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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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 이런 환경 안에서 자라 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으로, '들리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들리는 세상'과 '들리지 않는 세상' 두 세계에 한 발씩 걸쳐 있는 코다.

아라이는 코다다.

가족 모두가 농인이고, 자신만 청인이다.

 

경찰 사무직을 그만두고 야간 경비직을 하다가 자신만이 가진 '기술'인 수화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 책을 읽으며 수화통역을 하는 사람들이 청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그저 언어 자체만 번역하는 번역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천적 농인은 '소리' 자체를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통역해 주는 청인들의 이야기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라이는 그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청인 세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족과는 소원해진 아라이지만 수화 통역을 하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의 기억이 새록새록해진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들리는' 자신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도 '들리지 않는' 부모님과 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의 긴박감과 몰랐던 세계에 대한 탐구와 17년의 세월이 흘러 돌아온 과거의 찜찜함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건.

담백하면서도 복잡한 두 세계의 교집합.

그 안에서 고민하고, 외로워하고,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사람들이 보인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보니 그들을 지칭하는 말부터 수정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년 전 자신이 수화 통역을 했던 피의자 몬나 데쓰로.

경찰이 마음대로 꾸민 조서를 몬나에게 설명해 주고 이해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부당해 보이는 그 조서와 체념해 버린듯한 몬나의 모습을 보고도 윗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아라이는 그날의 일을 두고두고 마음에 짐으로 삼고 있었다.

 

17년 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노미 가즈히코의 용의자로 경찰이 몬나를 찾고 있는 걸 알게 된 아라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펠로십'의 기숙사에 몬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17년 전 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래부터 한 명인 것처럼 가족 구성원이 3명뿐이다.

호적에도 둘째 딸은 올라있지 않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

 

17년 전 아라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던 그 소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무도 몬나의 둘째 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없었던 아이처럼.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살인사건의 중심에 있는 <해마의 집>에서 벌어지는 농인 학대에 대한 것도 다루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와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다룬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무례한 일들을 다룬다.

농인 사이에서도 선천적 농인과 후천적 농인들의 간극을 다룬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을 다룬다.

다른 삶을 살아도 버릴 수 없는 가족애를 다룬다.

 

추리소설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들이 이 이야기에서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해결법이 있다.

장애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지만

그들에겐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두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행복한 결말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인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예리하지만 부드럽게 두 세계의 접점을 말해주는 작가의 필력이 매력적이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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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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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태기를 한 방에 끝내버린 책.

 

4825일 전에 내 딸 레나가 실종되었다. 햇수로 벌써 14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14년 동안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도록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세무사 마티아스는 14년 전에 딸 레나를 잃어버렸다.

경찰 친구가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나는 14년 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언론은 레나를 파티 걸로 치부하고 갈수록 선정적인 기사로 레나의 모든 것을 까발렸다. 마티아스는 항의하고, 호소도 해봤지만 언론의 관심에서 레나가 멀어질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4년 후 레나와 비슷한 여자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마티아스는 병원을 찾아갔지만 그 여자는 레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 한나라는 아이는 마티아스의 딸 레나와 똑같이 닮았다.

마티아스는 레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가 나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그래야만 그 일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납치범에게 납치되어 졸지에 아내와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을 떠맡아야 했던 야스민.

야스민은 자신이 아닌 레나가 되어야 했다.

그 숲속 오두막에서.

창문 하나 없고, 문이란 문은 모두 잠겨 있는 그곳.

공기순환기가 없으면 숨도 쉴 수 없는 그곳에서 야스민은 레나가 되어 똑똑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한나와 그녀의 남동생 요나단의 엄마가 되어야 했다.

아이들은 야스민을 엄마라 부르며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폭행과 강간으로 그녀의 의지를 꺾어 놓은 납치범은 그녀에게 세 번째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완벽한 가족이 될 거라고.





레나, 당신과 나는 같은 배를 탄 거야. 나를 마음 깊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밖에 없어.

 

 

마티아스, 야스민, 한나의 시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이렇게 흡인력 있는 스릴러는 오랜만이다.

