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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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처럼 아름다운 너. 그 말에 현기증 같은 유혹을 느꼈다. 살을 빼고 꾸미면 정말 그 무렵의 나를 되찾을 수 있을까.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읽으면서 제목의 느낌이 온전히 녹아있는 이야기의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 이름은 기억 못 하면서 책 제목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달콤한 숨결>의 작가가 고독한 늑대의 피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서 설레었다.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며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는 평범한 주부 후미에.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동창생을 만나게 된다.

가나코는 후미에에게 자신의 얼굴 상처를 보여주며 자기 대신 화장품 사업의 얼굴마담 역할을 맡아주길 간절하게 요청한다.

후미에는 왠지 다단계 느낌이 나서 꺼렸지만 가나코가 준 화장품을 써보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아름다웠던 시절, 빛나던 시절, 그 시절의 후미에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적한 별장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여형사와 짝이 된 하타는 단서가 별로 없는 피해자의 행적을 쫓기 위해 발품을 판다.

하지만 피해자는 어디에도 연결고리가 없고, 별장 주변에서 목격된 선글라스 여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과연 하타는 이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동창생이 던진 미끼를 물지 말지 고민하는 후미에의 이야기와 살인사건의 단서를 추적하는 하타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진다.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는 후미에는 가나코를 만나고 나서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거의 예전의 모습을 찾아간다.

자신감과 더불어 경력단절의 여성에서 다시 사회로 복귀해가는 후미에는 자신감을 되찾으며 생활에도 활력이 생긴다.

 

무뚝뚝하지만 형사의 기본에 충실한 하타.

하타는 여성 동료와 짝이 되어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의 경직된 구조 안에서 여형사의 위치란 것은 상당히 미비하다.

그래서 나쓰키의 등장은 그동안 일본 경찰 소설에서 다루어졌던 여형사와 조금 결이 다르다.

 

<달콤한 숨결>에선 새로운 감각의 향이 나풀거린다.

얼마 전 읽은 <버터>에서도 느꼈지만 일본 여성작가들의 목소리는 경직되고 답답한 일본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려내는 여성상은 사회에서 부여한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사회적 압박을 극복해 내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이야기 속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관심을 끌고, 응원하게 되고, 지지해 주고 싶어진다.

그들이 범죄자라 해도 말이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의 세상을 깨고 나와야 하는 알 속의 아기 새가 되어야 한다.

 

이 사건의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인 형사의 감이 하타에게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끈질김.

형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끈질김이다.

윗선에선 손쉽게 눈에 띄는 용의자를 검거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하타에겐 무언가 미심쩍은 '촉'이 있었다.

뭔가 가려져서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악'

그것을 위해 발품을 팔고, 단서를 찾고, 조금씩 조금씩 본질에 다가가는 하타의 모습은 독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준다.

 

<달콤한 숨결>

원제는 네펜테스라는 식물 이름이다.

항아리 같은 모양의 자루에 달콤한 꿀을 담아 놓고 그 향기에 이끌려 들어온 벌레들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거저 내게 오는 것은 없다.

커다란 행운마저도...

뭔가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인간사다.

달콤한 숨결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외롭고, 슬픈 영혼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음에 신뢰를 심어 놓고 단물을 쫘~악 들이키고 난 다음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는 '악'

덫인 줄 알면서도

타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불만 보면 날아오는 불나방 같은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범죄 이야기이자

나쓰키를 통해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자립해가는 씩씩한 여성상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다.

 

모든 완벽함도 긴장감이 사라지면 우쭐하게 마련이고

우쭐하다 보면 실수하게 마련이고

실수조차도 실수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완벽함의 끝에 서게 되는 것이다.

범인은 긴장감을 풀어버리는 동시에 잡히게 마련이다.

 

갑자기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할 것.

기억도 안 나는 동창이 나를 너무 잘 기억한다면 경계할 것.

너무 큰 행운을 동반한 사람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

 

달콤한 숨결을 읽으며 다짐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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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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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주 많은 곳에 인덱스를 붙이게 된다.

