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나오키 2

아케이도 준 / 이선희 / 인풀루엔셜

카멜 다우드 / 문예출판사 / 416쪽

(2019. 8. 16.)​​

자기 손을 떠나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더구나 처지가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는 법이다. 도키에디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은행은 원래 그런 곳이다.

한자와의 귀에 조만간 금융청 감사가 있을 예정이라는 정보가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P.23)

지금 가장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한자와 본인이다. 동네 주부들과 테니스도 치고 점심도 먹으러 다니는 하나가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하나는 “당신은 자기가 좋아서 일하는 거잖아!”라고 되받아친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자와 책임이고, 그로 인해 기수을 내팽개치는 일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P.49)

평생 편하게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은행 건물을 나와 교바시의 주상복합 건물 3층에 있는 회사로 들어가면서 곤도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먹고살 걱정이 없다는 뜻일까? 그런 뜻이라면 물론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병에 걸려도 은행에서는 이렇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먹고시는 것의 대가로 입행 당시에 가졌던 꿈과 희망 그리고 자존심은 어딘기에 던져버려야 했다.

인생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먹고살 걱정은 없다'는 보증도 바야흐로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곤도는 은행에 소속된 채 '조건부'로 다미야전기에 파견 나은 신세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도 앞으로 2년이 있으면 끊어진다. 그 시점에는 은행을 그만두고 다미야전기에 정식으로 전직해야 한다.

다미야전기라는 작은 회사의 일원이 되어서 병이 재발해도 잘리지 않고 다닐 수 있을까? 다미야가 그것을 허락한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다미야는 은행에서 파견 나온 곤도의 말과 행동을 항상 냉소적으로 쳐다보았다.

곤도에게는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곤도의 아버지와 장인은 모두 월급쟁이 출신으로, 그들에게는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노후를 지낼 만큼의 여유밖에 없다. 곤도는 자기 부부가 멀리 떨어진 외로운 바다에서 어린 아이들을 껴안은 채 고무보트를 타고 표류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 고무보트에는 구멍이 나 있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른다

(P.57)

은행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일 위를 달리는 롤러코스터의 승객이다. 처음에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지만 점점 길이 험해지면서 이윽고 급류 위를 건너거나 깎아지른 절벽을 질주한다. 말 그대로 높은 산과 험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긴 여행인 것이다.

입행 4년치쯤에 나타나는 최초의 커브 길에서 탈락한 자들은 이듬해에 동기들보다 기본급을 적게 받고, 과장대리로 승진하는 레이스에서도 뒤처지게 된다.

출세하는 사람과 출세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미 20대에 정해지고, 마흔이 넘으면 롤러코스터의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대량 채용 시대였던 거품 경제 시대에 입행한 행원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량 채용인데다 은행의 합병으로 인해 윗자리는 더욱 줄어들어서, 아직 를러코스터의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롤러코스터의 탑승팀과 탈락팀 사이에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메우기 힘든 틈이 벌어진다.

(P.112)

“나도 사장에게 몇 번이나 말했어. 그때마다 사장이 뭐랬는지 알아?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더군. 나는 이 회시에서 20년이나 있었어. 20년째 계속 과장으로 말이야. 한마디로 말해 나는 기둥에 박한 못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 못에 걸리는 달력이 매년 바뀌어도 나는 바뀌지 않아. 녹이 슬어 서 뽑힐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그런 인생을 상상이나 할수 있어?”

“인생은 바꿀 수 있습니다!”

노다의 힘없는 눈동자 속에서 작은 놀라움이 퍼져나갔다. 곤도는 그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지요. 지금 당신은 위축된 월급쟁이 근성을 그대로 드러낸, 한심한 아저씨에 불과합니다. '노'에 비해 '예스'란 말은 몇 배나 간단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월급쟁이가 '예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은 무미건조해 지는 겁니다!”

곤도는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른 뜨거운 덩어리를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옛날, 그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희몸에 받고 신설 지점의 설립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아키하바라 동부 지점에 발령을 받았을 때, 온몸을 휘감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에 경험한 지옥 같은 날들과 너무나 대조적인-어느 의미에서 는 순수했던 -감정으로써 .

아무리 기를 써도, 아무리 이를 악물고 발버등쳐도 실적이 오 르지 않았다. 자신이 담당한 구역을 하루도 빠짐없이, 말 그대로 신발 바닥이 닳을 만큼 돌아다니는 사이에 미음의 소중한 부분 까지 닳아 없어진 나날들. 매일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열리는 실적 회의에서, 두 눈에 부을 켜고 실적을 올리려는 지점장에 게 욕설을 들으면서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때, 자신은 무슨 말홀 들어도 “네”라고빆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좋아했던 일, 잘할 수 있었던 일은 잿빛 모래 산으로 변하고, 어느새 위에서 시 키는 대로 삽으로 모래를 퍼서 다시 메우는• • •••• 그런 허무한 들이 반복되었다.

'일은 대충하고 여가를 즐기며 편안하게 살자.'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하 루의 절반이 넘는다. 따라서 일을 포기한디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을 포기한디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소중한 일을 어떻게 포기言는가! 아무 생각 없이 적당히 하는 일만큼 시시한 것은 없

다. 그렇게 시시한 것에 소중한 인생을 바쳐야 하는가.

