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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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이 편지 속에서 나는 너의 것이야. 가든의 표적도, 네 임무의 일부도 아닌, 오로지, 너의 것.

 

 

언제인지 모를 먼 미래

가든과 에이전시로 나뉜 그들은 시간을 차기하기 위한 시간 전쟁을 벌인다.

가든의 블루

에이전시의 레드

그들은 각각의 최고 요원이다.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그들은 전쟁터 속에서 서로를 감지한다.

절대로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그들은 시간의 타래 속에 서로에게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런 레드의 뒤를 추적자가 바짝 뒤쫓는다.

 

 



 

 

 

레드의 편지는 빨강으로

블루의 편지는 파랑으로

서로의 이름과 같은 잉크 빛으로 쓰인 편지들을 읽노라면

내 자신의 무개성과 무지와 무감성과 마주치게 된다.

 

레드는 잠을 거의 자지 않지만 그래도 잘 때면 어둠 속에 꼼짝 않고 누워 두 눈을 감고서, 눈앞에 떠오르는 청금석을 보고, 혀끝에 느껴지는 붓꽃 꽃잎과 얼음을 맛보고, 귓가에서 지저귀는 파랑 어치의 노래를 듣는다. 레드는 그렇게 '파랑'을 수집하여 간직한다.

 

 

상대가 서로의 조직에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흔적을 없애는 레드와 블루의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간절함을 부여한다.

절대 만날 수 없는 그들

고전적인 편지를 온갖 장치로 교모하게 숨겨가며 각자에게 남기는 방식은 그 어떤 지구상의 편지보다도 간절하고 절절하다.

 

그녀들로 이루어진 그녀들의 세상.

자신의 손 아래서 시간의 타래가 짜인다는 걸 깨달은 블루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든의 승리.

레드를 꼬여내기 위한 블루의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에이전시는 역으로 레드를 이용해 블루를 잡으려 한다.

 

내가 사는 이 골짜기를 통째로 삼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망을 실로 자아서 너라는 바늘의 눈에 끼우고, 내 살갗 아래 어딘가 꿰매어 감춰 뒀어. 너에게 쓰는 다음번 답장을 그 실로 한 땀씩 수놓으려고.

 

나는 모든 시인이 될 거야. 그들을 다 죽이고 한 명 한 명의 자리를 차례로 차지할 거야. 그래서 모든 시간 가닥에서 사랑에 관한 시가 쓰일 때마다 모두 너에게 바치는 시가 될 거야.

 

 

이 이야기에 실려 있는 방대한 인용들은 주석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을 읽어도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은유와 비유들 사이로 흐르는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다 주워 담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껏 이토록 서로를 갈망하는 연서를 읽은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동안 읽었던 소설 속 연애편지들은 이제 아무리 잘 썼다고 평가되는 편지라도 블루와 레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끝도 없이 되풀이될 거 같은 그들의 편지에도 마지막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서로 안에 있었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이야기를 다 읽고 제목을 다시 음미해본다.

시간 전쟁을 하고 있는 자들은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한계치를 뛰어넘었기에.

 

이 이야기는 앞으로의 많은 이야기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너무나 색달라서 모든 감각을 깨워서 읽어내야 했다.

마치 레드와 블루의 편지를 입수해서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유추해내야 하는 추적자가 된 것처럼.

 

모든 소설의 줄기에서

완전히 다른 줄기를 생성해낸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블루의 손가락 사이에서 레드만 알아볼 수 있도록 꿰어진 새로운 시간의 타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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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2 - 단골손님을 찾습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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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어른들의 판타지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왔다.

1년간 열심히 일한 페니는 꿈 산업 종사자로 인정받아 '컴퍼니 구역'에도 갈 수 있게 된다.

기대에 부푼 페니 앞에 달러구트는 이번에도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과제를 준다.

다름 아닌 792번 손님.

이 손님은 오래전 "왜 저에게서 꿈까지 뺏어가려고 하시나요?" 라는 민원을 넣고는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은 손님이다.

 

게다가 달러구트는 25년 만에 '파자마 파티'를 열기로 하는데 한때 단골이었던 손님들을 다시 오게 하기 위함이다.

언제나 달러구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일들을 계획하는데

그 일들이 저마다 의미를 가지기에 처음에는 갸우뚱하다가도 나중에야 그 깊은 뜻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파자마 파티도 내심 기대를 하게 한다.

 

 

"빨래는 저렇게 푹 젖어 있다가도 금세 또 마르곤 하지요. 우리도 온갖 기분에 젖어 있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괜찮아지곤 하지요. 손님도 잠깐 무기력한 기분에 젖어 있는 것뿐입니다. 물에 젖은 건 그냥 말리면 그만 아닐까요?

