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신화읽는 시간
구본형 / 와이즈베리 / 336쪽
(2013. 11. 28.)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 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성장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신화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독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신화라는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만일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전혀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신화는 원시적 인간이 꾸며낸 어리석은 이야기를 지나지 기초적인 독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 독법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들고 , 어두운 내면의 탐사를 시작해보자.
(p. 11)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우주적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나에 체해 나를 보고 싶지 않을 때, 사람을 소화할 수 없어 구토가 일어날 때, 가까운 친구에 대한 염증으로 심장이 죄어올 때, 더 이상 사람의 육욕의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을 때, 인간의 내밀한 본질에 단박 다가가 그 찬란한 갈등을 보고 싶을 때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야생의 사유를 필요로 한다.
(p. 18)
 
 
  인간은 기존의 자아를 버리면 어떤 사람으로도 변신하여 살아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경영은 연출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버려 새로운 자아에 이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약하여 자신이 그리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볼 수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 재창조되어 다양하게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의 현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p. 58)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논란이 많은 책도 드물다. 인간의 속을 까뒤집어놓은 위대한 책이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썼으나 성공하지 못한 쓰레기 아첨물에 불과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군주를 위해 썼지만 군주를 위한 조언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군주론』은 그래서 거꾸로 읽어야 한다. 다스리기 위해서 읽기보다는 나를 다스리려는 자들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읽을 때 훨씬 재미있다. 세상에는 『군주론』속의 조언대로 머리를 굴리고 폭력과 잔혹을 통치의 도구와 연장으로 써대는 인물들이 제법 많다. 권력이 조금 있고, 돈이 제법 있는 사람들은 늘 무자비한 폭력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멱살을 거머쥐고 알아서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얄미운 자들의 입을 거세게 때려주는 쾌감을 근육 속에 감춰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쉽게 당하기만 하는 대중 속의 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p. 226)

 

 

  신화는 인류라는 집단이 꾼 꿈을 다룬다. 신화를 해석하면 인간의 꿈, 즉 집단의 무의식에 접근하게 된다. 경영이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이해하게 된다면 가장 근본적인 동기부여 방식을 찾아내게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영웅의 삶으로 창조해가는 변화의 여정에 개인들이 스스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 진화된 동기부여 방식이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두려운 모험에 뛰어들 수 있도록 유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p. 317)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자신의 인생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고뇌하는 동물이다. 짐승처럼 살 수도 있고 신처럼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개념 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계에서 온다"라고 말한다. 즉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체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p. 325)

 

 

  우리 안에 신이 있다. 신은 우리 안에 자신을 숨겨두었다. 인간은 신이 선물한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담고 태어난 모순 덩어리지만, 영웅적인 내면 여정을 통해갈등과 충돌을 대통합하여 위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다. 그 이야기는 삶이라는 잉크로 쓰여진다. 삶만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위대한 손이다.
(p. 3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2)
천명관 / 예담 / 412쪽 / 374쪽
(2013. 11. 21.)

 

 


  꿈은 깨어지게 마련이고 희망은 부서지게 마련이다. 빠르고 강한 주먹과 찰고무처럼 질긴 근육, 땅을 박차 오르며 찬연히 타오르는 싱싱한 육체, 절댁강자의 여유와 자신감! 그것은 불완전한 실존을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지만 초월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의 절망과 육체의 좌절을 경험한다. 심장은 터질 듯 고통스럽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며 두 다리는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육체는 두부보다 무르며 유리보다도 부서지기 쉽다는 것, 또한 그 안에 깃든 정신은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불안한 영혼은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든다.
(p. 9)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소룡의 말이다. 그는 또 말했다. 삶의 의미는 그저 사는 것일 뿐이라고.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어디가 됐든 부서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인생일 터인데 삼촌의 경우도 바로 그랬다. 평생 주먹 한 번 시원하게 뻗어보지 못하고 끝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생의 구석진 곳을 떠돌며 꾸역꾸역 살아남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비록 짝퉁으로 출발했으나 긴 세월을 거쳐 스스로 인생유전의 고유한 스토리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표절과 모방, 추종과 이미테이션, 나중에 태어난 자 에피고넨에 대한 이야기이며 끝내 저 높은 곳에 이르지 못했던 한 짝퉁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p. 10)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게 매혹되었으며 우리는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 종태와 나는 홍콩에 간 삼촌을 생각하며 카세트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쿵푸 파이팅>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이소룡이 죽은 이듬해 자메이카 출신의 남자가수 칼 더글라스가 발표한 노래로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할 만큼 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었다.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오오오호~ 하며 목청을 돋우다 갑자기 폭포수가 쏟아져내리듯 '에브리바디 워스 쿵푸 파이팅'하며 노래가 흘려나오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쾌감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p. 246)