어쨌든 이 건은•••••• 곤도는 현실로 돌아와서 펼쳐진 원장의 페이지를 볼펜으로 톡 톡 두들겼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조사할 생각입니다. 사장님께 서 뭐라고 하든 말이죠. 만약 돌려받을 예정이 없다면 라파예트 라는 회시에 빌려준 3천만 엔을 특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특손은 특별 손실을 말한다. “세무상으론 손실로 처리할 수 없어 . " 곤도가 노다의 반론-을 일축했다.

'그건 세법상의 얘기지요. 나는 우리 회사의 회계 얘기를 하는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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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아케이도 준 / 이선희 / 인풀루엔셜

카멜 다우드 / 문예출판사 / 416쪽

(2019. 8. 13.)​

이른바 메가뱅크의 하나다. 도로에 본점이 있는 도고중양은행 간사이 본부의 점포는 약 50여 곳. 그중에서 오사카서부 지점은 오사카 본점과 우메다, 센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4대 지점의 하나로, 이른바 중핵 점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사노는 오랫동안 인사 분야에서 일해온 엘리트 은행원으로, 지점으로 나온 것은 18년 만이다. 지점장 경험을 잘 살리면 임원 자리가 코앞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실적을 올리려고 필사적이다. 대부분의 은행이 그렇듯이 도코중양은행도 합병으로 탄생한 은행으로, 자리에 비해 갑자기 행원 수가 많아졌다. 젊은 은행원 쪽에서 보면 예전에는 일류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보장되었던 과장 자리가 멀어지고, 순조롭게 은행원 길을 걸어온 아사노만 해도 부장 승진이 좁은 문이 되었다.

기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 기회를 놓치면 잘해야 다른 지점의 지점장으로 수평 이동이고, 운이 나쁘면 관계사로 파견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아사노처럼 동기 중에서 선두로 달려온 자존심 높은 엘리트에게 출세의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임이 들림없다.

(P.35)

접수처에 은행 명함을 내밀자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라는 말도 없이 재빨리 접견실을 가리켰다. 은행 간판을 믿고 거드름을 피울 생각은 없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빈말이라도 친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사내에 활기가 없고 긴장감이 부족하며 해이해진 느낌이 들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시시덕거리는 사람은 있어도 전회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전화벨이 귀에 거슬릴 만큼 계속 울려 퍼졌다. 손님인 한자와 일행이 근처를 지나가도 인사를 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한자와는 접견실로 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는 결국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에, 사원의 모습을 보면 회사 분위기가 어떤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P.38)

부도란 당좌예금의 잔고 부족으로 기업이 할 수 없는상횡을 가리킨다.

참고로 당좌예금이란 기업이 주로 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개설 하는 계좌로, 발행한수표나 어음은 이 계좌의 잔고에서 빠져나 간다. 편리하긴 하지만 이자는 한 푼도 붙지 않는 게 특징이다.

부도어음이란 서비스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상대 은행에게 내밀고 지급을 의했는데 “당좌예금의 결제 지금 부족으로 지급할 수 없다"라고 돌아온 어음을 말한다. '결제'라는 단어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쉽게 말하면 '지급'이란 말과 똑같다.​

경기가 나빠지면 어음을 결제할 수 없어서 어음 결제 기일을 연기해달라는 요청이 늘어난다. 연기에 이은 연기로 좀처럼 결제가 되지 않는 어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열 달 열흘짜리 어음은 임신이음, 210일짜리 어음은 태풍어음이라고 하고, 비행기 어음은 좀처럼 결제가 되지 않지만 가끔 결제되는 어음을 가리킨다.

다시 옆길로 새지만 일부러 '1차' 부도라고 횟수를 표기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어음 부도는2차까지 있기 때문이다. 1차부도에서는 제도상의 벌칙은 받지 않지만 두 번째 부도를 내면 자동적으로 어음교환소에서 거래정지처분을 받음과 동시에 "너는 믿을 수 없으니까 어음이나 수표를 몰수하겠다"라는 통지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난 또. 뭐라고. 부도라고 해도 어음과 수표를 발행할 수 없는 것뿐이짆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태는 기업 신뢰도에 치명타가 되고 “어음을 몰수당하는 녀석과는 절대로 거래한 수 없다!"는 반응으로 이어져서, 대부분 거래처에게 외면당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너에게 판 물건의 대금을 당장 현금으로 지급해!"라고 요구하면서 이른바 채권자라는 이름의 단체가 회사에 몰려오고, 현금으로 지급하지 못하면 상대가 아무리 사정해도 빨간 딱지를 덕지덕지 붙여서 압류한다. 험상궂게 생긴 형씨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그렇게 되면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상에서 말하는 '도산'이 되는 것이다.

(P.75)

“그 말은 곧 은행의 상식이 세상의 비상식이라는 거잖아!”

(P.134)

“과장님,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위쪽에 보고하실 건가요?"