이유는 나 자신이 병원에 가서 느꼈던 수많은 느낌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호르몬 때문이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괜히 엄살 부리는 거 아니지?"

"갱년기라 그래."

"오춘기가 왔나 보다!"

 

이런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진다.

그런 말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 주변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이해하려 한 적 없고, 보듬어 볼 생각도 안 하고, 원인이 뭔지를 알려고 해보지도 않으면서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이니까.

 

우울증, 조증, 불안증, 공황장애, 기타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과 고통들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병명이다.

설사 위의 병명이 가리키는 증상과 일치하지 않더라고 아무 병명 없이 아픈 것보다는 저런 병명이라도 있어야 위안을 받는 것이 환자다.

이 책을 쓴 저자 하미나 역시 조울증 환자다.

본인이 겪는 고통을 뚜렷하게 치료되지 않는 상황들을 더 이상 방치하기 싫어서 스스로 공부하고, 비슷한 증상의 여성들과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써낸 결과물이다.

 

나랑 상관없는 얘기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극심한 고통은 기억을 와해시킨다. 우리는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기억이 무너지면 자아도 와해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산산이 무너지고 흩어진 기억을 모아 재구성하며 시작된다.

 

 

이 책은 우울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직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쓰여진 책이다.

 

2부에서 읽게 되는 여성들의 개인사는 폭력과 학대로 인한 상처를 복기하는 일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최초의 폭력이 시작되는 곳이거나 폭력과 맞닥뜨리는 곳이다.

엄마에게 가해지는 아버지의 폭력,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주먹과 언어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동심은 그 자체로 우울이 된다.

그렇게 쌓여 온 감정들은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들이 고통으로 아우성치며 몸 여기저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문제로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 또한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가정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대목에서 나는 통쾌함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사랑이 가득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가. 또 이렇게 가족 안에서 형성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기 쉽다. 우울증의 가족력이란 비단 유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엄마가 1차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자신의 고통 앞에서 아이들까지 돌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만만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울분을 덜어내었을 것도 같다.

그것도 아들보다는 딸이 더 만만하기에 딸에게만은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던 것이 딸에게는 더 많은 상처를 가져다주는 결과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뭉뚱그려서 "우울증이나 조울증"으로 명명하고 만다.

우울증이 어른에게만 통용된다고 생각하지만 우울증은 꽤 어린 나이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도 이 책이 알려주고 있다.

학교와 직장에서 얻는 정신적인 폭력도 많은 사람들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해자는 모르는 피해자의 상처는 그렇게 계속 복제된다.

 

'한국에서 네가 너답게 살려 하면 결국 죽게 돼.'

 

 

동년배 연예인의 자살은 그들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받았던 질타들이 결국 그들을 사지로 몰아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가정, 학교, 데이트 폭력과는 또 다른 사회적 폭력 앞에서 많은 여자들이 좌절하고, 꺾이고, 숨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을 수용하고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이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지나온 궤적들이 꺼내기 어려운 기억 속에서 멈춰 있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총 31명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들이 이제라도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 준 것이 고맙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로 묵살되었고, 까다롭고, 예민하고, 잘난 척하고, 불란만 일으키는 존재로 다뤄져 왔다.

 

세상이 변하고 여성들의 지위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머물지 않고, 원인을 찾아내고, 들여다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그녀들 때문에

미처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녀들에게도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이유를 모른 채 몇 년을 아팠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았어요. 제 마음의 폭풍은 작은 바람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것을요.

 

 

처음엔 우리 '둘'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쉬고 싶은 우리'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괴.오.똑.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모든 그녀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해받지 못하고 돌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읽어 봤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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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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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만큼 무의미하고 쓸데없고 지성과 동떨어진 행위는 없어요.

 

 

예쁜 여자랑 살면 3년이 즐겁고

지혜로운 여자랑 살면 30년이 즐겁고

요리 잘하는 여자와 살면 평생이 즐겁다는 속설이 있죠.

