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삼촌 브루스 리 (1,2)
천명관 / 예담 / 412쪽 / 374쪽
(2013. 11. 21.)
꿈은 깨어지게 마련이고 희망은 부서지게 마련이다. 빠르고 강한 주먹과 찰고무처럼 질긴 근육, 땅을 박차 오르며 찬연히 타오르는 싱싱한 육체, 절댁강자의 여유와 자신감! 그것은 불완전한 실존을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지만 초월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의 절망과 육체의 좌절을 경험한다. 심장은 터질 듯 고통스럽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며 두 다리는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육체는 두부보다 무르며 유리보다도 부서지기 쉽다는 것, 또한 그 안에 깃든 정신은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불안한 영혼은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든다.
(p. 9)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소룡의 말이다. 그는 또 말했다. 삶의 의미는 그저 사는 것일 뿐이라고.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어디가 됐든 부서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인생일 터인데 삼촌의 경우도 바로 그랬다. 평생 주먹 한 번 시원하게 뻗어보지 못하고 끝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생의 구석진 곳을 떠돌며 꾸역꾸역 살아남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비록 짝퉁으로 출발했으나 긴 세월을 거쳐 스스로 인생유전의 고유한 스토리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표절과 모방, 추종과 이미테이션, 나중에 태어난 자 에피고넨에 대한 이야기이며 끝내 저 높은 곳에 이르지 못했던 한 짝퉁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p. 10)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게 매혹되었으며 우리는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 종태와 나는 홍콩에 간 삼촌을 생각하며 카세트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쿵푸 파이팅>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이소룡이 죽은 이듬해 자메이카 출신의 남자가수 칼 더글라스가 발표한 노래로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할 만큼 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었다.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오오오호~ 하며 목청을 돋우다 갑자기 폭포수가 쏟아져내리듯 '에브리바디 워스 쿵푸 파이팅'하며 노래가 흘려나오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쾌감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p. 246)
살다보면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다들 서로 아는 농담을 주고 받는데 나만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기분, 그래서 왠지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다들 주변의 열화와 같은 응원을 등에 업고 홈경기를 치르는 데 나 홀로 야유와 적대감에 둘러싸여 어웨이경기를 치르는 기분, 다들 당구장 1번 다이에 모여서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신나게 죽빵을 치는데 나 혼자 구석자리에서 사구를 치다 쫑이 난 기분, 그런데 당구장 알바가 쌩 까고 커피도 안 갖다주는 기분, 개새끼! 분명히 눈도 마주쳤는데...... 하는 기분,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나를 따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게 아닐까 하는 그런 더러운 기분 말이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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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현실이 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야.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너무 간절하지만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별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거든. 그러니까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 정말 창피한 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때 내가 원한 건 네가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거였여. 그래서 너를 홍콩에 보내줬던 거야.
(p. 107)
너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니?
그때까지 삼촌은 정말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삼촌은 그때까지도 이소룡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괴물 같은 현실에 부딪쳐 꿈은 산산조각 나고 싶은 회한에 발목이 잡혀 늘 바닥을 알 수 없는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삼촌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서자의 역할이든 중국집 배달부의 역할이든, 아니면 깡패 역할이든 단독 쇼트 하나 못 받는 단역 배우의 역할이든 삼촌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무협의 세계와는 달랐다. 세상은 너무나 교묘하고 복잡해 무엇이 정의이고 누가 악당인지 알 수 없었고 삼촌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언제나 서너 발자국 귀에서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처지였다. 정처 없이 떠돌던 자신을 받아준 장 관장과 다른 액션배우들에게 진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한때의 기분이었을 뿐, 현실은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무명 배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몸을 다쳐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암울하기만 했다. 그날 밤, 삼촌은 마 사장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아 눈썹에 안개가 허옇게 내려앉을때까지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p. 112)
당장 배가 고파 죽는한이 있더라도 강아지를 사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견센터 앞을 기웃거렸지만 강아지를 고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내가 콕 짚어 어떤 종류의 개를 사오라고 정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내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니 내 손으로 직접 골라야 했다. 내가 주는 선물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들 알 것이다. 어쩌다 후한 인심을 쓰듯 넘겨주는 그런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를! 보나마가 개를 잘못 사왔느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니 없는 거니, 잔소리를 해댈 게 뻔했다. 게다가 애완견의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p.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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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는 걸까요? 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 잡았다 놓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탄 난 과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운명에 굴복하는 이야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 암과 치질, 설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이쓸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 아직도 부자가 될 희망에 들떠 있는 이들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왜 누군가는 그 구원없는 실패담을 읽는 걸까요? 그것은 불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가학취미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하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구원의 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말입니다. 만일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p.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