가키우치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아직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아사노에게 보고하면 괜히 귀찮아질 수도 있다. 모든 책임을 한자와에게 떠넘기는 아사노의 행동도 미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회수할 전망이 있다면 이번에는 자기 공으로 돌릴 것임이 를림없다. 그런 녀석에게 섣불리 정보를 말해줄수는 없다.

“당분간 위쪽에는 비밀로 하고 우리끼리 상황을 살펴보는 게 좋겠어. 위쪽에 말하면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가키우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동감입니다. 진정한 적은 항상 등 뒤에 있으니까요."

(P.151)

은행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오지만 태도가 나쁘다는 면에서 국세국 직원은 폭력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폭력배는 카운터 앞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는 게 고작이지만, 이 녀석들은 은행 안에까지 우르르 밀고 들어와 국가 권력을 등에 지고 거들먹거린 끝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셔터 내리게 해줄까?” 라는 말로 협박한다. 잘못된 엘리트 의식과 일그러진 선민사상의 산물로, 한심한 자들이 권력을 가지면 이렇게 된다는 패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인기 TV 드라마에 나왔던 인정 많고 너그러운 조사관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P.154)

대출의 핵심은 회수에 있다-이것도 역시 은행의 본모습이다. 돈은 부유한 자에게 빌려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빌려주지 않는게 철칙이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이것이 은행 대출의 근간이자 은행의 사고방식이다.

거품 경제가 붕괴되기 이전의 주거래은행은 기업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은행은 어디에도 없다.

호송선단 방식이란 이름하에 보호를 받았던 과거에는 은행이 어려움에 처하면 정부에서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래서 은행도 의리와 인정을 우선시해서 영세 중소기업에게도 돈을 빌려주었고, 산더미 같은 대손을 만들어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은행이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는 과거의 산물이 되고, 적자가 나면 은행도 도태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하여 은행은 이제 중소기업을 도외줄 수 없게 되었다. 거래 기업을 지켜온 일본적 금융 관행인 주거래은행제도가 붕괴한 이는, 똑같은 금융 관행이었던 호송선단 방식이 붕괴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수 있지 않을까?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은행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거래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은행은 이제 특별한 조직이 아니라 돈을 벌지 못하면 망하는 평범한 회사가 되어버렸다. 은행을 믿고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거품 경제 시대까지였다. 어려울 때 도의주지 않는 은행은 실질적인 지위가 추락해서, 기업에게는 수많은 주변 기업의 하나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다.

(P.218)

“결국 문제가 생기면 승부는 정치력에서 갈리니까. 가네시로 녀석이 정치력이 조금 더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가지모토 선배도 착각을 했어. 불상사로 이어지긴 했지만 애초에 관리책임이 라기보다 부하직원의 악의였거든. 그걸 잘 아는 가네시로 지점장이 지켜줄 거라고 기대한 모양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든 책임은 부지점장에게 있다는 걸로 결론이 나왔지.”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 정말 어리석었군."

(P.248)

은행이라는 조직은 어디나 벌점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번 실적의 공은 다음 전근으로 사라지지만 벌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특별한 회로가 작동하는 조직이 바로 은행이다. 그 곳에 패자 부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가라앉은 것을 두번 다시 떠오르지 않는 토너먼트 방식이다. 그래서 한 번 가라앉 은 것은사라지는수빆에 없다. 그것이 은행 회로다.

(P.332)

은행이라는 곳은 인사가 전부다.

어느 곳에서 어떤 평가를 받든, 그 평가를 측정하는 잣대는 인사다.

하지만 인사가 항상 공정하니곤 할 수 없다. 출세하는 자가 반드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어디나 마찬가지고, 그것은 도쿄중앙은행도 예외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자와는 은행이라는 조직에 정나미가 떨어진 상태였다. 고색창연연한 관료체질.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위장할 뿐, 근본적인 개혁은 전혀 없을 만큼 팽배한 무사안일주의. 만연 히는 보수적인 체질 탓에 젓가락 드는 자세까지 집착하는 유치 원 같은 관리체제. 특색 있는 경영방침을 낼 수 없는 무능한 임원 들. 대출에 소극적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세상 사람이 수긍할 수 있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오만한 체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한심한 조직이다.

그래서 내가 바뀌주겠다 - 한자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업 2부 차장직은 그러기 위한 발사대로써 더할 나위가 없는 자리다. 수단이 어떻든 간에 출세하지 않으면 이보다 시시한 조직은 없다. 그것이 은행이다.

예전에 산업중앙은행의 입사시험을 봤을 때, 그는 멋진 꿈을 꾸었다. 이 굉장한 조직을 자기 손으로 움직여보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거품 경제의 광기가 사라지면서 은행을 아름답게 치장했던 수많은 도금이 하나, 또 하나 벗겨졌다. 그리고 지금 은행은 처참하리만큼 볼품없는 납덩이 성(城)으로 변했다.

은행이 특별한 존재였던 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은행은 세상에 존재히는 수많은 업종 중 하니에 불과하다. 볼품 없이 추락한 은행이라는 조직에서 예전의 영광을 떠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반대로 이 조직을 자신의 손으로 바뀌보고 싶다는 한자와의 생각은 오히려 강해졌다.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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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카멜 다우드 / 조현실 / 문예춮판사 / 208쪽

(2019. 8. 3.)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지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걸세. 반대로 난 같은 얘기를 너무 많이 곱씹은 탓인지 이젠 기억나는 것도 별로 없군.

