 수없이 돋아났던 칼날 들이 단번에 녹슬어 가루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고요한 표정으로 해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선아, 그런 게 아니라..."
  동식은 쉽 없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때 동식은 가련했고 순한 어린 영혼이었으며 시선의 마주침 같은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는 준비된 상처만 남아 있었다.
  해선은 자신의 폭력에 보인 동식의 반응에 주목했다. 몸으로 그 반응을 느꼈고 그러자 기이한 흥분 때문에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와 비슷한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얼마간 그 감정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의 뺨을 때린 것이 처음이며 그것이 죄책감보다 금지 된 일을 수행했을 때의 자랑스러음을 느끼게 했다는 점, 자신이 실제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며 경우에 따라 그것은 커다란 저항을 동반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냐면 지금 처럼 상대의 심신이 약해진 상태, 즉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력은 정당한 제어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51)
  해선은 또 한 번 죄송하다며 눈치 빠르게 튀김옷을 얇게 입힌 생닭을 한 마리 가마솥에 넣었다. 순간적으로 기름이 끓어올랐다. 보글보글 기름방울 터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가마솥 가득 들어찼다.
  목과 발이 잘리고 배가 열린 닭은 살과 뼈가 반질거리는 갈색으로 익어갔다. 사람들이 토막 낸 치킨 대신 통닭을 좋아하는 까닭은 스스로 닭의 몸을 찢어먹을 수 있어서일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사실 해선은 닭이나 오리처럼 날개 달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해선은 옆에 쌓인 생닭을 보았다. 아직 흰빛의 살결일 때, 비 린내 풍기는 닭은 혐오스러웠다. 매일같이 저런 것들을 수도 없이 만져야 한다는 건 징벌의 한 가지로 시켜도 될 종류의 일이라 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일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그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이 힘주어 길고 긴 설명을 덧붙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속으로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걸 아니까.
​​​(P.75)

  상현이 말하는 동안 해선은 상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맞닿는 끈 같은 게 있다면 이 남자와는 왠지 질감이 거칠고 순간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며 그 팽팽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끝내 툭, 끊어져 뒤로 나자빠지게 만드는 그런 끈을 나눠 쥐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120)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예외 없이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나중에 보니 어느 책에서인가 따 온 구절인 것 같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맞는 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단 며칠도 아무것도 없이는 살수 없으니까. 그러니 엄마의 이런 생각은 당연했다.
  “계속해서 원기를 채워 넣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습관 같은 거야. 하루하루 죽어가는게 사는 거고 보면, 산다는 건 실은 소비하는 것이고 얼마나 잘 사는가는 소비의 질로 따져볼 수 있는 문제야.” 먹고. 입고. 자는 것. 그것이 엄마가 그중 으뜸으로 치던 거였다.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디자인의 침구가 가득 들어있는 팸플릿을 받아보고는 매장으로 가서 신중하게 하나하나 품평한 다음. 그중 가장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가장 비싸지는 않으면서도 세련된 침구를 골라 집으로 배달시켰다. 엄마가 골라 준 침구는 언제나 깨끗한 새것이었고 그 안에서 해선은 밤마다꿈도 없이 깊이 잠들 수 있었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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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도시 
문지혁 / 은행나무 / 176쪽
(2018. 9.  13.)


