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취임 연설문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서정혁 / 책세상 / 164쪽

(2018. 11. 16.)

통상적으로 '교수취임 연설' 또는 '교수 취임사' 라고 하면 대부분 형식적인 문구로 채워지기 쉽지만, 독일에서는 어떤 학자가 교수에 취임하면서 연설을 할 때에 연설문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 상횡에 대한 나름의 전망과 입장 등을 자신의 학적 연구와 관련시켜 압축적이면서 심도 있게 피력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점에서 헤겔이 행한 두 편이 점에서 헤겔이 행한 두 편의 교수취임 연설 문도 예외는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은 철학사 강의의 첫 시간에 행해졌기 때문에, 헤겔은 이 글에서 현재 철학의 처한 입장을 우선 개진하면서, '철학의 역사'인 철학사를 '위대한 정신의 보고(寶庫)' 로 보며 단순한 우연적 사건들의 열거가 아니라 '정신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 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 철학사를 포함하히는 헤겔의 역사관을 논할 때 '역사의 종말'이라는 화두를 떠올리기가 쉬운데, 이 연설에서도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히는 세계 정신의 현현으로서 역시를 바라보고 있는 헤겔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은 헤겔 철학의 체계적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엔치클로페디》 강의 초두에 한 연설문이다.《엔치클로페디》는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이 연설문은 아직 소개된 적이 없다.《엔치클로페디》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 학이라는 헤겔의 3단계 철학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저서이기 때문에, 헤겔은 이 연설문에서《엔치클로페디》의 전반적인 서술 내용과 철학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연설문은 분량은 비교적 짧지만 헤겔의 전체 사상을 개괄 하는 데는 무엇보다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 두 글은 제각기 '철학사' 와《엔치클로페디》와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헤겔 철학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즉〈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통시적인 역사적 흐름의 관점에서 헤겔의 사상을 조망할 수 있고,〈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으로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이라는 철학 체계의 공시적인 구조적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조망해볼 수 있다.

(P.7)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취임 연설문>

우선 일반적으로 철학사를 고찰하는 목적과 필연성, 관점이 있어야 하며, 철학 자체와의 관계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철학이 역사를 지닌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철학사의 필연성과 쓸모에 대해 우리는 여러 다른 사림들의 견해를 주목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둘째, 형식의 측면이 있습니다. 역사하는 것은 우연한 사견(私見)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역사는 작은 나룻배나 정기 항로 선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는 최초의 시작에서부터 성숙한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필연적인 연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다양한 단계들이 있을 수 있고, 이 단계들마다 전체적인 세계 직관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세세한 일들은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셋째, 이로부터 철학 자체에 대한 관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P.17)

<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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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현상적이며 시간적이고 우연적인 것만을 인식하고 공허한 것만을 인식하는 태도. 이러한 자만심이 바로 철학에서 넓게 확산되었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러한 상황이 이성적인 인식을 부인하고, 이러한 월권을 행하면서 확산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철학이라는 이 학문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좀더 옹골찬 감정과 새로운 실제적 정신과 모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옹골찬 정신이 지닌 이 서광을 환영하고 간청하면서, 철학은 내용을 지녀야 하며 이 내용을 제가 여러분 면전에서 개진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을 때 제가 유일하게 중시한 것은 바로 이 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청년의 정신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청년은 아직까지 궁핍한 제한된 목적의 조직에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사심 없이 학문적인 일에 전념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년은 자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에도 아직 얽매이지 않고, 단지 비판만 하려는 악착 같은 노력이 지닌 몰내용성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건강한 가슴은 진리를 열망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 머무르면서 철학이 세운 것은 바로 진리의 왕국입니다.

우리는 철학 연구를 통해 이 진리의 왕국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진실하며 위대하고 신적인 것, 바로 그것은 이념을 통해 존립합니다. 철학의 목표는 이 이념을 진실한 형태와 보편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성을 필연성에 의해서만 완성시켜야 하는 제한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왕국은 자유의 왕국입니다. 인간적인 삶이 아울러 간직하고 있으며 가치 있고 중요한 모든 것은 정신적인 본성 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의 왕국은 오직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만, 그리고 이념의 파악을 통해서만 실존합니다..