독일 스릴러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감정 밑바닥까지를 아주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이는 납치와 감금, 폭행과 강간, 그리고 세뇌에 노출된 인간이 그곳을 탈출해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트라우마에 대해서 야스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과사전을 통해 세상을 배운 한나는 모든 것을 백과사전 속 설명으로 이해한다.

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마티아스는 오로지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행동한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절박하게 다가와서 읽는 내내 심장을 조여 온다.

 

두께를 자랑하는 책도 아니고

요란한 광고도 없는 책이지만 왠지 끌려서 읽었는데 간만에 몰입해서 읽은 작품이다.

 

당신은 우리를 가둘 수 없다. 소유할 수 없다.

이 오두막은 당신의 감옥이다. 결코 우리의 감옥이 아니다.

 

 

한치의 예상도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다.

범인이 밝혀지기까지 범인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이 이야기의 묘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고통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납치당해 자신의 자유와 의지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의 고통

야스민의 전 생애는 고작 4개월의 감금으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

끝없이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야스민을 지배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이제 빛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 레나. 그녀만이 야스민의 고통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언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건 범인이 아니라 바로 언론이다.

카더라 통신이 내뿜는 기사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더하고, 사람들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 속을 다 알 수 없듯

부모 역시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 없다.

이야기 한 편에서 우리가 가진 온갖 문제점을 발견한다.

 

마티아스도, 야스민도, 범인도, 레나도 모두 잘못이 있었다.

그 잘못으로 인한 희생양은 누구일까?

 

마지막까지도 범인을 알지 못해서 애태웠고

멀쩡한 사람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이 일었고

정의란 어디까지로 선을 그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끝머리 레나의 이야기가 마지막 뒤통수를 친다.

 

 

내 아이들이 언젠가 내 눈을 통해, 내 설명을 통해 접한 것들을 실제로 대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리란 걸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 아이들이 오두막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리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 희망이다. 내 희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내가 가진 힘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성의 위대함도 동시에 '맛' 볼 수 있는 올여름 가장 훌륭한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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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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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기기에 몰두한 모두가 오직 네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라지만 네트 밖에서는 그조차 고요했다. 네트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세상.

마지막 일주일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최상의 것을 선사하기로 한 나.

그 곁은 지키는 안드로이드 조이.

 

1세대 안드로이드 조이.

무수한 삭제의 기억 그 어디쯤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라는 걸 생성해 주는 밑거름이 되었을까?

자신이 보호했던 인간의 죽음을 지켜야 하는 안드로이의 마음에 어떤 것이 깃들여졌을까?

안드로이드를 기계로만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올 테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계 어딘가에도 인간은 자신을 증명할 무언가를 남길 테니.

 

많은 것들이 유의미하게 변할 때, 또 어떤 것들은 고집스럽게 살아남는 법이다.

 

 

화성으로 이주했음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비싼 통신료를 지불해가며 디지털 제사를 지내는 심정들은 무엇일까.

4분 30초의 시간 간격 사이로 서로의 등과 엉덩이만을 보여주며 절을 주고받는 지구인과 화성인.

 

전화기에 대고 조상 귀신에게 절하는 상황에 어이가 어디 있다는 건지 말 좀 해주세요, 기자님.

게다가, 이 멀리까지 찾아오는 집념 어린 귀신이라니 정말 무섭다고요.

 

 

여기와서 제일 황당할 때가, '우린 화성인이라 그런 거 안 따져'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한국인인데 이건 챙겨야지'할 때예요.

 

 

 

단어가 내려온다. 이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화성에 산다.

그러니 화성인이다.

화성인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고수해야 하는 화성인.

제사와 육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자들.

경력단절과 독박 육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그녀들의 시간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미주는 화성에서 지구로 이직을 준비한다.

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서류를 접수 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녀는 지구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 행성이 있다면?

그 행성으로 행성 사파리를 떠날 수 있다면?

지구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행성으로 사파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인간의 조상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나기 이전의 호모 속들이 즐긴 고유의 습성은?

