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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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를 즐겁게 읽으며 번역가라면 이런 마음으로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던 그런 번역가를 만난 느낌을 가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번역가분은 팔색조다.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이고 소설가다.

 

비채에서 출간된 <로드킬>은 6편의 중.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SF, 판타지로 이루어진 그의 글들은 독자들에게 그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희귀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편의와 힘을 위해서 자궁을 버리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줄기세포를 이식받고, 장기를 대체하고, 수명 연장 약을 투여받았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새롭게 진화한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달랐다.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오래된 종교적 도덕적 신념 때문에 그런 선택을 거부했거나, 또는 변방의 오지에서 과학적 기술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자연 친화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

 

 

자연 친화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소녀들은 한 곳에 갇혀서 생활한다.

'보호' 받고 있는 소녀들은 '자궁'을 가지고 있다.

그 소녀들은 정말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로드킬>은 끝없이 탈출을 감행했던 소녀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들의 성공담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약하고 갓 선택받은 여름을 데리고 '나'는 보호소를 탈출한다.

자궁을 가진 소녀들은 탈출에 성공할까?

보호소를 떠난 소녀들은 진화된 여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진화되지 못한 채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진화된 여성들이 사는 세상에도 강간과 폭력은 존재하고 남자들의 횡포는 계속된다.

그것이 나를 괴롭힌다.

여성에게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 같아서.

 

처음으로, 라비는 자신의 고독이 두렵지 않았다. 고독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 라비는 처음 느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부족 최후의 주술사가 된 <라비>

할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라비의 이야기는 한 나무에 의해 서술된다.

독을 품고 있는 자주콩.

그들은 오랜 시간 이 부족 주술사들의 비밀 병기였다.

이제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이는 라비뿐.

개화된 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었다.

그리고 라비는 그 '돈'을 인류학자에게 자주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 대가로 받아들고 문명세계로 도망친다.

라비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뉴스 속보에 전국 미세먼지 평균 농도가 몇으로 뜨든 간에 이 일대의 공기질은 언제나 '최고 좋음'을 유지한다. 저 멀리 알프스에 빙하가 다 녹아 사라지는 날에도 이곳의 날씨는 언제나 쾌청할 것이다.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한평생 한곳에서 살아온 경숙.

자신의 낡은 도시에 공기청정탑이 세워지면서 그곳은 가장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로 묘하게 갈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걸리는 '강시병'은 이제 가진 자와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번져간다.

오로지 '전염병'만이 부와 가난을 가리지 않는다.

폐쇄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마루아트센터의 굴뚝에 그려진 파란 새 마크.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세가 될 '강시병' 환자들을 상징하는 새가 아닐까...

 

나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비현실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신뢰할 수 있고 무엇은 믿어선 안 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르겠다.

 

 

<외시경>으로 보이는 옆집 자주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누구일까?

남편의 또 다른 여자?

아니면 과거의 자신?

이 단편에서 느껴지는 과도한 폭력의 기운이 더운 여름을 더 뜨겁게 만든다.

 

당신의 언어를 구걸하는 나를 이해해주기를.

당신의 이야기 밖에서 이렇게 외면당해온 나의 침묵을 제발 알아봐줘. 당신이 말할 때마다 닳아 없어져가는 나의 얼굴을 알아봐줘.

 

<몽타주>

사랑을 잃었을까?

믿음을 잃었을까?

소설 속에서라도 살아나고 싶었던 사람은 결코 그러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라도 찾고 싶었던 사람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글조차도 그날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했으므로...

 

마을이 처녀 공양을 시작하게 된 기원은 이와 같다.

 

 

전설로 비롯된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하는 <공희>

전설의 고향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바다뱀의 저주였을까?

재주와 본능을 억누르게 하는 건 현대에서 커리어를 잃는 것과 같다.

자수에 놓인 대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결혼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현대 여성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그녀에게 자수를 빼앗아 고이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던 무사의 사랑은 진정 사랑이었을까?

자꾸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가 내 안에서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6편의 이야기는 모두 시공간이 다르다.

하지만 그 다른 시공간 속의 여자들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자유를 구속하고, 본능을 억제당하고, 재주를 짓밟히고, 가스라이팅과 강간, 폭력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녀들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사 그 마지막이 죽음이라 해도 어떡해서든 앞으로 '나아' 가려고 애쓴다.

소리 없는 비명이 이야기 전체에서 울리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 속 여자들의 결말은 바로

읽는 이

독자들의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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