저는 예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고, 요리도 잘 못하니

우리 랑님 이번 생은 꽝 손인 걸로~ ㅋㅋㅋ

 

자자~

예쁘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정말 맛있는 요리는 사람의 오감을 충족시켜 주죠.

그래서! 마나코는 그 마력으로 남자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차례로 자살을 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정말 자살일까요?

 

마나코를 독점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리카에게 마나코는 미션을 줍니다.

내가 낸 미션을 완수하면 너에게 콩고물을 줄게!

 

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버터 간장밥을 먹은 소감을 얘기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여학교를 다닌 리카는 동성들에게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보이시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그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른 체형.

미소년 같은 이미지.

기자에게도 어울리는 폼새다.

여기저기 취재를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리카의 보호 기재이기도 하다.

바쁜 일상을 인스턴트로 때우며 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리카의 일상에 버터가 들어왔다.

 



 


 

 

마나코의 시원한 일격은 읽고 있는 나에게도 그 여파가 따라왔다.

리카가 마나코에게 빠져드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고, 교묘하게 꼬드기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서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게 이용하는 마나코.

감옥 안에서도 마나코는 리카를 유혹했다. 버터로.

버터의 맛을 알게 된 리카는 직접 요리를 하게 되고, 점점 사회적인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여태껏 사회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여자로서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은 억누르고 살았던 모든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이야기였다.

 

 

중반 이후까지 그렇게 읽혔다.

버터처럼 부드럽고, 버터처럼 고소하게, 버터처럼 진한 향을 남기며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입에 침이 고였고

끊임없이 배가 고팠으며 끊임없이 사회적 편견에 맞서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마나코의 위력이 내게도 미쳤음이다.

 

 

이 사건은 어디를 잘라도 그 단면에 고독한 남성의 지나친 자기 연민과 여성을 향한 증오가 베어 있다. 피해자를 탓하는 사고방식일까.

 

 

마나코와 사귄 남자들은 거의 나이대가 있었고, 다들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나코의 배려와 그녀의 음식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존재는 무시했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

내 취향에는 안 맞지만 나를 위해주니까 곁에 두는 거다.

이 이중적인 잣대는 버터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리카와 레이코, 마나코

이 세 여자의 어릴 적 상처는 그들을 다 자라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만난 그 순간 그들은 소녀에서 어른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남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을 좋아할지도 남이 정해준 기준을 따르고 있었던 거야."

 

 

사회적 "시선"에서 놓여나지 못한 사람들

자기 의지보다는 남들의 '말'을 의지 삼아 살았던 사람들

개성을 버리고 무개성에 동참한 사람들

자신이 당한 만큼 자신도 모르게 되갚아 주며 살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버터 속에 녹아있다.

 

 

달콤하고 고소한 버터 향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부조화, 부적응자, 사회적 편견들이 곳곳에서 버터를 태워버리고 있는 이야기.

 

 

읽는 내내 불편했다.

버터가 그려내는 여성상이 너무나 한심해서.

마나코는 그것을 이용했고, 리카는 그것에서 벗어나려 했고, 레이코는 그것에 묻히려 했다.

한니발 렉터처럼 마나코는 리카를 요리했고, 불나방처럼 뛰어든 레이코에게 사악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전지전능함을 가졌지만 마치 모든 자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마나코는 그렇게 사람을 이용했다.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 버터는 사회가 여성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잣대에 대해서 까발린다.

여자를 무시하면서도 여자 없이는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라면조차도 끓여 먹지 못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까발린다.

그들이 여자를 무시하는 이유는 단지 그녀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열악한(?) 이유일뿐.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정면으로 바라본 느낌이다.

우리고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왠지 그 결이 조금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유연성'이다.

그들에겐 없는 '유연성'이 그들을 더 숨 막히게 하는 게 아닐까?