호모 리터스들의 서핑을 구경하는 인간 중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행성사파리.

하지만 미아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행성사파리가 더 특별해진다.

 

 

"생물의 진화가 완벽하게 무계획적인 것처럼, 행성의 일생 역시 아무리 주어진 조건이 기적처럼 동일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역시 지구의 과거가 아니죠."

 

 

단어가 내려온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떨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SF를 빙자한 현실의 이야기들 속에 언제일지 모를 미래가 스며있다.

 

이 책을 읽어 가면서 화성인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행성사파리가 언젠가는 가능해질 거 같고

안드로이드가 더 이상 기계처럼 느껴지지 않고

내게도 어느 날 나만의 단어가 내려올 거 같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SF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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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들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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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까. 깊은 바다에서 끌려 올라온 이상한 물건들을 숱하게 봤지만, 지느러미든 비늘이든 눈이든 물고기처럼 생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물고기가 통통 튀어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녀석은 매끄럽고 고운 털이 잔뜩 달린 한심한 비치볼일 뿐이었다.

 

 

어느 날 바다에서 통통 튀어 배에 오른 비치볼처럼 생긴 털뭉치.

통통 튀어서 배의 선장 빌리의 집까지 좇아온다.

빌리의 아이들과 금세 친해져서 놀고 컴퓨터도 자유자재로 하는 이 이상한 비치볼의 정체는 무엇일까?

 

빌리의 가족은 이 이상한 생명체에게 FF라는 별명을 붙이고 루이라고 이름 지어준다.

루이는 비치볼처럼 통통거릴 줄만 알았는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

숨길 수 없는 루이의 정체는 입소문을 타고, 경찰과 신문사 기자까지 빌리의 집으로 찾아온다.

게다가 정부와 은행을 해킹한 흔적 때문에 정부 요원까지 빌리의 집을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루이는 감쪽같이 자신의 몸을 숨긴다.


 

"한 명이라도 누가 이기는지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경주에 목적이 생기기 때문에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돼버려. 그런데 인간들은 진화 과정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발을 떼는 바람에 항상 목적을 추구하면서 놀이를 유치한 걸로 보게 된거야. 우리는 진화 과정에서 놀이를 선택했기 때문에 진지함을 유치하다고 봐."


 

진화 과정에서 '놀이'를 선택한 외계인들은 매사를 놀이로 생각한다.

정부와 은행을 해킹한 것도 그들에게는 놀이다.

그들은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 월등한 지능으로 인간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이 신선하다.

게다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지정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 요원들의 모습은 시종일관 첨예하다.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인간의 문명을 제대로 바라보며,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 세상을 재미없어 하는 FF들의 모습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거 같다.

 

 

보고서 형식으로 FF들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미 대통령과 정부 요원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부분은 유연성 없는 정부가 자신들이 적으로 정한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결론 내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SF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거의 현실의 민낯을 외계인의 입을 통해 듣는 기분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단순한 말로 듣는 인간의 현실이 이토록 도드라지게 들릴 줄 몰랐다.


 

"당신네 문명의 중심에 있는 건 두 가지야."

"탐욕과 힘. 그런데 이것들은 인간의 행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인간들은 자신은 물론 주위의 생물들과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사회를 조직할 수 있었어. 그런데 여기 미국 사람들은 모두에게 더 많은 돈,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힘을 원하게 부추기고,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고 부추기는 사회를 만들어냈지. 당신들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물들과 식물들에게 아주 가끔씩만 관심을 줘."

 

 

뼈 때리는 FF들의 인간 감상문 앞에서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FF들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위의 생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쟁보다는 서로 상승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동식물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걸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놀이를 즐기는 FF들이 인간 보다 높은 지능을 가지고도 재미를 선택한 것은 지금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거 같다.

루크 라인하트가 남긴 유작 침략자들.

 

저 광활한 우주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다.

인간 보다 더 진화된 문명을 가진 생명체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지구에서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고 살고 있는 거 같다.

 

우리에게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루크 라인하트식 블랙 유머가 곳곳에서 일침을 가한다.