그 일이 있은 지 반세기도 더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 사건은 분명히 일어났었고 그에 관한 얘기도 많았어. 아직까 지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하고 있지만, 단 한 명의 망자(亡者) 만을 떠올린다네. 뻔뻔하지 않나. 죽은 사람은 엄연히 둘이었 는데 말이야. 그래, 둘이라니까. 한 명을 빼먹은 이유가 뭐냐 고? 그야, 첫 번째 사람은 얘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 그 것도 얼마나 잘했던지, 자기의 죄를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네. 반대로 두 번째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지. 신이 그를 만든 것되 단지 총알받이가 되어 한낱 먼지로 되돌아가게 하 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니까.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였던 거야.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째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 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 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내가 이 언어를 배워 서 말하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하려는 거야. 형이 하려던 얘기 를 어느 정도라도 계속해보려는 거지. 살인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얘기는 너무 잘 써져서 나로선 감히 흉내 낼 엄 두도 못 내겠더군. 그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언어였 던 거야.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 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 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P.7)

자네를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의 책을 읽은 것처럼, 나도 그가 그 사건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보고 싶어 읽어 봤네. 앞부분만 읽고도 금방 알겠더군. 그는 남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내 형은사건의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었어. 어 떤 이가 자기가 부리는 흑인을 '금요일 '이라고 부른 것처럼 (영 국 작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혹인 '프라이데 이(Friday)'* 일컬음) 그도 형을 '오후 2시'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거야. 한 주의 요일 대신 하루 중의 한순간을 선택言는 거지. 오후 2시, 좋지. 아랍어로는주드. 들, 쌍, 형과 나, 쌍둥이.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볼 땐 형과 나는 어떤 면에 서 의심할 바 없는 쌍등이라고도 할수 있다네. 내 형 '아랍인' 은 두 시간밖에 못 살고 스러져버린 덧없는 존재였지만, 장례 를 치르고 나서도 70년 동안 계속해서 죽어야 했지. 내 형 주 드는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셈이야. 살해당하고 난 뒤에도 사 람들은 줄곧 형에게 바람과 시곗바늘 두 개로 이름을 붙여췄 고, 형은 자신의 죽음을 끊임없이 재연해야 했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던 한 프랑스 남자, 자기 등에 짊어진 나머지 세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던 그 작자가 쏜 총 알을 맞고 죽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줘야만 했어.

(P.11)

예전에 나는, 자네나 자네 나라 사람들은 절대로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네. 그거야말로 수수께끼를 푸는 첫 번째 열쇠인 건 사실이니까. 그건 바로 뫼르소의 어머니가 묻힌 무덤은 어디 있을까, 하는 거지. 그래, 하주트의 어던가에 있겠지, 그가 말한 것처럼. 그런데 정확히 어디냐고. 거기 가본 사람이 있긴 한 건가? 책에 나오는 양로원에 가본 사람이 있을까?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집게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본 사람이 있을 까? 내가 볼 땐 아무도 없어. 나도 그 무덤을 찾아봤지만 끝내 발견할 수가 없었다네. 마을에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무덤이 상당히 많았는데도, 살인자 어머니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래, 물론 설명이 가능하긴 해. 해방이 되면서 우리는 프랑스인의 묘지들을 노렸고, 아이들이 땅에서 파낸 해골을 공처럼 갖고 노는 것도 자주 봤었지. 우리에게는 마치 전통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프랑스인 들은 도망칠 때 우리에게 세 가지를 남겨놓는다는 거였어. 뼈, 도로, 그리고 단어들-또는 죽은 자들〔'단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mot(모)와 '죽은 자'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mort(모르)는 철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무덤은 찾지 못했어. 뫼르소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렇게 본다면 그의 전설적인 무관심과 냉혹함도 이해가 되지. 그건 태양과 무화과나무로 덮인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믿는 그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지껄이느냐고 하겠지만, 내 의심엔 근거가 있다네.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을 그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걸 보면, 단순히 기록하는 게 아니라 우화를 지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 않나? 고백이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이뤼낸 재구성이라고나 할까. 기억이 아니라 너무도 완벽한 알리바이야. 내가 지금 얘기 하는 건 중명해낸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 뫼르소가 자기 어머 니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네도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한 텐데. 몇 년 지난 후에 하주트의 토박이들에게 불어보고 나서 짐작하게 된 건데, 그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없거니와 양로원에서 세상을 뜬 노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땡볕 아래에서 기독교도들의 장례 행렬이 지나기는 걸 본 사람도 없더라고. 이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유일한 어머니는 바로 내 엄 마야. 지금도 엄마는 우리 집의 레몬나무 주변을 비로 쓸고 있는중이지.

