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 이선희 / 아르테 / 296쪽
(2018. 6. 9.)




  “책에는 힘이 있지.”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 워낙 과묵해서 손자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책에 관해 말할 때에는 가느다란 눈을 한층 더 가늘게 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시대를 초월한 오래된 책에는 큰 힘이 담겨 있단다. 힘이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 너 마음 든든한 친구를 많이 얻게 될 거야.”
(P.26)



  “유머 감각은 별로지만 마음만은 기특하군. 이 세상에는 이치가 통하지 않거나 부조리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고통으로 가득 찬 그런 세계를 살아갈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이치도 완력도 아니야. 바로 유머지.” 
(P.37)



  “이 세상에 니체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많지.” 
  사내는 여전히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마디 격언이나 골자가 빠진 요약만을 보고 유행하는 코트처럼 니체를 입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너도 그런 타입 인가?”
  “책을 보기만 하는 학자는 결국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책을 보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P.53)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린타로는 사내를 향해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했다. 그 말을 듣고 하안 양복의 사내가 입을 다문 채 몸을 움찔거렸다. 팽팽한 긴장과 정적 속에서 린타로는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책에는 커다란 힘이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의 힘이지 네 힘은 아니야.”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채워도 네가 네 머리로 생각하고 네 발로 걷지 않으면 모든 건 공허한 가짜에 불과해.”
  “책이 네 대신 인생을 걸어가 주지는 않는단다. 네 발로 걷는 걸 잊어버리면 네 머릿속에 쌓인 지식은 낡은 지식으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나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펼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골동품에 불과하게 되지.” 
(P.64)



  “책을 읽는 건 산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책과 산이 비슷하다고요?” 린타로는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차의 향기를 즐기듯 눈앞에서 천천히 찻잔 을 돌렸다.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때로는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
  “독서에도 힘든 독서라는 게 있지. 물론 유쾌한 독서가 좋단다. 하지만 유쾌하기만 한 등산로는 눈에 보이는 경치에도 한계가 있어. 길이 험하다고 해서 산을 비난해서는 안 돼. 숨을 헐떡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기는 것도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이란다.”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한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린타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기왕에 올라가려면 높은 산에 올라가거라. 아마 멋진 경치가 보일 게다.”
(P.124)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말은 헛소리일 뿐입니다. 책은  아주 잘 팔리고 있어요. 실제로 '세계제일출판사'는 오늘 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거든요.”
  “혹시 빈정거림인가요?”
  “빈정거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책을 파는 건 이주 쉬운 일이죠. 단순한 한 가지 원칙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말이에요.”
  상대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문 린타로를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면서, 사장은 숨겨놓은 마술의 비밀을 밝히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리는 책을 만든다'는 원칙입니다."
  사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리 출판사는 뭔가를 전하기 위해 책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책'을 만들고 있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후세에 전해야 할 철학, 잔혹한 진실이나 난해한 진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세상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출판사에 필요한 건 '세상에 무엇을 전하느냐'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죠.”
(P.184)



  “진리도, 윤리도, 철학도,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다들 삶에 지쳐서 자극과 치유만을 원하고 있죠 그런 사회에서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 자체가 모습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말하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팔리는 거라고! 아무리 걸작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P.188)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위안, 문제를 뒤로 미루기만 하는 안이한 타협, 경박하고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한 토론...... 나는 그런 걸 수도 없이 보았어. 때로는 책의 위기를 깨닫고 목소리를 높인 자도 있었지만 결국 큰 흐름을 바꾸지 못한 채 단지 떠내려가기만 할 뿐이었지. 네가 만 난 세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바꾼 결과, 하나같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야.”
(P.253)