  다시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졌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싶은 마음, 주체할 수 없는 살의가 온몸의 신경 세포를 장악했다. 그건 마치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미세하게 변화하고,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느낌. 
방금 지나친 어떤 문이 닫히고 잠겨 더 이상은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기분. 분명 익숙한 공간인데도 처음 이곳에 던져진 것 처럼 모든 게 낯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정보들을 처리하느라 괴부하가 걸려 멈춰버린 컴퓨터처럼, 나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끝내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P.16)
  언제부턴가 나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가하고 있었다. 골목 한 귀퉁이에 버려진 식물처럼 아무도 모르게 날마다 조금씩 시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투정도 부려보고 화도 내봤지만 기본적으로 오빠는 그런 걸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벽에 다 대고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벽은 벽일 뿐이다. 어쩌면 그건 벽의 잘못도 아니다. 아주 나중에서야, 그건 오빠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60)
  책을 덮는다.
  사무실 밖으로 거리가 내려다보인다. 도시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와 앉아 있는 이 시간은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밤이 아침이 되는 기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라는 고통을 빛이라는 신의 은총이 덮어주는 순간. 거대한 지구를 돌리는 신비한 힘이 지구상 의 모든 존재에게 하루라는 선물을 선사하려는 찰나.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을 유심히 바라본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똑같아 보이는 풍경에도 날마다의 결이 있고 달마다의 변화가 있다. 그 출령이는 매일의 물결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는 영혼이 필요하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책상 한쪽의 라디오를 켠다. 구식이지만 아직 쓸 만하다. 늘 맞취놓는 클래식 채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흘러 나온다. 혼자 아침을 맞는 순간에 썩 어울리는 음악이다. 창문 밖 저 멀리서 가느다랗게 빛이 들어온다. 신의 손길은 결코 전등 스위치처럼 한 번에 온 오프를 가르지 않는다. 대신 숙련된 첼리스트의 활처럼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다. 아둔한 자들의 감각으로는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만이 존재하던 거리에 서서히 희미한 윤곽들이 드러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리 끄트머리에서 불이 탁, 하고 켜진다. 
(P.140)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피, 목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고루한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을 줄이야. 저주란 그런 것이다. DNA에 새겨진 악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한평호는 자신의 운명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오지웅이든 강간범이든 이웃시촌이든 죽여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총을 달라는 그의 요구는 젖을 달리는 영아의 울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방식으로 한평화의 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에게 그가 원하는 저주를 전달해주는 일의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했고, 세상에 흩어진 고통과 고통을 연결해주는 일의 신성함을 연구했다. 결국 신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고통이다. 삶이란 인간이 고통을 뭉뚱그려 부르는 방식에 다름 아니니까.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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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2019년

뉴베리상 수상 작가들의 국내 번역본들을

아이들에게 추천해주기 위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2019)​

ㅇ Meg Medina : 번역본 없음

ㅇ Veera Hiranandani : 번역본 없음

​ㅇ Catherine Gilbert Murdock (캐서린 머독)

- 데어리 퀸(Dairy Queen)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018)

ㅇ Erin Entrada Kelly (에린 엔트라다 켈리)

- 안녕, 우주 (밝은미래)

​ㅇDerrick Barnes : 번역본 없음

ㅇJason Reynolds (제이슨 레이놀즈)

- 나의 사랑스런 장례식 (The Boy in the Black Suit) (뜨인돌 / 2015년)

ㅇ Renée Watson (르네 왓슨)

- 내 조각 이어 붙이기 (Piecing Me Together) (씨드북 / 2019년)

(2017)

ㅇ Kelly Barnhill (켈리 반힐)

- 달빛 마신 소녀 (양철북 / 2017)

ㅇ Ashley Bryan (에슐리 브라이언)

- 자유 자유 자유 (보물창고)(사회탐구 그림책)

​ㅇAdam Gidwitz (애덤 기드비치)

- 이야기 수집가와 비밀의 아이들 1,2 (아이세움)

* 애덤 기드비츠의 잔혹 판타지 동화

- 사라진 헨젤과 그레텔 (아이세움 / 2012년)

- 위험한 잭과 콩나무 (아이세움 / 2014년)

- 잔혹한 그림 왕국 (아이세움 / 2016년)

​ㅇLauren Wolk : 번역본 없음

(2016)

ㅇ Matt de la Peña (맷 데 라 페냐)

- 행복을 나르는 버스 (비룡소 / 2016)

- 너는 사랑이야! (다신기획 / 2018)

- 코코 : 미겔의 웅장한 화음 (대원키즈 / 2018)

ㅇKimberly Brubaker Bradley (킴벌리 브루베이커 브래들리)

- 맨발의 소녀 (라임 / 2015)

​ㅇVictoria Jamieson (빅토리아 제이미슨)

- 롤러 걸 (비룡소 / 2016)

​ㅇPam Muñoz Ryan (팜 무뇨스 라이언)

- 별이 된 소년 (비룡소 / 2012)

- 에스페란사의 골짜기 (아침이슬 / 2006)

- 나는 자유다 (보물창고 / 2012)

- 바람의 아르테미시아 (실천문학사/ 2012)(절판)

​(2015)

ㅇKwame Alexander : 번역본 없음

ㅇCece Bell (시시 벨)

- 엘 데포 (시시 벨 / 밝은미래 / 2016)

ㅇJacqueline Woodson (재클린 우드슨)

- 희망은 깃털처럼 (서울교육 / 2008) (절판)

- 지붕 위의 시인 로니 (다른 / 2005) (절판)

- 엄마의 약속 (아이세움 / 2007) (절판)

- 친절한 행동 (나무상자 / 2016) (절판)

- 엄마가 수놓은 길 (웅진주니어 / 2007)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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