2권이 곧 나올 거라는 말로 끝을 맺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루크는 FF들과 함께 먼 우주로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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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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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것, '나'가 '너'가 되어볼 것, 그래보려고 노력해볼 것. 타인을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맨날 보는 것만 보게 된다.

나는 나름 다양한 각도에서 세상을 보려 한다고 자부(?)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역시 자만이었음을 깨달았다.

90년 대생의 글로 대하는 이 세상은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산 중턱에도 못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출발을 하고 열심히 올라가고 있고, 아직은 으쌰으쌰하고 있으니 정상까지 무리 없이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녀들을 코다라고 한다.

이길보라는 코다다.

그것이 바로 이길보라를 만들어냈다.

 

소리가 있는 세상과 소리가 없는 세상의 중간자.

 

이길보라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나는 저 문장을 쓸 것이다.

장애가 있는 세상과 장애가 없는 세상의 중간자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녀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들었다.

양쪽의 이익을 따질 수 있게 만들었다.

 

 

'다수'가 '소수'에게 매번 자신의 소수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된다.

 

 

지금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자들이 속 시원하게 얘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2003년쯤 대학로 거리에서 낙태죄 방지를 위한 캠페인 같은 것이 흥사단 본부 앞에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팸플릿을 나눠주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

그날 내 블로그에 글을 썼다. '미혼모'는 있는 데 왜 '미혼부'는 없냐고.

애는 혼자 만드냐, 같이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왜 여자들에게만 굴레를 씌우냐.

미혼모가 왜 생기겠냐, 미혼부가 없는 건 남자들이 모든 책임을 여자들에게만 부여하고 자신을 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대략 이런 글이었다.

이젠 '미혼부'라는 단어가 생겼다. 그리고 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길에는 이길보라 같은 사람의 '외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경험은 말을 하고 나면 명확해진다. 사라지기도 하고 더 선명해진다. 그 주위로 몸의 경험이 모여든다. 이것은 '죄'가 아니라 '권리'를 침해당한 이야기이며, 수치심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강요당한 이야기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자고 다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나의 관심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쯤에 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이토록 다양하고 다방면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나에게 있었던가?

어쩜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엔 그가 너무 한쪽의 편에서만 얘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WHY NOT?"

 

 

무엇보다 동아시아 유교국가의 예의와 질서는 지킬 만큼 지키지 않았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 압도되어간다.

내가 가진 지루한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

나름 열심히 깨부수며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리 용감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여성으로서 누리는 이 자유는 내가 쟁취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피.땀.눈물 위에서 만들어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기존의 언어는 '정상적인 몸'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기존 서사는 그 몸과 언어를 중심으로 쓰였다. 이 세상에는 기록되지 않은 몸의 이야기가, 그를 설명할 다른 언어가 남아 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몸의 서사와 그에 맞는 언어가 필요하다.

 

 

다음 세상을 위해 미래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면

바로 저 문장에 그 길이 있을 거 같다.

70년 대생으로 수많은 사회 변화를 직접 겪으며 살아온 세대로서 말하자면 미래는 우리 사회가 쉬쉬하고 금기기했던 모든 것들이 자유를 찾을 것이다.

바로 이길보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고정된 원칙이라고 하는 것들이 깨어질 테니.

그 원칙들은 새로운 언어로 쓰일 것이다.

 

나는 방금 새로운 서사로 쓰일 미래의 언어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현재는 변하고 있고

그 변화를 자꾸 거부하다가는 변화에게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기 전에 열린 마음과 열린 생각을 탑재해야 한다.

 

젊은 생각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고, 너무 혁명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현실성 없어 보이고 혁명적으로 들리는 모든 것들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정체되어 있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거 같다.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에서 신선한 이야기 한 편을 읽어 낸 거 같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다.

두 번째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예술과 금융을 결합시킬 수 있는 금융예술인으로 자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 유교국가로서의 예의와 질서에도 새바람이 불 때다.

새로운 예의와 질서를 위해 오늘도 쓰고 또 쓰는 젊음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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