(P.26)​

철학적인 삼라만상의 모습은 오직 사유된 것뿐이고, 이것은 스스로에게서 사상을 자유롭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산출해냅니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므로, 철학의 내용은 피안(彼岸)에 있지 않으며, 신이나 세계나 인간의 사명에 대한 감각이나 내외적 느낌에 드러나는 바와 상이하지도 않으며, 오성이 파악하고 규정한 바와도 상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참인가 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오직 사유히는 이성에게만 드러납니다. 존재하는 것은 즉자적으로 이성적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나 의식에게도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사유의 활동과 운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성적인 것은 인간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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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철학, 역사와 체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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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역사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는 말인지를 생각 해보아야 한다. 헤겔도《철학사 강의》에서 이것을 우선적으로 의문시하고 있다.

철학사를 대하면서 우선 떠오른 생각은. 이 대상 자체〔철학사 자체〕가 어떤 내적 모순을 안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철학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또한 즉자대자적인 것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는 존재했다가도 또 다른 시대에는 사라져버리면서 다른 사상에 의해 대체되곤 한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다는 기조 위에서 본다면 결코 진리란 한시적인 영역에 속할 수는 없으니. 결국 이런 점에서 진리는 역사와 함께할 수 없다

​ 역사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사건의 연속이고, 이에 비해 철학은 시공적 한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다.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철학적 사상들도 사건이나 사실들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단순히 지나가버린 사상적 편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철학의 역사가 아주 다양한 사상적 편린의 연속일 뿐이라면, 철학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 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의 역사를 철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진리를 향한 객관적 학문이자 진리의 필연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동시에 개념적 인식을 위한 학문”인 철학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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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의 철학자들이 말한 바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언명들이 지닌 근원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언명에 담겨 있는 역사적으로 선행한 문제들을 비판적이면서 도 생산적으로 함께 더욱더 생각해보는 사람들만이 이 근원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동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은 '전통' 을 중시한다. 과거로서의 역시는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과 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인 바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우리가 역사적으로 존재한디는 사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초역사적인 불변적 진리' 가 현재 우리의 모습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학문이나 철학의 현재 또한 전통에 힘입은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 은 '유한하며 과거지사가 되어 버린 것들을 성스러운 사슬로 휘감아서 이전의 세계가 이루어 냈던 것을 현재의 우리에게 보존시켜주고 또 전승되도록 하는 힘' 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충실하게 보존되어 후대에게 원래 그대로 넘겨지는 '부동의 조각품' 이 아니라 '거센 물 줄기' 와 같은 것으로서, 전통의 내용을 형성하는 보편적 정신 이 이 물줄기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헤겔은 전통 속에 생동하는 이 '보편적 정신' 이 철학사에서 다루어야 할 중심적인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헤겔에게 있어서 철학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어온 과정을 다양한 사상의 형식들의 발전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학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 체계들의 상이성은 철학 자체에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라 꼭 필요 한 것이다. 그리고 상이하게 등장하는 여러 철학적 입장들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발전적으로 그것과 대결을 벌이면서 진행되어나기는 것, 이것이 곧 철학사인 것이다. 상이한 철학적 입장들은 다양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는 단 하나의 이념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 점을 헤겔은 이해를 돕기 위해 종종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철학적 이념의 발전적 전개는 어떤 타자로의 변화나 이행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의 몰입이며, 또한 자기 내면으로의 심화이다. 철학의 형성은 이 이념의 발전 자체를 통하여 가다듬어지거니와. 마치 생동하는 개체 속에서 하나의 생명. 한 줄기 맥박이 모든 부분 마디마디에 고동치듯이 하나의 이념이 체계 전체와. 또한 그 모든 부분에 깃들어 있다. 그 속에 생명력을 지닌 모든 부분과 이 부분의 체계화는 곧 하나의 이념에서 발단된 것이므로. 그 밖의 어떤 특수한 부분도 모두가 다만 이념의 활력에서 비쳐지는 반영이며 모사일 뿐이다.