  "책은 지식이나 지혜, 가치관이나 세계관처럼 많은 걸 안겨줘요. 몰랐던 것을 아는 건 즐겁고, 새로운 견해를 만나는 건 굉장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하지만 책에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린타로는 가슴 안쪽에 떨어지는 가루눈처럼 허무한 생각을 열심히 손으로 받아서 말로 바꾸었다. 손으로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지는 소중한 일들의 한 조각만이라도 전하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책에 관해 말하는 것뿐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의 힘이 무엇인지 찾았어요. 그리고 고민하는 와중에 최근에 조금이나마 대답 같은 것에 도달한 것 같아요.”
  “어쩌면 책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면서 허공을 가로질렀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한 깊은 정적이 캄캄한 통로에 내려앉았다.
  어둠을 향해 눈을 크게 떠도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 있을 여성을 향해 린타로는 말을 이었다.
   “책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려져 있어요. 괴로워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말과 이야기를 만나고 그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린타로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 안 된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런 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점점 당연하지 않게 되고 있어요. 당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그래야 하지?'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죠. 왜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요. 이건 논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어요. 논리로 말하기보다 훨씬 소중한 것,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 리는 걸 쉽게 알수 있죠.”
  린타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열심히 말을 짜냈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걸 가르쳐주는 게 책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힘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는 거예요."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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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섬​
김한민 / 워크룸프레스 / 144쪽
(2018. 6. 2.)




  “전 사실 읽지 못해요. 눈이 멀었거든요.
  완전히 멀진 않았지만 많이 흐려요.
  눈앞에 365일 안개가 꼈어요."
 
  “하지만 책은 정말 좋아해요.
  펼칠 때의 느낌,
  덮을 때의 느낌이 못 견디게 좋아요.
  펼칠 땐 바람이 일고, 가루가 막 흩어지죠.
  책마다 다르고 그래서 두근거리고."

​  “문장이란 게 있다면서요?
  너무 보고 싶어요. 놀라워요,
  글 쓰는 사람들은.
  아, 어떻게 하면, 문장과 문장을 이어서..."

  “바람을 일으킬까?"
​(P.24)



난 말이다, 평생 책을 만들어왔어.
근데 지나고 보니 진짜가 없는 거야.
처음엔 진짜로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가짜가 되는 거야. 이상하지? 
매번 원래 하려던 말을 잊고 미궁에 빠져버려.
어찌어찌 마무리는 하지만 늘 뭔가 부족하지.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대. 세상에 완성이 어딨냐. 그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개뿔! 거짓말이야. 불행히도 난 진실을 알았어. 완성이란게 있더라고!
(P.44)



기록은 그만큼 어려워.
내가 터득한 기술은
가능한 오래 핑퐁을 하는 법.

조바심이 나도
애가 타도
근질거려 죽겠어도 
계속 게임을 하는 거야.

몸이 기록할 때까지 계속.
 
그럼 나중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테고,

끌고 다니면서
산책까지 할 수도 있지.
 
너가 있는 세계 밖의 반응도 살필 수 있고
 
무한한 수의 세계들과 접속할 수도 있어.

​나중에는 그것들을
보관할 서랍이 모자라
때때로 하나씩
풀어줘야 할 때도 있는데,
신기한 건...

풀어줄 때쯤 되면 또 달라져 있어! 놀랍지 않아?
(P.63)



​이 작가는 무슨 심정으로 이 문장을 썼을까?
​“음 어쩌면..." 
 
쉿!
있어!
작가다!

살아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쫓아가자.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접근해야
가까이 가.
 
저자는 늘 도망을 다니지.
집힐듯 말듯.
숨바꼭질의 달인들이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문장이 몸에 배인다는 걸 잘 알지.

네가 쫓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그러나
정작 잡을 순 없을 만큼의
거리를 들 줄 알지.

그런데 내가 깨달은 건, 
작가늘도 우릴 필요로 한다는 거야.
쫓아오는 사람 없이 가는  도망이
무슨 도망이겠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칠 때쯤, 포기하는 시늉을 해봐.
 
기다려보잖아?

슬쩍 모습을 드러낼걸?
네가 오나 안 오나....

그런 게 저자들이야. 
(P.85)



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물론 그 문제를 피해
나머지 부분만 팔 수도 있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문제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고.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 되 겠다는 느낌이 강해진단다.
 
문제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살아 움직여.
넌 그것과 씨름해야 해.
 
그건 도깨비 같아서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자빠뜨려 보려고 해도
여의치 않고,​
 
두 다리 버티고 있기도 힘들지.
힘이 빠져 울고 싶어도 물고 늘어져야 해
넘어가면, 지금까지 쌓은 걸 녀석이 모두 망칠 수 있어.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그래도 의지는 네 편이고
그게 널 버티게 하지.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 풀에 지쳐서
너를피해버리지.
 