 

 

녹털루카 세탁소에서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녹털루카들

무기력에 빠진 옛 단골손님에게 파티 초대장을 건네는 달러구트.

 

가끔 나도 모르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런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마다 나도 녹털루카 세탁소에서 나의 무기력증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버리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꿈을 사는 사람들의 꿈을 엿보며 나도 잠시 그들의 꿈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느껴보게 된다.

나는 달러구트가 꿈을 소개하는 방식이 맘에 든다.

그리고 그런 달러구트의 방법을 알게 모르게 습득하고 깨달아가는 페니가 좋다.

 

한국형 판타지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 이미예 작가의 꿈 이야기는 어디까지 갈까?

3탄이 나올 거 같은 분위기라 살짝 기대를 더 해 본다.

페니가 일하는 시간이 늘어 감에 따라 이 이야기에는 더 깊은 감정이 담길 거 같아서.

페니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약간 괴짜인 달러구트와 잘 어울린다.

나중에 페니도 멋진 꿈을 만들어 내는 제작자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페니가 제작한 꿈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따듯한 기운을 남겨줄 거 같다.

페니와 막심의 러브라인도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맨날 남의 나라 판타지만 보다가

우리의 판타지를 보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더 포근해진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달콤하고 다정한 꿈을 꾸게 만드는 거 같다.

나도 왠지 오늘 밤은 기분 좋은 꿈을 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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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마케팅 - 인간의 소비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매트 존슨.프린스 구먼 지음, 홍경탁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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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에 대한 모형을 구축한다.

 

 

내가 느끼고, 보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은 나의 뇌가 구축한 모형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케팅은 이러한 뇌의 모형을 구축하는데 온갖 힘을 다한다.

그리하여 소비자인 나는 마케팅에 의해 뇌가 구축한 모형을 나의 선택이라 믿는다.

 

언젠가 이 온라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을 때 내가 전날 클릭했던 사이트의 광고가 내 눈에 자꾸 띄는 걸 느꼈다.

웃긴 건 동생이 운영하던 사이트가 메인 광고처럼 포털에 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던 해프닝이 있다.

 

이제는 안다.

그것이 나의 성향을 파악했다고 생각한 알고리즘이 만든 것이라는걸.

 

내가 소신껏 잘 생각하고 판단해서 선택한 물건이 실상은 마케팅이 뇌에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한 번 쓱~ 읽어 보면 좋은 책 같다.

 

뇌과학 마케팅은 신경과학자 매트 존슨과 마케터 프린스 구먼의 공저로서

소비심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재밌는 실험들과 실례를 들어서 우리의 뇌가 어떠한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브랜드를 감췄을 때는 펩시가 코카콜라보다 '맛' 면에서는 더 우위이지만

브랜드를 노출했을 때는 코카콜라가 더 맛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실험에서 우리 뇌 속에 뿌리박힌 코카콜라의 거부할 수 없는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업들이 그렇게 수십억을 쏟아붓는가 보다.

 

최근에 유튜브가 대세인데 유튜브의 알고리즘 또한 관심사와 비슷한 콘텐츠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서 다양성을 뺏어가고 있음이다.

미래는 빅데이터의 알고리즘 위에서 인간의 뇌가 재창조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교묘한 마케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빼앗긴 줄도 모르고 스스로 선택한 거라 믿는 인간은 그렇게 조종당할 것이다.

 

뇌과학 마케팅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서 재밌게 읽힌다.

이런 분야의 책에 별 취미가 없는 사람들도 쓱~ 읽어 볼 수 있다.

 

뇌과학 마케팅을 읽고 나면 의식적으로 나 자신의 소비패턴을 확인해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결정인지 아니면 마케팅이 심어 둔 환상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21세기북스의 협찬을 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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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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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를 즐겁게 읽으며 번역가라면 이런 마음으로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던 그런 번역가를 만난 느낌을 가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번역가분은 팔색조다.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이고 소설가다.

 

비채에서 출간된 <로드킬>은 6편의 중.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SF, 판타지로 이루어진 그의 글들은 독자들에게 그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희귀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편의와 힘을 위해서 자궁을 버리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줄기세포를 이식받고, 장기를 대체하고, 수명 연장 약을 투여받았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새롭게 진화한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달랐다.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오래된 종교적 도덕적 신념 때문에 그런 선택을 거부했거나, 또는 변방의 오지에서 과학적 기술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자연 친화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

 

 

자연 친화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소녀들은 한 곳에 갇혀서 생활한다.

'보호' 받고 있는 소녀들은 '자궁'을 가지고 있다.