 

 

버터를 읽으며 버터 간장밥을 안 먹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식구도 없는 데 갑자기 칠면조 요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나도 나를 만족시키는 나만의 요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위해 차리는 게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상차림.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본능적인 문제를 버터처럼 부드럽고 고소하게 녹여낸 버터.

 

 

마나코, 리카, 레이코가 빚어내는 색다른 이야기의 '맛' 이 버터의 매력이다.

비뚤어진 사람과 비뚤어짐을 바로잡아가는 사람과 비뚤어진 것을 바르게 펴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단단한 버터가 갓 지은 밥을 만나서 부드럽게 녹아드는 모양 같다.

그리고 그 맛은 모두가 아는 즐거운 맛이다.

 

 

내년 이맘때쯤 재독하고 싶다.

한 번 읽고 땡! 하기 아까운 이야기다.

읽을 때마다 다른 게 보일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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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 - 동과 서,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건축 교양 강의
전봉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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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통이라고 기억하는 것들은 대개가 가장 가까운 과거인 조선 후기의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연한 태도로 볼 필요가 있다.

 

30년간 건축 역사학에 몸담은 전봉희 교수는 이 책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건축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이야기부터 조금은 깊이 있는 내용까지 아우르는 이야기를 엮은 것은

인문교양 차원에서 건축의 역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독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건축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도 거의 다루는 곳이 없기에 이런 교양서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가명강은 이런 부분들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음식이나 옷같이 건축에도 누구나 의견을 말하고, 다양한 비평이 쏟아지고, 아마추어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비용이 좀 크다는 것이 차이일 뿐, 음식과 옷과 건축은 모두 일상적인 필수품이고, 또 구조도 있어야 하고, 기능도 있어야 하고, 아름다움도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 똑같다.

 

 

모든 건축에는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당대의 사회상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한옥이 점점 사라져가는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국적불명의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것을 지금도 보고 있는 중이다.

한옥은 전통 가옥으로 거의 보존지구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관광지의 개발로 인해 한옥 역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거의 주거지로 자리 잡은 아파트 역시 계속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건축은 고유성을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을 품고, 자연과 어우러지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개방적인 건축물에서 모든 것들을 차단한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건재함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세우고 공동체에서 개인주의로 사회를 변화 시켰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산업화의 병폐이기도 하지만 현재 2030의 건축에 대한 인식은 이전 세대와는 많이 달라진 거 같다.

그래서 미래의 건축에 희망이 보인다.

 

한류가 전 세계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이 시기에 저자는 한국의 건축에도 한류의 기회가 오리라고 예견한다.

사실 외국 사돈들께서 한국 다니러 오셨을 때 온돌의 '맛'을 보시고는 그것을 못 잊어서 자신의 집을 개조하신 경우도 있어서

우리의 온돌 문화는 앞으로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우리의 고유의 목조 건축의 특성과 우리의 고유한 난방 방식인 온돌을 재해석해서 현대에 접목한다면 우리 건축이 세계 건축 문명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대게 우리 문화권에서 건축은 '토목'과 짝을 지어 등장하며 종종 '건설'로 묶인다.

한편 서구의 경우 건축은 '예술'과 함께 등장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건축물은 업자 편의에 의해 지어지기 일쑤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의견은 1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똑같은 소재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지어진 집들에서 안식을 찾는다는 게 어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바쁘게 살아온 세월 동안 우리는 주거지에 대한 생각을 거의 비우고 살아온 거 같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에 집은 그저 잠자는 곳으로 치부하고 말았던 거 같다.

현재 도심에 지어지는 집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창문을 열기도 민망한 수준들의 집들이 많다.

그러한 공간에서의 삶은 스스로를 가리고, 움츠리고, 홀로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건축은 좀 여유 있고, 개방적인 구조로 변화되어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은

우리의 지나간 건축사와 함께 미래의 건축사를 어떻게 이어갈지를 이야기해 준다.

이 책은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건축사를 알기 쉽게 읽을 수 있으며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적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 시켜 줄 수 있는 책이다.