문제란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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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어스 / 두행숙 / 들녘 / 406쪽​
(2018. 6. 2.)




  “그럼 오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격한 감정이 불쑥 솟구쳐 올라와 좀 당황해서 물었다.
  골고는 마치 별을 바라보듯이 터널의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주 속에는 하나의 오름이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적 착상들은 모두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 마찰을 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는 이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의 창조적 밀도는 엄청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음악의 바다와 순수한 영감의 강물들. 그리고 번뜩이는 정신들에 둘러싸여 움찔거리면서 생각들을 분출하는 화산들로 가득찬 보이지 않는 천체입니다. 그것이 오름입니다. 거대하게 자신의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힘의 장(場)입니다. 그러나 모두한테 내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선택된 이들에게만 보여줍니다.”
(P.42)



  나는 부흐링 족의 왕국으로 들어와 들어와 살게 된 날짜 세는 일을 중단했다. 왜냐하면 수를 센다는 것은 결코 내 장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여기 에서는 시계는 물론, 원래 날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그동안 몇 가지 배운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뽐내는 것은 아니다. 그 난쟁이들이 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것만으로도 내 어휘력은 대단히 늘어났으 며, 이제 수도 없이 많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희곡, 시, 신문, 그리고 편지들의 줄거리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잠에 빠질 때까지 쉴 새 없이 경구들을 암송할 수 있었고, 또 무수한 풍경들에 대한 묘사도 능숙해져서 어느 대륙 전체를 그런 묘사 문장들로 장식할 수도 있었다. 플롯의 틀, 클라이맥스의 곡선, 등장인물의 성격, 놀라운 반전, 호흡이 긴 이야기의 전개, 극적인 열쇠 등, 부호링 족은 내가 평생이 걸려도 읽어내지 못했을 아주 많은 문학 자료와 기술을 나한테 전수해주었다. 나는 이제 좋은 대화란 어떤 소리로 울려야 하는지 알았으며. 책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면 독지들을 순식간에 빨아 들일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수천 명이나 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서사적인 호흡에 따라 체계적으로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시를 들어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시어로 말을 했으며, 눈(雪)에 해당되는 단어는 레타 델 브라트피스트만큼이나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혹시나 부흐링 족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마치 낙원에서 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늘 조회롭지만도 않았다. 비록 나는 이 작은 외눈박이들을 아주 좋아했지만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정말 대단히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들 누구와도 문학적인 취향을 완전히 같이할 수는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게다가 작기들의 작품을 무조건 암송하고 있는 부흐링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기 어려웠다. 
(P.97)



  오, 내 충실한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늦은 저녁 막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안식을 취하려 하는데, 문득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느낌을 아는가? 그럴 개연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방 안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데도 나를 위협하는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불을 켜보면 물론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불안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어린아이처럼 두려워했던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불을 끈다. 그러자 다시 거기에 뭔가 있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엿보고 있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제는 심지어 숨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와 침대 주위를 슬그머니 돌아다닌다. 그러고는 그대들의 목덜미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숨결을 내뿜는다.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그대들은 눈을 뜨고 공포에 떨며 벌떡 일어난다. 다시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어둠과 더불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스런 의심은 남는다. 불빛이 꺼지면 빛을 두려워하는. 우리가 숨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듯 어둠이 필요한 보이지 않는 족속의 마법의 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남은 밤을 촛불을 켜놓은 채 몸에 안 좋은 반수면 상태로 보낸다. 안 그런가?
(P.155)