 

 

  살다보면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다들 서로 아는 농담을 주고 받는데 나만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기분, 그래서 왠지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다들 주변의 열화와 같은 응원을 등에 업고 홈경기를 치르는 데 나 홀로 야유와 적대감에 둘러싸여 어웨이경기를 치르는 기분, 다들 당구장 1번 다이에 모여서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신나게 죽빵을 치는데 나 혼자 구석자리에서 사구를 치다 쫑이 난 기분, 그런데 당구장 알바가 쌩 까고 커피도 안 갖다주는 기분, 개새끼! 분명히 눈도 마주쳤는데...... 하는 기분,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나를 따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게 아닐까 하는 그런 더러운 기분 말이다.
(p. 291)

================================

 

 

  꿈이 현실이 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야.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너무 간절하지만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별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거든. 그러니까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 정말 창피한 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때 내가 원한 건 네가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거였여. 그래서 너를 홍콩에 보내줬던 거야.
(p. 107)

 

 

  너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니?
  그때까지 삼촌은 정말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삼촌은 그때까지도 이소룡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괴물 같은 현실에 부딪쳐 꿈은 산산조각 나고 싶은 회한에 발목이 잡혀 늘 바닥을 알 수 없는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삼촌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서자의 역할이든 중국집 배달부의 역할이든, 아니면 깡패 역할이든 단독 쇼트 하나 못 받는 단역 배우의 역할이든 삼촌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무협의 세계와는 달랐다. 세상은 너무나 교묘하고 복잡해 무엇이 정의이고 누가 악당인지 알 수 없었고 삼촌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언제나 서너 발자국 귀에서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처지였다. 정처 없이 떠돌던 자신을 받아준 장 관장과 다른 액션배우들에게 진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한때의 기분이었을 뿐, 현실은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무명 배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몸을 다쳐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암울하기만 했다. 그날 밤, 삼촌은 마 사장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아 눈썹에 안개가 허옇게 내려앉을때까지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p. 112)

 

 

  당장 배가 고파 죽는한이 있더라도 강아지를 사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견센터 앞을 기웃거렸지만 강아지를 고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내가 콕 짚어 어떤 종류의 개를 사오라고 정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내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니 내 손으로 직접 골라야 했다. 내가 주는 선물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들 알 것이다. 어쩌다 후한 인심을 쓰듯 넘겨주는 그런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를! 보나마가 개를 잘못 사왔느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니 없는 거니, 잔소리를 해댈 게 뻔했다. 게다가 애완견의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p. 330)

=========================

 

 

  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는 걸까요? 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 잡았다 놓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탄 난 과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운명에 굴복하는 이야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 암과 치질, 설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이쓸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 아직도 부자가 될 희망에 들떠 있는 이들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왜 누군가는 그 구원없는 실패담을 읽는 걸까요? 그것은 불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가학취미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하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구원의 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말입니다. 만일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p. 3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플라톤 / 천병희 / 숲 / 348쪽
(2013. 11. 18.)

 

 

 

  플라톤의 저술들이 2천 년 넘는 세월을 겪고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심오하고 체계적인 사상 덕분이겠지만, 이런 사상을 극적인 상황 설정, 등장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소크라테스의 인간미 넘치는 아이러니 등으로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게 독자들에게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스 최고의 산문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플라톤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나는 난해한 직역과 지나친 의역은 피하고, 원전의 의미를 되도록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난삽한 문장을 읽기 좋은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나은 이해를 위해 플라톤의 번역을 끊임없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p. 9)

 

 

<소크라테스의 변론>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자신에게 제기된 고발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연현상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고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는 자신에 대한 초기의 고발과, 나라에서 섬기는 신들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며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후기의 고발을 구분한다.
  소크라테스는 초기의 고발에 대해 자기는 소피스트도 아니고 자연철학자도 아니며, 가지의 유일한 지식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그런 사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지혜롭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무지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이들의 미움을 산 것이 화근이 되어 고발당했다는 것이다.
(p. 14)

 

 