 

* 21세기북스에서 협찬을 받았지만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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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의 남자들 2
알파타르트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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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할 걸 탐하기도 하지만,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해 탐하기도 합니다.

 

 

1편이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맛' 보여 주었다면

2편은 본격적인 이야기의 서막과도 같다.

할리퀸 스타일의 로맨스물로만 생각했던 이야기는 스멀스멀 다른 이야기가 섞이고, 급기야는 장르가 바뀌는 상황에 이르렀다.

누가 하렘의 남자들을 로맨스 소설이라 말한 걸까?

 

라틸의 본격적인 시련이 난무하는 2편은 흑마법과 함께 되살아난 시체로 인해서 이야기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라틸과 하이신스의 비슷한 운명은 서로가 애틋하게 그리는 만큼 닮은 상황이다.

반역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났다 되찾은 왕좌에는 '결혼'이란 압박이 더해지고, 하이신스는 결국 자신의 편에 선 귀족의 딸과 결혼함을 써 라틸을 배신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은 왕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까닥에 라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5년 후에 모든 걸 정리하고 라틸을 데려오겠다고.

 

하지만 자존심 상한 라틸은 하이신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 사이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이복형제인 틀라가 왕위에 올랐다.

황위를 버린 친 오빠는 대사제가 되기 위해 왕국을 떠났고, 아직 정정하신 아버지 덕에 황태녀로 황위를 잇기 위한 공부 중이었는데 라틸이 궁을 비운 사이 틀라가 황제가 되어 버린 것.

황위 탈환을 위해 라틸은 귀족 아트락시의 도움을 받아 황위를 탈환하고 틀라를 처형한다.

 

황위 탈환을 위해 자신들의 이복형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라틸과 하이신스.

하지만 그들이 죽인 자들이 부활한 듯한 흔적이 보이고 500년 주기로 되살아 나는 흑마법이 서서히 발현하는 와중에

각자의 비밀을 간직한 다섯 명의 후궁에 더해 대신관마저 후궁에 자진해서 들어온 상황.

게다가 라틸과 생일이 같을 라나문과 틀라. 그들 중에 악을 불러오는 '로드'의 헌신은 누구일까?

그리고 라틸에게 새로 생긴 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능력은 라틸에게 좋은 일인 걸까 나쁜 현상인 걸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발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라틸은 그녀의 성격대로 닥쳐오는 일들을 해결하고 그녀가 잠시 황국을 비운 사이에 친오빠 레안과 가짜 라틸이 황제 노릇을 하며 라틸은 또 한 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꼭 거울을 보는 기분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빤히 보다니. 이런 이상한 일이 있을까. 흔히들 '두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한다. 거울을 통해 보는 얼굴이 아니라, 실제로 마주 보는 얼굴 기준으로. 그런 경험을 지금 라틸은 하고 있다.

 

 

라틸의 하렘 안에서 여섯 명의 잘생긴 훈남들이 국서의 자리를 노리고 벌이는 암투쯤으로 생각하면서 읽어가다가 복병을 만난 느낌이다.

로맨스가 아니라 완전 판타지잖아!

 

게다가 글 마디마디 웃기는 말장난들이 글을 가볍게 만들면서도 어디서 위기가 닥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이 이야기의 매력이다.

거기에 아직도 파악이 안되는 후궁들의 본심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도 궁금하게 만든다.

 

누가 진짜 사심 없이 라틸을 아끼는 걸까?

라틸은 가짜를 어떻게 끌어내어 자신의 자리를 지킬까?

라틸과 하이신스는 진정한 사랑일까? 아님 첫사랑의 흔적일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후궁들은 어떤 목적으로 후궁이 되었을까?

 

양파처럼 까면 깔수록 색다른 이야기가 삐져나오는 하렘의 남자들.

로맨스 코미디를 빙자한 판타지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누가 배신할지 알 수 없기에 더 궁금해지는 하렘의 남자들.

 

로드의 정체는 누구고

여우 가면을 쓴 자는 누구일까?

라틸은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다음 편이 빨리 나와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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