(P.50)

한 프랑스 남자가 황당한 바닷가에 누워 있던 아랍 남자 한 명을 죽여. 1942년 여름, 오후 2시의 일이야. 총알 이 다섯 발 발사되지. 연이어 재판이 열리고 살인자는 자기 어머니 장례를 제대로 제대로 기르지도 않고 어머니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게 얘기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져. 단순히 보자면 살인이 일어난 건 태양 때문이거나 아니면 순전한 한가함 때문이지. 뫼르소는 어떤 창녀에게 양심을 품은 레몽이라는 포주의 부탁으로 협박 편지를 한 통 써주게 되는데, 그 일이 점차 꼬이면서 결국 살인으로 끝난 거야. 아랍인이 창녀를 위해 복수하려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름 죽인 거지, 아니 어쩌면 그가 감히 건방지게 낮잠을 자려 했다는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자네 책을 이렇게 요약하는 게 거슬리지는 않나? 하지만 이게 바로 진실인 결 어쩌겠나, 나머지는 다 작가의 재주로 덧붙인 장식인 뿐인걸, 그 사건이 난 이래로, 죽은 아랍인을, 그의 가족을, 그의 동포들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인자는 출감하면서 책을 한 권 쓰는데 그게 아주 유명해 지지. 그는 책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제에 대해, 그리고 부조리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얘기했어, 그 책 내용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 해봐도 말이 안 돼, 그건 법죄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작 아랍인은 살해되있다고도 불 수가 없는 게 손가락 끝으로 하루살이 죽이듯 그렇게 하찮게 죽여버렸거든. 아랍인이야말로 두 번째로 중요한 등장인물인데도 이름도, 얼굴도, 말도 없어. 이쯤 되면 대학생 양반, 자네도 감이 오지? 이 이야기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말일세! 이건 새빨간 거짓이야. 한 잔 더 들게. 내가 사지. 이 책에서 뫼르소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그리고 있다네. 소유라는 것도 부질없고, 결혼도 사실상 필요 없고, 결혼식도 건성으로 치르고, 취향이랄 것도 별 거 없는 그런 세상이지. 사람들은 껍데기만 남은 채 텅 빈 가방 위에 앉아 병들어 썩어가는 개들에게나 집착하고, 두 문장 이상을 말할 능력도 없고, 네 단어 이상을 동시에 발음하지도 못하지. 자동인형들! 그래, 그거야. 이제야 그 단어가 생각나는군. 작은 프랑스 여인도 생각나네. 살인자 작가가 어느 날 레스토랑 홀에서 관찰하며 아주 잘 묘사해놓은 여자 말일세. 기계적인 동작, 빛나는 눈, 강박적인 행동, 덧셈의 고역, 지동인형 같은 몸짓. 하주트 번화가에 있는 시계도 또 생 각나는군. 추시계와 프랑스 여인은 꼭 쌍등이 같아. 시계의 기계장치도 독립하기 몇 년 전부터 이미 고장이 나 있었던 것 같던데.

(P.79)

당연히 그날 저녁 당장, 나는 그 망할 놈의 책을 펴 들었네. 천천히 읽어갔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달려 들어가 게 되더군. 모욕당하는 느낌과 동시에 그 안에 내 모습이 드러나 있다는 느낌도 받았지. 난 신의 책을 읽듯 밤을 꼬박 새서 읽었네. 가슴이 뛰면서 숨이 막힐 듯했어. 그건 진정한 충격 이었어. 거기엔 모든 게 다 있더라고, 핵심적인 것만 빼고. 무 싸의 이름! 그건 어디에도 없었어. 나는 '아랍인'이라는 단어 를 세고 또 세어봤어. 그 말은 스물다섯 번이나 나왔지만 이름 은 찾아볼 수 없었어. 전혀 없었어. 소금, 눈부심, 거룩한 사명 을 짊어진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만이 있었을 뿐이야. 뫼르 소의 책은 무싸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겐 이름이 없 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게 없었어. 반대로 살인 자의 영혼에 대해선, 마치 내가 그의 천사이기라도 한 듯 상세 하게 보여주더라고. 그 책에선 기억들이 괴상하게 왜곡돼 있 있어. 해변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살인이 일어난 순간에 예사 롭지 않게 밝았던 햇빛,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낡은 방갈로, 재 판 날들과 감방에서 지낸 날들 따위까지도. 엄마와 내가 무싸의 시체를 찾아 알제의 길거리를 해매고 다니는 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니. 그 작자, 자네가 우러르는 그 작가는 내게서 내 쌍둥이 주드, 내 초상, 그리고 내 삶의 세세한 단편들뿐 아 니라 내가 받은 심문의 기억까지도 훔쳐간 것 같더군. 나는 밤 을 거의 꼬박 새며 한 낱말, 한 낱말, 꼼꼼하게 읽어나갔지. 그 건 완벽한 헛소리였어.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건 형의 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중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리는 일만 남았다.” 맙소사, 이거 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분명히 구경꾼은 많았었지만 그건 그의 죄 때문이었지 재판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어. 게다가 구경꾼들이란 게 어떤 자들이었나! 열성 팬들, 우상숭배자들! 그 숭배지들의 무리 속에선 중오의 함성 따위는 전혀 없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나를 뒤흔들어놓았어. 걸작은 걸작이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와 권태 사이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거울을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

​(P.179)

