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 오증자 / 민음사 / 430쪽
(2019.11.29.)
「용서해 주겠네.. 빌포르 군. 실은, 보나파르트 당 사람들은 우리 같은 신념도 없거니와 또 우리와 같은 감격도 헌신도 없다고 했다네」
「아, 그러셨군요, 부인. 하지만 그 사라들은 그런 모든 것을 대신할 만한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요. 열광적이라는 점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서양의 마호메트죠. 신분이 낮지만 야심이 대단한 사람들에게는, 나폴레옹은 입법자나 군주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전형, 다시 말하면 평화의 전형입니다.」
「평화?」 후작 부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나폴레옹이 평화의 전형이라? 그럼, 로베스피에르는 뭔가? 마치 자네는 로베스피에르의 자리를 뺏어다가 그 코르시카 녀석(나폴레옹)에게 주기라도 할 듯이 뵈는구려. 왕위를 빼앗은 녀석, 이렇게 말하는 걸로 그 인간에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말일세」
「아닙니다. 부인」 빌포르가 말했다. 「저는 사람들을 각기 자기 발판 위에 올려놓아 본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이15세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갔고, 나폴레옹은 방동 광장에서 자기 기념비 위에 올라간 겁니다. 한쪽이 평등을 낮추어놓았는」가 하편, 한쪽에선 평등을 높여놓은 셈이지요. 한쪽에서 왕을 단두대에까지 끌고 간 데 반해서, 또 한쪽에서는 평민을 왕과 똑같은 위치로 끌어올린 겁니다. 그건 말하자면」빌포르는 웃으면서 덧붙였다.「둘 다 욕된 혁명가들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또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흔히〈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날-옮긴이)과 1814년 4월 4일(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은퇴를 승낙한 날- 옮긴 이)이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날이며, 왕당(王黨)과 질서의 친구들에겐 축복할 수 없는 날임에 틀림없단 말씀입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이젠 영원히 다시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그런데도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부인, 모든 점에서 나폴레옹의 절반밖에 안 되는 크롬웰도 자기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P.98)
그녀의 그 상냥한 눈길과 애원하는 듯한 태도가 거북스러워서, 그는 메르세데스를 밀치고, 마치 자기에게 닥쳐 온 그 고통을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는 듯이 문을 광 닫아버렸다.
그러나 고통이란 그렇게 해서 몰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치명상과 마찬가지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자기 몸에 달고 다니게 마련이다. 빌포르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번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는 흐느낌과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의 병든 가슴속에서는 치명적인 상처의 첫 싹이 돋아났다. 그가 자기의 야심 때문에 회생시킨 청년, 죄 지은 자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죄를 뒤집어씌운 그 죄 없는 청년이, 지금 창백한 얼굴로 위협하는 듯이 역시 창백한 그의 약혼자의 손을 잡고 지금, 빌포르의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청년의 뒤로는 양심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의 운명적인 비극에 나오는, 미친 듯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의 마음속의 병자를 펄펄 뛰게 하는 그런 것은 아 니었다. 그것은 둔하면서도 괴로운 울림으로 때때로 가슴을 두드려 지난날의 행위를 생각나게 하며, 그 회상으로 마음을 멍들게 하고 살을 째는 듯한 아픔을 점점 더 심하게 하여, 결국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듯한 그러한 괴로움이었다.
이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다소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미, 그는 여러 번 재판관 대 피고 사이의 격투라는 기분만으로 많은 피고들에게 사형을 구형해 왔다. 그리고 그가 그 무서운 웅변으로 법관들이나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죄수들을 처형했건만, 그 피고들은 그의 얼굴에 아무런 그늘 하나 남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 피고들은 사실상 죄가 있었기 때문이고, 아니면 적으나마 빌포르에게는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전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이제부터 행복 해지려는 한 죄 없는 사람에게 종신 금고형을 내려, 그의 자유를 끝장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복까지도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재판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이러한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은 둔한 울림이, 여태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울림이, 가슴속에서 울려나와, 무엇인가 막연한 불안으로 가슴이 꽉차 왔다. 이와 같이 상처를 입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한 고통이 닥쳐오면, 상처가 다시 아물기도 전에 입을 벌리고, 피가 맺힌 상처 위에 손가락만 대도 손이 떨리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빌포르가 입은 상처란 절대로 아물 수 없는 상처였다. 설사 아문다 하더라되 그것은 먼저보다도 더 피를 홀리고 더 고통스럽게 다시 벌어져야만 할 상처였다.
(P.156)
왕은 지극히 철학적인 사람이어서 정치 세계에는 살인 같은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치 세계에선. 너도 나만큼 알고 있겠지만,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문제가 되는 거야. 감정이 아니라 이해 관계야. 정치 세계에선 사람은 죽이지 않아. 다만 장해물만을 제거하지. 그뿐이야.
(P.195)
그러나 오늘날의 왕 들은, 가능한 일에만 줄을 긋고 그 경계선 안에서만 매사를 유지할 생각으로 대담한 의지 따위는 이미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가 내리는 명령을 듣는 귀와 자기의 행동을 살펴보는 눈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신성(神性)에 의한 우월함도 느끼고 있지 않다. 왕관을 쓴 인간, 이것이 전부일 뿐이다. 옛날에 그들은 스스로를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믿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위엄 있는 천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비판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왕들이 인간들의 손이 쉽사리 미치는 곳에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다. 전제 정부는 감옥이나 고문의 결과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일을 꺼려왔다. 그래서 심문의 희생자로서, 뼈가 부러지고 상처도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을 나오는 이는 그 예가 거의 없었다. 광기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적인 고문 끝에 감옥 안의 진흙 구령 속에서 생겨난 광기라는 이 상처도 거의 언제나 처음 발생했던 장소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마는 것 이었다. 설혹 밖으로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어던가 컴컴한 병원 속에 묻혀버려 의사들조차 지쳐 있는 간수의 손에서 넘겨진 그 이상한 잔해 속에서 그 본래의 인간이나 생각은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P.235)
그는 자기가 이렇게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은 신의 복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들의 증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누군지 모를 그러한 인간들에게 불타오르는 상상 속에 떠오르는 모든 형벌을 가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라 할지라도 그런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고통 뒤에는 죽음이 온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는 안식은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안식과 비슷한 무감각한 상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에게 죽음을 준다는 것은, 평안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잔인하게 벌을 주려면 죽음 이외의 다른 수단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에 이르는 동안 그는 저 침울하고 움직일 줄 모르는 자살이라는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불행의 내리막길에서 이러한 암담한 생각에 발을 멈추는 사람은 진실로 불행한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저 죽음의 바다인 것이다. 맑은 물결이 마치 창공과도 같이 활짝 펼쳐져 있으나, 그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점점 발이 끈끈한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어, 결국은 그리로 빨려 들어가다가, 마지막엔 아예 삼켜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붙들리고 나면 신의 구원이 없는 한 만사는 끝장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죽음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P.244)
「여기」 신부는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법률상의 자명한 이치가 있어. 그건 아까 내가 한 말하고 꼭 들어맞는 것인데, 날 때부터 아주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의 본성은 원래 죄를 싫어한다는 것일세. 하지만 문명은 우리 인간에게 욕망을 주고, 죄악을 주고, 후천적 욕심을 주며, 그 결과 종종 우리의 선량한 본능을 짓누르고, 우리를 악의 길로 이끌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런 격언이 나은 거지. <범인을 찾으려거든 우선 그 범죄로 이득을 볼 사람을 찾으라>는말이 그거야. 자네가 없으면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지?」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