  "내 친구는 절망했다. 많이 쓰면 쓸수록 그의 글은 할 말이 더욱 적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텅 빈 종이 앞에 앉아서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그러자 눈물의 여관으로 가서 꿈의 실에다 목을 매달 생각까지 했다. 바로 그때, 전혀 뜻밖에도 그는 그의 생애에서 아마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가장 행복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출판업자를 찾았겠지요?"
  내가 반문했다.
  그림자 제왕이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하자. 나는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한 데 대해 창피함을 느꼈다.
  “그의 몸속에 오름이 관통했다.”
  마침내 그가 말을 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집중적으로, 그래서 그는 처음에 자신이 죽는 거라고 믿었다."
  아니, 그림자 제왕이 오름을 믿고 있단 말인가? 보니까 이 대륙 안에서는, 아무리 지하 깊은 곳까지 헤집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이런 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장소를 찾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시건방진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아주 갑작스럽게 그를 관통했다. 오름은 그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를 우주의 아주 먼 곳으로, 모든 예술적 착상들이 서로 만나 결합되는 장소로 높이 인도해갔다. 그곳은 물체도 생명도 없고 단 한 개의 원자도 없었지만. 너무도 간결한 상상력들로 가득 차 있는 천체여서 별들이 춤추면서 그 가까이로 다가올 수 있도록 유도했다. 거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가도 불가능한 순수한 상상과 힘 속으로 젖어들 수 있었다. 그 힘의 영역에 단 한순간만 머물러 있어도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효력을 잃은 듯이 보였으며. 일, 이, 삼차원들은 정리 안 된 원고들처럼 서로 마구 겹쳐졌다. 죽음이라는 것도 그냥 시시한 농담처럼 보였고. 영원조차도 마치 눈 깜박할 사이처럼 여겨지는 터무니없는 장소였다.  그가 그 장소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머릿속은 낱말들, 문장들, 착상들로 가득차서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들은 이미 모두 갈고 닦아 정제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글로 써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느끼면서 행복했지만, 동시에 지신이 실제로 그 훌륭함에 기여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 오름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펜대를 잡고 마치 저절로 써가듯이 글을 쓰는 것, 그런 것이야말로 게으른 시인의 꿈이었다. 아무렴 그랬다.
(P.207)
​​​


  “아니다. 문학은 영원한 것이 아니야!"
  호문콜로스가 외쳤다.
  "순간적인 것이다. 아무리 쇠로 책을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글자를 새긴다 해도 언젠가는 이 지구와 함께 태양에 부딪치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영원한 것이란 없는 법이다. 예술에는 전혀 없다. 한 작가가 죽은후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희미한 램프처럼 서서히 꺼져 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활활 타오르는가다.
  "그건 성공적인 작가의 좌우명이겠지요.”
  내가 반박횠다
 “살아 있는 동안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문콜로스가 말했다.
  "어떤 책이 얼마나 간 팔리고 팔리지 않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 혹은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한 작가를 인지하는가 안 하는가는 전혀 상관없다. 그런 것이 규범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우연과 부당함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내 말은, 네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네 안에서 얼마나 환하게 오름이 타오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은 오름을 믿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음울하게 말했다.
  "다만 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전부다."
(P.252)

​​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그가 말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작가라고 부르지. 그리고 작가들보다 좀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다른 시인들보다 좀더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이 있다.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은 오름에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이다."
  오 이런, 또다시 오름이라니! 내가 아직도 오름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빌어먹게도 고집스럽게 내 발치에 붙어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외딴 구석까지도 나를 쫓아다녔고 지하 수 킬로 미터 아래 살아 있는 책들의 도서실까지 쫓아와 나를 찾아낸 것이다.
  "오름이 지니고 있는 장조적인 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만 안다면 말이다."
(P.266)



  "작가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있는 거지. 체험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네가 무엇을 체험하려면 해적이나 책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창조해낼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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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어스 / 두행숙 / 들녘 / 350
(2018. 5. 29.) 



  나는 독서 행위를 광기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어느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책들이 상처를 주고, 중독시키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을 수도 있는 곳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그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내 이야기에 동참하겠다는 각오가 진정 되어 있는 사람만이 나를 따라 이 이야기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비겁하지만 몸의 안전을 위해 뒤로 물러서 있기로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나는 축하를 보낸다. 잘 있어라, 겁쟁이들아! 나는 너희들이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기 바라며 이 말을 끝으로 작별을 고한다!
(P.13)