나보고 신을 믿느냐고 묻는 건가? 나 참, 기가 막히는군!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사람들은 왜 신의 존재에 관해 의문이 들 때마다 인간을 향해 돌아서서 대답을 기다리는지 모르겠어. 신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직접! 종종 나는 내가 정말로 그 미나레트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네. 사람들은 꼭꼭 잠가놓은 문을 부술 듯 두들기며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쳐대지. 그들은 문 바로 뒤에서 분노에 떨고 있어. 그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말해봐, 들리느냐고, 난 들리는데, 곧 문이 열린 거야, 그럼 나는? 그럼 난 뭐라 고 부르짖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 한마디만 하겠지. "여기엔 아무도 없어!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어! 모스크는 비어 있어. 미나레트도 비어 있어. 여긴 빈 곳이야!” 분명해. 내가 처형당하는 날엔 구경꾼들이 많을 테고, 그들은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 거야. 뫼르소.는 처음부터 옳았던 건지도 몰 라. 정말로 이 에기에는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거든. 모두가 단번에, 한 방에, 죽어버린 거지.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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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읽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수잔네 뫼부스 / 공병혜 / 이학사 / 286쪽

(2019. 8. 3.)

여러 이유에서 철학을 하게 된다. 계속 이어나갈 만큼 매력적인 사고, 해겨되어야 하는 문제, 다양한 이론 사이에 드러나서 해결되어야 필요에 의해서 철학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선구자들이 지닌 사유의 체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체계를 강렬히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과의 논쟁에 그의 철학적 창의성의 고유한 모티브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유와 저술은 그 자신의 고유한 감수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종의 강제력과 같은 피할 수 없는 내적 필연성으로 작용한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이 철학자를 만드는가? 바로 가슴속에 어떠한 질문도 품고 있지 않는 용기이다.”

(P.14)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1판 서문에서 “이 책의 이해를 위한 독해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아주 난해한 저술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발견할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 앞서 이 책의 서문을 읽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5년 전에 출판된『충족근거율의 4가지 뿌리에 대해서』라는 표제의 철학적인 저술이다.(p. 9)

실제로 모든 사유의 전개를『충족근거을의 4가지 뿌리에 대해서』라는 비교적 짧은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 없이 그의 “사유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몇 가 지 고유한 사유가 자기 저작의 모든 장에서 근본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다양하게 형태화되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일 종의 “건축술적인 연관성”으로 되풀이하지 않고도 자신의 근본 사유들 로부터 모든 결론들이 추론되어 나오는 방식으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는 독자들이 이러한 근본적 사유에 익숙하다고 전제하고 자신의 작품을 기술하였다.

(P.52)

​ 쇼펜하우어가 근거율에 대한 저술에서 발전시킨 근본적 사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어쩌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객체는 주체 없이 절대로 표상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전체적인 체계는 이 주장에 근거한다. 객체는 항상 인식되거나 사고될 수 있다. 반면 주체는 인식하고 사유하는 인간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자신의 객체로서의 세계의 주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계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이 “충족근거을”에 감춰져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근거율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논문을통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면 (......) 주체가 인식하는 개별자인 한, 주체에 의해 규정 된 객체가 어떤 성격을 지니든 항상 어디서든지 이해되는 형식이 바로 근거율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철학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방법에 의해서 추구될 때 기능하다.(p. 10)

​(P.52)

​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저술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딛었으며, 그 내용뿐만 아니라 서술하는 방식에서도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그의 새로운 표상 방식은 바로 근거 관계, 즉 만약 객체가 있다면, 주체도 있다(또한 그 역으로도 성립이 가능함)라는 것이 그의 전체 논증의 기반이며,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타당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관계를 “근거율"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근거로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P.53)

우리의 사고는 어떤 특정한 것의 생성을 위해 항상 근거 있는 관찰들을 일반화시키고, 이러한 관찰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예들에 적용시켜 가능한 법칙으로 표현한다. 어떤 것은 그 이전에 어떤 다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것은 주어진 것의 현존으로부터 그 이전의 것이 추론되며 그 이후의 것이 형성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러한 연쇄적인 과정에 따른다-존재하는 것들과 이들 각각의 특성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쇼편하우어는 확신한다.

(P.56)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유일한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이념을 향해 있음을 강조한다, 개별적인 현상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비교해서 이념은 당연히 일종의 통일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분리될 수 없는 의지 물자체의 통일성과 비교하여 이념은 이미 의지의 객관화의 한 단계로서의 다양성을 현시한다-그래서 개별적인 것과 다 양한 것은 같은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이념을 정관하면서 개별적안표상의 그림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뭍에, 예술에 있어서 개별적안 것 은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은 자신의 현상들의 변화로부터 고립되어 나와서 결방해받지 않는 고찰을 위해서 보존되어야 한다. 학문들은 표상 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그 표상들이 근거하고 있는 이념에 대한 인식 을 향하여 상승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학문이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조건하에 있는 인식에 기여하는 학문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예 술은 이러한 학문의 단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관조적인 인식을 시작한 다 따라서 예술의 목적은 항상 이미 현전하는 것이다.