  여러분, 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열함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죽음보다 비열함이 더 발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느리고 연로해서 둘 중 더 느린 죽음에 따라잡혔지만, 내 고소인들은 영리하고 민첩해서 둘 중 더 빠른 것, 즉 사악함에 따라잡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지만, 내 고소인들은 진리에 의해 사악하고 불의한 자들이라는 판결을 받고 떠날 것입니다.
(p. 63)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자신감을 갖고 죽음을 맞아야 하며, 착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신들께서는 착한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이 한가지 진리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 내가 죽어 노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께서 보내신 신호가 나를 어디에서도 말리지 않았던 것이며, 나도 내게 유죄 투표한 이들과 나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전혀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p. 68)

 

 

<크리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만약 아테나이의 국법이 ‘우리는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교욱받게 헤주었거늘 네가 우리를 뒤엎으려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닌가?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는 진작 이 나라를 떠났어야지, 누릴 것 다 누리고는 이제 와서 이 나라에서 허둥지둥 도주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며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네가 외국으로 망명해서 얻을 게 무엇인가? 우리는 네가 목숨과 자식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정당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크리톤이 국벙이 그렇게 묻는다면 자기도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고 말한다.
(p. 69)

 

 

<파이돈>

 

엘리스 출신으로 아테나이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해방되어 소크라테스의 헌신적인 제자가 된 파이돈이, 스승이 죽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동부 플레이우스 시에 살던 에케크라테스를 만나, 소크라테스가 생애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어떻게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지 들려준다. 몸은 필멸이지만 혼은 불멸이라는 혼불멸론,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이 대화편의 핵심 내용을 이룬다. 이어서 몸에서 해방된 혼이 저승에 가서 어떻게 재판받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것이다. 이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고 침착하게 독배를 받아 마시고 죽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p. 102)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 - 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니까요 -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클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같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 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
  그분께서는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으나, 잠시 뒤 몸을 부르르 떠셨소. 그래서 그 사람이 그분을 가린 것을 벗기자 구분의 두 눈이 멈추어 있었소. 그래서 그것을 본 크리톤이 그분께서 입을 다물게 해주고는 두 눈을 감겨드렸소.
  에케크라테스, 우리 친구는 그렇게 최후를 맞으셨소. 그분께서는 우리가 겪어본 우리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p. 234)

 

 

<향연>

 

  기원전 384년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화편은 비극작가 아가톤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의 비극 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베푼 술잔치에서 여러 사람이 에로스에 관해 피력한 견해를 기록한 것이다. 이 대화편은 당시 너무 어려서 그 술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팔레론 출신 아폴로도로스가 술잔치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데모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파이드로스는 신화적인 관점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소피스트의 관점에서, 에뤽시마코스는 의사의 관점에서, 아가톤은 시인의 관점에서 에로스를 짤막하게 찬미한다.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이아 출신 예언녀 디오티마한테서 더 높은 경지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면서, 성애로 표현되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혼이 시인이나 입법자처럼 아름다움이나 지혜를 낳고 싶어 하는 지적이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의해서는 하나의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운 몸 전체로,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 사랑을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한다.
(p. 2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비극 걸작선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 천병희 / 숲 / 440쪽
(2013. 11. 14.)

 

 

 

  위대한 창조자였던 이들 3대 비극작가(아이스퀼로스(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에 힘입어 그리스 정신을 가장 위대하게 구현해냈으며,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리스 비극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와 노래, 춤과 웅변술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한데 묶은 종합예술로서 비극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거니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 작품에 소재와 주제를 제공하는 살아 있는 이슈로 우리 곁에 있다.
(p. 24)

 

 

  『아가멤논』에서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트로이아에서 10년 만에 귀향하던 날 아래 크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욕조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아가멤논은 왜 그런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가. 이것이 아스퀼로스가 이 작품에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다.
  아내는 남편이 10년 전 1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폭풍을 달래기 위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녀의 정부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데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아이스퀼로스의 주요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p. 28)

 

  『오이디푸스왕은 소포클레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극찬하고 있다.
  이 비극은 인간의 인식 능력, 즉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스스로 저지른 행위들의 과정과 의미를 깨닫게 되며,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응하는지를 다룬다.
(p. 161)

 

『메데이아의 소재는 이아손과 메데이아 신화의 후반에서 취재한 것이다. 이아손이 메데이아 공주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흑해 동안에서 황금 양모피를 구해 왔는데도 펠리아스가 약속을 어기고 왕위를 내주지 않자, 메데이아는 속임수로 펠리아스를 죽인다. 추방당한 그들은 코린토스로 옮겨 와 여러 해 동안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이민족 출신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야심가 이아손은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며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p. 304)

 

 

일설에 따르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는 아울리스 항에서 순풍을 얻기 위해 그리스군에 의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졌지만, 마지막 순간 아르테미스가 사슴을 대신 넣어 주고 그녀를 구출하여 지금의 크림 반도에 살던 타우로이족의 나라도 데려가 그곳에 있던 그녀의 신전에서 여사제로 봉사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인을 여신께 제물로 바치는 그곳의 관습에 따라 제물을 축성하는 일을 맡아보던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제물로 바친 그리스인들을 늘 원망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p. 3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테『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 안티쿠스 / 624쪽
(2013. 11. 09.)