  나는 밖으로 나가서 린트부름 요새 안의 어느 성벽으로 올라가 앉아 그 원고를 하늘 아래 탁 트인 데서 읽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단첼로트 대부가 직접 만든 딸기잼을 빵에 발라 그것을 챙겨 길을 떠났다.
  나는 바로 이 날을 내 생애에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태양은 이미 오래전에 하늘 한가운데를 지났지만 여전히 햇살이 따사로웠다. 그래서 린트부름 요새의 대다수 주민들은 야외에 나와 있었다. 길가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요새의 성벽 위에는 햇볕을 목말라하던 공룡들이 씩씩거리면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근래의 심경들을 서로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곳곳에 퍼졌다. 그 요새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늦여름의 풍경이었다.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좁은 길들을 지나가다가 결국 걸으면서 그 원고를 훑어보기 시작쭸다.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적절한 위치에 쓰여 있다는 것이있다. 사실 그런 인상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원고든 처음 훑어보면 그런 인상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자세히 읽어가게 되면 비로소 여기저기 무언가 맞지 않고 구두점들이 잘못 찍혀 있고, 오자도 있으며. 적절하지 못한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낱말들이 너무 자주 중복되는가 하면, 글을 써가는 동안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실수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고의 첫 장은 달랐다. 내용을 알지 않고도 흠잡을 데 없는 예술작품이라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 마치 첫눈에 바라보고도 그것이 천박한 작품인지 대가의 작품인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회화나 조각과도 같았다. 원고의 첫 장을 전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원고는 마치 화가의 손으로 그리진 것 같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탁월한 예술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기호들 은 종이 위에서 마치 발레를 하듯 매혹적인 윤무를 필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마음을 휘어잡는 이 전체적인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읽어가기 시작했다.
(P.35)



  우리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뿐이다.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실외로, 바깥의 정원으로 발을 옮긴다. 나무들이 소슬거리는 데서 그리고 별들 아래서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호흡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가벼워진다. 우리는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 삶이란 그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일 뿐이다.
(P.75)



  “저희 같은 직업에서는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좋은 문학은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기가 드물지요 최고의 작가들은 가난하게 살다 죽습니다. 조악한 작가들이 돈을 벌지요. 항상 그래왔습니다. 다음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인정받을 작가의 재능이 저 같은 에이전트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때 쯤 가서는 저도 이미 죽어 없을 텐데요. 제게 필요한 것은 하찮더라도 성공을 거두는 작가들입니다.”
(P.117)



  나는 음악이 되어 있었다.
  나 자신이 해체되는 것으로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아마 수증기도 끓는 액체의 몸에서 빠져나와 차가운 공기 속으로 상승할 때 그런 느낌 일 것이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나는 자유로워졌다 정말로 모든 세속적인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내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나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자 나는 음향이 되었다. 음향이 된 자는 파동이 된다. 음향의  파동이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누가 알겠는가마는. 그는 우주의 비밀에 이미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거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겠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을, 음악의 비밀을 이해했다. 음악이 왜 다른 예술들보다 월등히 뛰어난지를 이해했다. 그것은 음악이 지닌 무형성 때문이다. 음악은 한 번 그 악기로부터 벗어나면 완전히 그 자체가 되고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피조물인 음향이 된다. 무게도, 형체도 없고 완전히 순수하며 우주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음악이 되어. 활활 타 오르는 원과 더불어 모는 것을 넘어서서 높이 춤추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 세상이 있고, 내 몸이 있고, 내 근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완전히 부차적으로 보였다. 그러자 그것은 불의 수레바퀴가 되었고. 오직 현존재만이 가치를 지녔다. 그것은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돌고 또 돌다가 마침내 여러 색의 빛은 다시 그 내부로 홀러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세 개의 굽은 궤도가 중앙의 한 곳으로 모아졌다.
  그러자 나는 그것을 보았다. 바로 삼원이었다.
  삼원, 그 비밀스러운 기호는 바로 키비처와 이나제아 아나자지의 고 서점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내 내면의 눈앞에 이제 더 큰 소리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나팔 음악의 힘으로 불려나와 빛나고 있 었다. 이 활활 타오르는 원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고 가장 흠 없고 가장 찬란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일하고 그것에 복종하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내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때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했다. 음악이 중단되었고, 기호도 사라졌고 나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래로 깊이, 깊이 추락했다. 세상 속으로, 차모니아로, 내 몸속으로 다시-착! 하고-되돌아가 지금까지 그렇게 속박에서 벗어나 있던 영혼이 다시 가차 없이 내 몸속으 로 들어와 원자들 속으로 갇히고 말았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네벨하임 악사들은 트럼나팔을 내려놓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청중은 일어섰다. 아무 갈채도 없었다. 당황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처럼 대단했던 콘서트가 어쩌면 이리도 이상 야릇하게 끝난단 말인가!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난쟁이한테 몇 가지를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자 역시 이미 사라진 후였다. 키비처와 슈렉스가 군중들과 함께 자리에서 급히 도망치는 모습도 보였다. 청중은 그들이 앉아 있던 열에서 벗어나려다 부딪쳐 비틀거리곤 했다. 오직 나 혼자만이 마비된 듯이 부흐하임 시립공원의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P.202)