그 소녀들은 정말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로드킬>은 끝없이 탈출을 감행했던 소녀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들의 성공담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약하고 갓 선택받은 여름을 데리고 '나'는 보호소를 탈출한다.

자궁을 가진 소녀들은 탈출에 성공할까?

보호소를 떠난 소녀들은 진화된 여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진화되지 못한 채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진화된 여성들이 사는 세상에도 강간과 폭력은 존재하고 남자들의 횡포는 계속된다.

그것이 나를 괴롭힌다.

여성에게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 같아서.

 

처음으로, 라비는 자신의 고독이 두렵지 않았다. 고독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 라비는 처음 느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부족 최후의 주술사가 된 <라비>

할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라비의 이야기는 한 나무에 의해 서술된다.

독을 품고 있는 자주콩.

그들은 오랜 시간 이 부족 주술사들의 비밀 병기였다.

이제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이는 라비뿐.

개화된 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었다.

그리고 라비는 그 '돈'을 인류학자에게 자주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 대가로 받아들고 문명세계로 도망친다.

라비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뉴스 속보에 전국 미세먼지 평균 농도가 몇으로 뜨든 간에 이 일대의 공기질은 언제나 '최고 좋음'을 유지한다. 저 멀리 알프스에 빙하가 다 녹아 사라지는 날에도 이곳의 날씨는 언제나 쾌청할 것이다.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한평생 한곳에서 살아온 경숙.

자신의 낡은 도시에 공기청정탑이 세워지면서 그곳은 가장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로 묘하게 갈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걸리는 '강시병'은 이제 가진 자와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번져간다.

오로지 '전염병'만이 부와 가난을 가리지 않는다.

폐쇄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마루아트센터의 굴뚝에 그려진 파란 새 마크.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세가 될 '강시병' 환자들을 상징하는 새가 아닐까...

 

나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비현실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신뢰할 수 있고 무엇은 믿어선 안 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르겠다.

 

 

<외시경>으로 보이는 옆집 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누구일까?

남편의 또 다른 여자?

아니면 과거의 자신?

이 단편에서 느껴지는 과도한 폭력의 기운이 더운 여름을 더 뜨겁게 만든다.

 

당신의 언어를 구걸하는 나를 이해해주기를.

당신의 이야기 밖에서 이렇게 외면당해온 나의 침묵을 제발 알아봐줘. 당신이 말할 때마다 닳아 없어져가는 나의 얼굴을 알아봐줘.

 

<몽타주>

사랑을 잃었을까?

믿음을 잃었을까?

소설 속에서라도 살아나고 싶었던 사람은 결코 그러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라도 찾고 싶었던 사람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글조차도 그날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했으므로...

 

마을이 처녀 공양을 시작하게 된 기원은 이와 같다.

 

 

전설로 비롯된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하는 <공희>

전설의 고향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바다뱀의 저주였을까?

재주와 본능을 억누르게 하는 건 현대에서 커리어를 잃는 것과 같다.

자수에 놓인 대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결혼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현대 여성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그녀에게 자수를 빼앗아 고이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던 무사의 사랑은 진정 사랑이었을까?

자꾸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가 내 안에서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6편의 이야기는 모두 시공간이 다르다.

하지만 그 다른 시공간 속의 여자들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자유를 구속하고, 본능을 억제당하고, 재주를 짓밟히고, 가스라이팅과 강간, 폭력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녀들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사 그 마지막이 죽음이라 해도 어떡해서든 앞으로 '나아' 가려고 애쓴다.

소리 없는 비명이 이야기 전체에서 울리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 속 여자들의 결말은 바로

읽는 이

독자들의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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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떠나면 고맙다고 말하세요
켈리 함스 지음, 허선영 옮김 / 스몰빅아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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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든지 당신은 희생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아.

 

 

3년 전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떠난 전 남편이 3년 후 갑자기 나타나 저런 말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할 건가요?

 

아이 둘과 대출 융자금만 남기고 남편은 홍콩으로 출장 가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이 어린 여자랑 홍콩으로 사라진 남편 대신 모든 걸 떠맡아야 했던 에이미.

그 3년 동안 에이미는 홀로 서는 법을 익혔다.

두 아이 코리와 조와 함께 그들은 가족으로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타난 남편 존.

그동안 자기의 빈자리를 보상하고 아이들에게 아빠 노릇을 하기 위해 돌아왔단다.

그리고 에이미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휴가가 생겼다.

존이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에이미는 뉴욕에서 열리는 도서관 사서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지만 도착하자마자 난관에 부딪힌다.

처녀 적 절친 탈리아가 가르쳐준 아파트 주소는 어딘지 허름하고, 게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거 같다.