(P.147)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의 인식론, 의지의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을 포괄하는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친 것만큼 쉽게 다가서서 그의 사고와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말했듯이 이 책을 두 번 이상 끝까지 읽는 엄청난 인내력과 지적 정열을 지닐 때, 그리고 그의 문학적인 문체에 익숙해져 그의 언어가 지닌 내적 감수성의 깊이에 도달했을 때, 이 책에 대한 이해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이 책은 서구의 전통적인 이성 형이상학과의 투쟁 과정과 비판, 그리고 플라톤, 칸트, 인도 철학, 다원의 생물학적 인간 이해라는 다양한 사상적 전통에 대한 수용을 통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떠한 철학적 사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와 사상, 문학적인 문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오로지 하나, 궁극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본질인 고통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그의 궁극적 목적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에 대한 자기 통찰을 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육체성에 얽매인 이기적 성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연민에 의한 타자와의 연대적 감정을 통해 도덕적 삶에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P.282)

이 책의 저자는 먼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제1권인 표상으 로서의 세계에 대한 인식론, 즉 학문 이론을 소개한다. 저자는 텍스트 의 주요 구절들을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 조건, 인식하는 오성의 역할, 지식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제2권에서는 그의 저서의 가장 핵심적 부분인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 거기서 저자는 표상의 세계의 근거를 이루고 있 는 삶의 맹목적 충동으로서의 무의식적인 의지와 의지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인 신체에 대한 이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른 의지의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 체계를 기본 텍스트에 근거하여 면밀히 파고들고 있다. 저자는 특히 자연에서 의지가 표현되는 최고의 단계에서 출현하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본질이 왜 고통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사색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3권에서는 이러한 의지의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서의 이념론과 이를 기초로 한 예술론이 전개된다. 예술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세계의 본원인 이념을 인식하는 수단이며. 이 인식은 삶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거기서 저자는 예술 작품, 예술가. 자연미와 숭고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의 입장올 미스트의 주요 문구의 인용을 통해 세밀하게 전개시기고 있다.

제4권에서는 쇼펜하우어의 고유한 윤리적 입장을 인간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육체가 생존하는한 절대적인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 자유는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육체에 얽매인 의지의 현상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이러한 이기주의로부터의 해방은 바로 자아와 타자가 똑같은 의지의 현상이라는 통찰로부터 일어나는 감응, 즉 연민에 의해 가능하며, 이것이 덕의 본질 을 이루는 기초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개별적인 자아의 거부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타인, 더 나아가 우주의 근원인 보편적 의지에로 확장시키는 것이며, 이때 일어나는 자아에 대한 통찰과 타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응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 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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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책장

이정모, 이은희, 이강영, 이명현 / 북바이북 / 320쪽

(2019. 7. 24.)

아무리 길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낯선 도시에서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원래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도가 필요 없습니다. 서서히 적응해왔기 때문이죠. 책의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문학의 세계에 살던 분들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해도 그 작가를 쉽게 자리매김할수 있을 겁니다.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보이니까요 과학책의 세계는 어떨까요? 과학책이 몇 가지 없을 때부터 즐겨 읽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책이 나오면 새 책을 이전 책들과 어떤 방식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할지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 회과학이나 인문학에 도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이리는 낯선 세계에 들어오면 복잡해 보이지요 길을 잃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입니다. 과학책으로 엮은 지도 말입니다.

(P.6)

흔히 '과학자의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지목되는 것이 있다. 명료성, 정확성, 객관성, 간결성이다. 아무래도 과학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다루기에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이 가능하고, 꿈과 상상이 아닌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치우쳐 지기에 가능하면 이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선행된다. 또한 감각적 수사나 은유보다는 오해를 피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먼저이니, 이를 풀어 쓰는 방식이 간결해야 함은 당연하다. 대 부분의 과학자가 글을 쓰는 목적이 타인과 교감하고 공감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정보를 교류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니까 말이다. 이런 글쓰기에 익숙한 과학자들이 써낸 책들은 많은 경우 양념하지 않는 닭가슴살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지식의 근육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영양가는 꽉 차 있지만,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고 퍽퍽해서 쉬이 손이 가지 않는, 막상 큰맘을 먹고 먹 기 시작하다가도 얼마 못 가 십중팔구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 숨을 쉬게 만드는 그런 것. 그렇기에 과학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처 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보다는 조금씩 나눠 천천히 씹어 삼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하나의 문단을 읽다가도 지식의 소화 불량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같은 책을, 같은 구절을 천천 히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반추동물이 급하게 씹어 삼킨 질긴 섬유질 음식들을 다시 게워내어 꼭꼭 씹어 삼키듯이. 과학책은 그렇게 읽 었다