  “저는 책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제가 사들이는 것은 고서점 전체 입니다. 저는 엄청난 양의 책들을 밀매합니다. 시장을 덤핑 책들로 넘쳐나게 해서 주위의 경쟁자들을 몰락시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파산하면 그들의 서점을 헐값에 사들입니다. 저는 부흐하임 전역의 집세 동향을 결정합니다. 이 도시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제 소유입니다, 거의 모든 종이공장들과 인쇄소들도 마찬가지고요. 부흐하임의 문학 낭송가들 모두가 저의 봉급 목록에 올라 있으며 독이 있는 골목에 거주 하는 자들도 거의 모두 그렇습니다. 저는 종이 가격을 결정합니다. 책의 출판부수도 결정합니다, 어떤 책이 성공을 거둬야 하고, 어떤 책이 그래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저는 성공적인 작가를 만들어냅니 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그들을 파열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부호하임의 지배자입니다. 제가 바로 차모니아의 문학입니다”
(P.226)



  “어떻게 오늘 제가 한 질문들의 대답이 이런 오래된 책 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까?"
  “오늘날의 거의 모는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이미 오래된 책들 속 에 쓰여 있습니다.” 스마이크가 대꾸했다.
  “만약 당신이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책들에서 찾아보십시오. 만약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대로 두시고요.”
(P.232)​



  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던 한기가 팔 위로 퍼져 올라가면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면서 눈 앞이 흐려졌다. 그때 스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모든 대답들이 책 속에 쓰여 있다고 믿는 몽상가였군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책들이란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아주 사악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책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중에는 살짝 만져도 죽음을 불러오는 것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자 내 눈앞이함깜해졌다.
(P.236)

​​

  수백 가지의 착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마구 소용돌이쳤다. 소설, 시, 에세이, 단편소설, 희곡작품들을 위한 착상들로 내 분노와 저항심에서 솟구쳐 나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전집 하나를 완성할 기초가 될 만했고, 글을 쓴다면 서가 하나를 온통 작가 미텐메츠의 책들로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들이 지금 여기서, 하필이면 정말이지 그 무엇 하나도 메모할 수 없는 이 순간에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착상들을 붙들어매 머릿속 기억의 방에 못박아 두려고 애썼지만 그것들은 마치 미끄러운 물고기들처럼 내게서 다시 빠져나갔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창의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글을 쓸 도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슬프고도 우스광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웃다가 이따금 욕도 퍼부었다. 게다가 내가 지금 토해내는 저주의 말들조차 숨이 막힐 듯이 독창적이었다!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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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2
F. 스콧 피츠제럴드 / 공진호 / 시공사 / 316쪽
(2018. 5. 22.)




  작별 인사를 고하며 딕은 엘시 스피어스의 충만한 매력을 깨달았다. 마지못해 단념한 로즈메리의 마지막 조각보다는 그녀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로즈메리는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스피어스 부인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로즈메리가 떠날 때 지니고 간 가면과 자극과 광휘를 그가 부여해주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유발한 
무엇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스피어스 부인의 우아함을 지켜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구석이 있었다. 전쟁이랄지 수술이랄지 남자가 그녀 자신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끝마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 남자가 그런 일을 치르는 동안에는 보채거나 빙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자가 볼일을 다 마치기까지 그녀는 안달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어딘가 높은 의자 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11)