그리고 탈리아와는 전혀 연락도 되지 않고, 여행 가방과 함께 뉴욕에 홀로 남겨진 에이미는 소싯적 기질을 발휘해 호텔에 짐을 맡기고 컨퍼런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한국계 섹시한 도서관 사서 대니얼을 운명처럼 만난다.

 

#맘스프린가

이 해시태그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탈리아의 잡지사는 에이미를 타깃으로 맘스프린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에이미는 졸지에 줌마렐라가 된다.

뉴욕에서 완벽하게 변신에 성공한 에이미.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어깨의 긴장이 풀리고 있다. 그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어깨 위의 낯선 짐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고, 목과 머리 아래쪽에서 긴장이 풀리며 상쾌함도 느꼈다.

 

 

 

아이들을 못 미더운 남편 손에 맡기고 뉴욕으로 떠나는 에이미는 자신의 어깨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3년간 가족의 생계와 독박 육아를 하던 에이미의 긴장이 풀어지는 시간이다.

독박 육아를 하는 모든 엄마들의 로망.

혼자만의 시간.

내 주변에도 육아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루는 엄마들이 있다.

친한 친구들이 아이 때문에 잠깐의 자기 시간을 내지 못해서 매번 약속을 바꾸고, 미루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그러니 그들과 여행을 떠나는 하룻밤의 수다파티는 꿈도 못 꾼다.

정작 그들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자기들 볼일을 마음대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간절하게 몇 시간이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은 엄마들.

에이미가 보여주는 캐릭터에 나는 짜릿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다.

경제적 독립을 했지만 아직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 에이미.

하지만 뉴욕 생활은 에이미를 점점 변하게 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버려졌던 "에이미"라는 인간의 자아가 뉴욕에서 살아난다.

끊임없이 죄책감과 현실의 만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에이미의 모습이 답답하다가도 이해가 된다.

 

수많은 여자들을 대변하는 에이미의 모습은 그래서 그녀가 다시 찾은 자신을 놓지 않기를 응원하게 된다.

 

 

자, 내가 아빠를 다시 받아주겠냐고? 솔직히 받아준다고 해도 우리 중 누구도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아. 또 단지 아빠를 네 삶에 머물게 할 목적으로는 재결합하지 않을 거야. 그게 아빠를 머물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 중 누구도 진심으로 아빠랑 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에이미와 딸 코리가 주고받는 메일 속에서 독자는 에이미의 심정과 아이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때론 어른들 보다 더 어른스럽다.

코리와 조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응징을 가차 없이 아빠에게 하고 있었다.

 

언뜻 신데렐라 스토리 같지만 그 이면에 여성의 독박 육아와 경제적 독립과 커리어를 아우르는 멋진 이야기를 담아냈다.

에이미는 자신 앞에 닥친 어떤 문제에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존이 그 문제들 앞에서 전원이 꺼진 로봇이 되는 것과는 다르게...

 

그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남자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깜짝 놀란다. 3년 전에,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마다 글자 그대로 잠에 빠져 그 어려움을 나 혼자 헤쳐나가도록 내버려 둔 배우자와의 종신형에서 나는 벗어난 셈이다. 내게 일어난 가장 최악의 일이 또한 내 삶에서 가장 행운의 순간이 되었다.

 

 

최악과 최고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최악에서 최고를 찾아내는 건 바로 당신의 의지다.

에이미처럼 의지의 인간이 되느냐 존처럼 전원이 꺼진 로봇이 되느냐의 선택은 모두 당신 자신의 결정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시간을 모두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아낌없이 내어주는 시간들 중 몇 시간 만이라도 자신을 위해 온전히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라고.

아이들은 엄마가 아닌 아빠랑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는걸.

그런다고 당신이 나쁜 엄마가 되는 건 아니라는걸.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그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걸.

그리고 아이들에게 쏟는 정성 중에 일부분은 꼭 덜어서 남편에게 줘야 한다는 걸.

 

에이미가 비로소 존의 마음을 이해하는 장면에서 나는 짜증이 좀 낫지만(아마도 계속 존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래서 에이미가 더 좋아졌다.

자신을 발견하고, 과거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에이미.

주저앉아서 계속 존을 탓하거나, 존에게 벌을 주려 노력했다면 재미없을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찾아내는 에이미의 이야기라서 이 더운 날에 시원한 청량감을 남겨주었다.

 

지금 맘스프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독박 육아를 하는 중인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 남자분들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남편이 미워지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받을 수 있는 주변의 모든 도움을 받는 것은 염치없고, 나쁜 엄마가 되는 지름길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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