​ 헤겔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 속에서 발생한 개별 사건으로서의 철학 체계나 사상 간의 발전적이며 필연적인 연관 관계에 주목할 때, 비로소 철학사의 의미가 개념 파악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모든 사상적 편린을 집합적으로 한데 묶어놓은 정보 전달의 자료가 아니라. 그것들 간의 필연적 연관성을 통해서 철학의 전체적 이념과 개별 철학 사상들 간의 자리매김이 개념적으로 명확해질 때 그것을 철학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P.73)

​​​

헤겔은《엔치클로페디》초판(1817)의 '서문'에서 '내용과 일치하며 유일하게 진실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 방법에 의해 철학을 새롭게 개조하는 것' 을 자신의 '엔치클로페디적 서술' 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재판(1827) 서문에서는 비록《엔치클로페디》전체가 논리학은 아니지만,《엔치클로페디》에서도 사태의 본성상 '논리적 연관을 '기초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밝히면서, '학문적 인식의 기초는 '내적으로 옹골찬 알맹이' 이며 '내재적인 이념' 이자 이 이념이 '정신 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성' 이라고 한다. 헤겔은《엔치클로페디》의 서문에서 '철학'과 '철학사'를 비교함으로써 '학문의 이념' 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헤겔은 철학사를 “철학의 대상인 절대자에 관한 사상을 발견해온 역사" 라고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사의 전개는 외적인 역사의 형태로 표상되지만, 외적인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절대자로서 '단 하나의 생동하는 정신' 이다. 그러므로 철학사는 사실상 유일한 절대자가 발전 단계들을 달리하여 나타난 모습 일 뿐이며, 이러한 사정은 '역사적인 외면성' 만 벗겨낸다면 철학 그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자인 이념에 대한 학문' , 즉 철학은 '체계' 로서만 성립 가능하며, '학적 이념' 의 전개 과정이 전체 철학 체계를 이루는 토대가 된 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각 부분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전체이며, 스스로를 자기 자신 속에서 완결 짓는 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보자면 철학적 이념은 특수한 규정이나 계기로 나타나 있다. 개별적인 원은 그것이 그 자체로 총체성이기 때문에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계기가 처한 제한을 분쇄하고 더 넓은 영역을 정초한다. 따라서 전체는 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원으로 서술되며. 원 각각은 하나의 필연적인 계기가 됨으로써. 이 원이 지닌 고유한 계기의 체계가 전체적인 이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체적인 이념은 각각의 개별적인 계기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상하게 된다.

학문의 체계를 추동하는 것이 이념이라면, 이념에 의해 전개된 '학적 체계의 요소 전체' 도 사실상 '학문의 이념' 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학적 체계의 구체적인 형태인 '철학적 엔치클로페디' 는 지식의 단순한 집적에 불과한 개별적 학문의 집합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박식이 학문은 아니다." 절대적 이념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포괄하는 '단 하나의 학문' 인 철학, 즉 '학문의 전체' 만이 '이념의 서술' 이기 때문에, 철학의 구분도 '단 하나의 학문의 이념' 으로부터 개념 파악되어야 한다.

(P.89)

두 연설문을 통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헤겔의 강조점은 '깨어 있음' 이라는 단어이다. 철학사가 철학사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 자신이 과거의 것을 '맑은 정신' 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철학이 체계로서 가능한 원동력도 유한자인 인간이 자신의 자연성을 부단히 지양하여 무한의 지평으로 고양되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만 발현되는 것이다.

역사와 체계의 중심에는 '철학하는 인간', 다시 말해 '사유하며 의지하는 인간'이 서 있다. 역시를 이끌어가는 것도 인간이며 체계를 건립하는 것도 인간이다. 신도 아니고 절대자 도 아닌 인간이 역사를 짊어지고 체계를 축조한다. 이러한 역학에 걸맞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의 태도이다. '깨어 있음'은 보다 보편화된 헤겔적 용어로 '이성' 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P.112)

지금 헤겔이 맞이했던 시대적 전환기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찾아오는 듯하다. 어느 누구도 '나' 를 '참된 나'로 인정 해주길 꺼리는 시대, 나 자신마저도 '참된 나' 찾기를 포기한 시대. 한 시대를 마감하며 또 다른 한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이 전환점에서, 철학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 사는 우리가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저물어가는 하루가 끝이 아니고 내일의 여명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면, 현재의 반성이 미래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기 되돌아봄의 순간에 나는 나와 끊임없이 마주하지만. 한시라도 자기 반성적 물음에 소홀할 때. 나는 나를 상실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다.

깨어 있자! 새날을 맞기 위해 깨어 있자! 이렇게 외치는 헤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결국 헤겔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나'는 헤겔 철학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서만, '자기'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이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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