  추크 호수에서의 지난 한 해 반마저 그녀에게는 헛되이지 나간 시간이었다. 계절의 변화는 도로 인부들의 작업복이 5월에는 분홍색, 7월에는 갈색. 9월에는 검은색, 봄에는 다시 흰 색으로 바뀌는 것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병에서 헤어나올 때 그녀는 새 희망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정말 많은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지만 딕을 제외하고 다른 생존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녀는 그들을 온화하게 사랑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보살핌을 받는 고아들과 같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반항아들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그들을 독립적으로 혹은 창조적으로 혹은 강인하게 만들어 주는 활력을 찾으려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그들의 비결은 그들이 잊은 어린 시절의 고투 깊숙이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니콜이 앓고 있는 병의 다른 면인 외면의 조화와 매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소유되기를 원치 않는 딕을 소유하는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P.40)



  긴 지붕이 덮고 있는 기선 선착장은 더 이상 여기도 아니고 아직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있다. 몽롱한 누런빛의 둥근 천장 아래는 메아리쳐 울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화물차가 우르릉거리는 소리, 트렁크를 쿵쿵 놓는 소리, 기중기가 귀에 거슬리게 달각거리는 소리, 처음 맡게 되는 바다의 짠 내음. 사람들이 시간이 있는데도 서두른다. 과거는. 대륙은 뒤에 있다. 미래는 배 옆의 빛나는 입구에 있다. 어스레하고 떠들썩한 뒷골목 같은 선창은 너무나도 헛갈리는 현재이다.
  전차에 오르고 나면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이 자동으로 조정되어 좁아진다. 안도라보다 작은 공국의 공민이 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무장의 책상 앞에 앉은 남자들은 선실만큼이나 생긴 모양새가 이상하다. 여행자들과 그 친구들의 눈이 오만하다. 그다음으로 쓸쓸한 기적 소리가 크게 울리면 불길한 진동과 함께 배가, 인간의 고안물이...... 움직이는 것이다. 부두와 그곳의 여러 모습들이 미끄러져 가고 잠시 동안 배는 그 모습들 기운데서 잘못해서 떨어져 나은 조각 같다. 부두의 모습들이 벌어짐에 따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P.86)



  딕에게 있어서 매력은 항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병원에서 숨을 거둔 그 가엾은 여인의 무모한 용기이든, 길 잃은 이 젊은이가 따분한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인 용기 있는 기품이든. 딕은 그 매력이란 것을 보관해둘 수 있을 만치 작게 해부 했다 - 인생의 전체와 부분은 질적인 면에서 다르며. 또 40대를 지나는 동안의 인생은 부분을 통해서만 관찰이 가능한 것 같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니콜과 로즈메리에 대한 사랑, 에이브 노스와의 우정, 종전의 부서진 세상 속에서 사는 토  미 바르방과의 우정-그런 관계 속에서 인격들은 그가 인격 자체가 될 만치 가까이 그에게 미락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양자택일을 할 어떤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마치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일찍이 만났고 일찍이 사랑한 어떤 사람들의 자아를 지니고 다니도록, 그리고 그들이 완전한 만큼만 완전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어떤 외로움의 구성 요소가 결부되어 있었다-사랑받기는 그리도 쉽다는 것-사랑하기는 그리도 어렵다는 것.
(P.158)



  그녀는 그간 안전을 보장해준 오래된 발판과 임박한 도약 사이의 미묘한 위치에 놓여 그 문제를 의식의 진정한 최전선으로 불러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도약하면 피와 근육의 성분 자체가 변화해서 내려앉아야만 하니까. 딕과 그녀 지신의 모습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확정되지 않은 모양으로 환상의 무도회에 휩쓸린 유령처럼 보였다. 몇 달 동안 모든 말은 어떤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고 곧 이것은 딕이 정하는 상황 속에서 해소될 것이었다. 이 심리상태는 전보다 한층 더 희망적일지 몰라도 (존재 자체를 위해 존재한 기나긴 세월은 그녀의 본성에서 일찍이 병으로 인해 죽은 부분들 중 딕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결괴를 낳았다-그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이 다른 본성 안으로 빈틈없이 미치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렇다) 그것은 여전히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가장 불행한 측면은 딕이 점점 냉담해진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현재 과음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니콜은 자신이 꺾일지 아니면 살아날지 알 수 없었다. 불성실로 넘쳐나는 딕의 목소리는 쟁점을 흐렸다. 그녀는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카펫이 깔리고 난 다음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도, 마지막에, 도약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후에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든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짐을 벗는 것, 멀었던 눈을 뜨게 되는 것이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니콜은 돈을 지느러미와 날개 삼아 변화하여 비상하도록 예정되었다. 새로운 형국은 경주용 차의 차대가 일반 자가용 차의 차체를 쓰고 오랜 세월 감취져 있다가 차체를 벗고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니콜은 벌써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별의 쓰라림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암울한 과정이었다.
(P.220)