 

 

 

 『신곡』 14세기에 단테가 그의 모국어인 이탈리아 어로 쓴 시로 된 작품이다.

흔히 산문으로 쓰여진 고전들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혼자서

『신곡』을 읽으며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인것 같다.

그래서 신곡과 함께 읽으면 아주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으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단테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인 『신곡』의 각 주제별 자세한 설명을 마치 강의를 직접 듣는것 처럼 느껴볼 수 있으며, 『신곡』에 한 강의 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고전의 의미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들 그리고 단테의 『신곡』이전의 고전 작품들과 『신곡』과의 연결고리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서 고전을 읽는 독작들에게 아주 좋은 지침서의 역할을 또한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은 1997년 3월 29일부터 1998년 7월 25일까지 약 1년 6개월에 걸쳐, 원칙적으로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행한 나의 단테 『신곡』 강의(총15회)와 강의 후의 질의응답을 기록한 것이다.
(p. 7)

 

 

  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인류 고전의 하나인 단테의 텍스트에 즉해서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배우라고 권고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선구자가 시대의 억압에 어떻게 대항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보다 잘 살고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추방당한 삶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신에게 충실했던 한 인간이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 바로 『신곡』이다.
(p. 8)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첫째로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물론 단테'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테'에게'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테를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고전 '에서' 배우는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다.
(p. 14)

 

 

  단테 『신곡』 연구의 두 번째 의미는 휴머니즘을 체득하는 데 있다.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주의' 혹은 '인간애'라고 옮기는데,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고 '휴머니즘'은 '휴먼인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휴먼'은 라틴 어로 '후마누스'이며 '후마누스'는 물질인 물이나 동물인 개와는 달리 인간에게 고유한 것, 즉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p. 16)

 

 

  문화에는 '창조하는 문화'와 '소산으로서의 문화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가 단테를 읽는 경우 이미 완성되어 있는 문화재인 『신곡』을 공부하면서 그것을 창조한 단테의 정신에 도달해야 한다. 이는 결국 문화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에서 배운다는 것이고, 고전'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고전'에서' 배운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테의 책을 공부하면서 단테의 책에서 배워 아무리 작은 불꽃이라도 자기 안에서 창조적인 문화의 불을 밝혀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전으로서의 단테를 읽어 그 내용을 익히는 것만이 아니라, 단테의 창조 정신까지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p. 25)

 

 

  『신곡』은 라틴 어가 공용어이며 문화적 세계어였던 14세기에 단테가 그의 모국어인 이탈리아 어로 쓴 시라는 점에서도 문화역사상 매우 중요하다. 13세기까지 문화적으로 중요한 문서는 모두 라틴 어로 쓰였다. 이는 라틴어의 문서의 문화적 의의의 긍정적 측면이다. 이미 9세기 무렵부터 각 지방에서 쓰이던 라틴 어가 붕괴되고 지방어의 문화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의문시 된다. 요컨대, 추상적 명제에는 지극히 적합해 보이는 라틴 어도 다른 지방의 실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개인적 감개나 파토스를 표상하는 데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직접성을 비교할 때 부정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p. 161)

 

 

  이 책을 통해 『신곡』을 접하는 만은 분들은 어쨌든 이 책 속에서 『신곡』을 띄엄뜨엄 읽어 가면서 우선은 『신곡』에서 조금이라도 '사실'이 아니라, '시실'을 배워 보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 달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가와 함께 베르질리오를 따라 지옥순례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p. 166)

 

 

  단테의 『신곡』은 천국을 위해 쓴 책이라는 것을, 즉 우리는 단테와 함께 고전문학적 교양으로 지옥을, 오성과 상상력으로 연옥을 편력한 후, 그제야 마침내 빛으로 충만한 천국에서 이성적 정신이 신의 지복으로 초대받는 기쁨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그리고 『신곡』은 그런 기쁨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상에 있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과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그리고 천국의 지복을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성취되는, 천상과 지상의 사랑의 교류 노래인 것이다.
이을테면 지옥편은 문학, 연옥편은 철학, 그리고 천국편은 신학의 연습의 장이라 말할 수 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
(p. 6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