(P.119)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더욱 큰울림과 반향을 지니는 건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사는 타자화된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혹은 살아갔던 우리 의 가족, 친구, 이웃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가 아프게 한 개인들을 어떻게 사회가 치유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픔을 하소연할 데 없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탐욕에 희생자가 된 세월호의 아이들, 사회적 차별로 늘 숨죽여 지내는 성 소수자와성 전환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이야기, 우리가 듣기는 했었지만 굳이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지나쳤던 이야기들, 어쩌다들 여다보기는 했었지만 굳이 읽어내려 하지 않았던 행간의 이야기들 을 담담하고 정확하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분명 이 책은 과학자가 쓴 책답게 정확하고 명료하면서고 객관적이고 간결하다. 하지만 전혀 건조하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명료하기에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괴 정확하기에 반론을 하기 어렵게 만들며, 당사자의 슬픔과 아픔을 선명하게 짚어낼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다. 이에 더해 간결하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개인의 행복과 불행뿐 아니라, 개인의 몸이 앓는 병과 몸에 남는 선명한 상처가 실상 그 사회가, 그 사회적 관계가 얼마든 지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기에,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의 문장은 술술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술술 읽을 수가 없다. 한 페이지에 가슴 이 먹먹해서 한숨 한번 쉬고, 또 다른 페이지에 눈물이 치올라 잠시 하늘 한번 보국 그다음 문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가 한 참을 진정하고서야 다시 책장을 열게 만들었다.

(P.126)

유전자의 특징과 개념을 잡아주는 책으로 떠오르는 것은 『게놈 익스프레스』(조진호 지음, 위즈덤히우스, 2016)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래픽노불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유전체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처리한 흐름도 매우 돋보인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의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컷에 글과 그림이 직관적으로 다가가기 쉽지만, 줄글보다 행간의 넓이가 커지므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느낌보다는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겅중겅중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 과학책은 두 번 읽기를 권장 한다. 먼저 커다란 줄기를 잡기 위한 입문용으로 한 번, 해당 분야의 지식을 쌓고 난 뒤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또 한 번. 행간을 읽어내는 건 독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P.135)

물리학자들은 양성자의 구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파이온, 케이온 등을 비롯 한 여러 가지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가속기는 물질의 구조를 탐색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임이 밝혀졌다. 1950년대부터 대형 가속기가 건설되고 가속기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더욱 더 많은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었고, 물질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 섰다.

우리가 입자물리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구체적인 의미로 입자물리학을 원자핵 이하의 세계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하면 거의 맞다. 입지들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에 더욱 크게 진전을 보였다. 다시 쿼크라는 새로운 종류의 입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를 비롯한, 그동안 발견된 수 많은 입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으로는 원자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양자 이론을 전자기 상호작용에 적용하는 양자전기 역학이 수립되어 체계적으로 기본입자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길이 열렸다. 이런 실험적, 이론적인 발전의 결과로 중력을 제외한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모두 게이지 양자 장이론이라는 형식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이론인 표준모형이 1970년대 초에 수립되었고 실험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표준모형의 모든 세부가 철저하게 검증되었다. 표준모형에 나오는 입자는2012년 힉스 보손이 발견됨으로써 모두 발견되었고 표준모형의 구조도 거의 전부 확인되었다.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은 힉스 보손의 자체 상호작용의 효과뿐이며, 표준모형과 어긋나는 실험 결과는 중성미자의 질량뿐이다. 표준모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현상의 거의 전부를 놀랍게도 정확히 설명해주는 이론으로서, 현대 물리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P.178)

세상은 무한한수수께끼와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빛과 어둠,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열기가 번갈아 찾아오고, 나무와 풀, 짐승과 새들과 벌레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곳.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두렵지만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차츰차츰 세상의 모습을 밝혀왔다. 17세기경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를 개발해 냈다. 지금 우리는 이 도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손에 든 후 인간은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괴 자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쯤 되자, 인간은 더 이상 세상에는 수수께끼란 없다고, 이제 인간이, 혹은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수 있게 되었고, 남은 일은 그 안에서 잘 살아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세상의 이면을 느끼고 세상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신비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원자였다.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원지를 진짜로 이해하려고 하자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과학을 건 설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금 원자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는 양자역학이 라고 부른다.

20세기 과학에서 양자역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양자역학을 통해서 우리는 원지를 이해하고, 물질을 이해하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피상적인 지식을 체 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P.209)

우리가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는 목적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지구라는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각 과목들은 그 분야의 지식을 제공하는 한편, 다른 분야와 서로 얽혀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준다. 수학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과 추상적인 사고를 배우는 과목이다, 학생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이 부분,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쉬운 예를 이용해서 수학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많이 있다. 하지만 결국 수학의 목적이 추상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회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 미분과 적분이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미분과 적분을 그저 복잡한 계산법으로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생각한다 해도, 나중에 과학이나 공학에 관한 일을 하게 될 사람이면 미적분을 필요로 할 기능성이 높으니, 사실 미적분이란 꽤 실용성이 큰 지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저 복잡한 계산법일 뿐이라팀 굳이 모든 사람이 배을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미적분은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적분을 배우는 목적 혹은 의미는 계산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분과 적분은 인간이 구축한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자, 가장 심오한 개념을 배우는 분야다. 그 개념 이란 바로 '무한이다.

무한이라는 개념은 누구나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사유는 무한을 다뤄왔다. 한편으로는 무한에 의해 사유를 제한빋아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을 생각하며 엄청난 지극을 받았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는 무한을 경험 할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내가 보고 있는 이 공간이 무한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내가 무한을 보고 있는가? 무한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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