  그녀는 탈의장에서 해변용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아직도 명판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소나무가 위로 둥글게 드리운 거리로 나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뭇가지에서 후다닥 달아나는 다람쥐, 나뭇잎을 톡톡 건드리는 바람, 멀리서 공기를 가르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있고 부동의 상태에 햇빛이 슬금슬금 비쳐 들어오더니 해변의 목소리들이 멀리 물러갔다. 그러자 니콜은 미음이 누그러지고 새롭고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생각은 잘 만들어진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명징했다-그녀는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새로운 방식으로 몇 년 동안 헤매던 미로를 따라 빨리 되돌아가며 그녀의 자아는 크고 화려한 장미처럼 개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해변을 증오했다. 딕이라는 태양을 주심으로 도는 행성 노릇을 했던 장소들이 원망스러웠다
(P.237)



  '와, 나는 거의 완전한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거의 홀로 서 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이가 없이.' 그리고 그 완전함이 최대한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덕이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계획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가운데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행복한 아이처럼 침대에 엎드려 니스에 있는 토미 바르방에게 도발적인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것은 낮 동안의 일이었다. 밤이 가까워오자 필연적으로 신경성 활력이 감소하고 기분이 처졌으며 생각의 화살은 얼마간 황혼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녀는 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려웠다. 최근에 보이는 그의 행동의 근저에 어떤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의 계획이 두려웠다-그가 세운 계획들은 잘되었으며, 거기에는 포괄적인 논리가 있었지만 니콜에게는 그런 논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생각하는 부분을 그에게 일임해왔으며, 그가 없을 때 자동적으로 그녀의 모든 행동을 주관한 기준은딕이 그것을 승인할 것인지의 여부였던 듯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기의 의향을 그의 의향과 대립시키기에 스스로 미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마침내 환상이라는 무서운 문, 탈출이 아닌 탈출의 입구에 붙은 번호를 알았다. 그녀는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오래 걸린 학습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 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힘을 앗아가고, 우리의 타고난 취향을 통제하고, 우리를 교화하고 불모의 존재로 만들기 마련이다.
(P.238)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어."
  "나한테서 오염돼서요?"
  "나는 직업상 때로는 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지."
  그녀는 그의 독설에 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겁쟁이에요! 당신은 인생에 실패하고 그 탓을 내게 돌리고 싶은 거야."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지능에서 나오는 예의 그 암시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그게 아무런 효력도 없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녀가 깨기는커녕 금가게 하지도 못하는, 진리 아래 진리의 단층들이 있었다. 다시 그녀는 그것과 싸웠다, 그녀의 작고 예쁜 눈으로, 우세한 쪽의 호사스러운 오만으로, 다른 남자를 향한 초기의 전이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분노로 그녀는 싸웠다. 그녀는 돈으로 그리고 언니가 그를 싫어하며 이제 자신을 지지한다는 믿음으로 그와 싸웠다. 그가 신랄한 혀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으로, 와인과 만찬으로 둔해진 그에 맞선 자신의 눈치 따른 간계로, 그의 육체적 퇴화에 맞선 자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으로, 그의 도덕 체계에 맞선 그녀의 부도덕으로 그녀는 그와 싸웠다-이 내면의 싸움에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약점마저 동원했다-속 죄 받은 죄와 모욕과 실수의 오랜 양철통과 토기와 병, 빈 용기들을 가지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싸웠다. 그리고 그녀는 2분 만에 승리를 거두고 거짓말이나 구실을 만들지 않고 자신에게 자신을 정당화하고 영구히 줄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다리에 기운이 빠진 그녀는 침착하게 흐느끼며 마침내 그녀의 것이 된 집을 항해 걸어갔다.
  딕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앞으로 수그려 흉장에 갖다 댔다. 이 케이스는 완료되었다. 의사 다이버는 이제 자유로워졌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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