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세계지질공원으로 떠나는 여행 - 유네스코가 인증한 한탄강 지질명소 톺아보기
권홍진 외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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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계곡은 한탄강 물의 작용으로 새로 태어난 젊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검은색의 현무암 수직 절벽은 태고 때의 지구를 연상하게 하는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한탄강 유역은 자연의 풍광을 심미적으로 감상하며, 시간에 따른 지구환경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자연이 주는 선물과도 같은 곳이다.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2020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제주도, 청송, 무등산에 이어 네 곳의 세계지질공원을 갖게 되었다.

 

풍경 좋은 곳으로만 알고 있었던 한탄강.

멋진 풍광을 보면서도 그곳에 담긴 역사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책은 한탄강 알리미들이 세계지질공원 지질명소 안내서와 더불어 지질 해설사와 관광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고 교육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 책이다.

 

한탄강 유역의 수많은 절경들과 함께 그곳에 깃들인 전설과 그곳이 생성된 과정들을 엮었기에

재밌는 이야기도 알 수 있고, 곁들여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없었던 한탄강 유역의 역사적 가치들도 함께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첫 장은 한탄강 유역에 숨어 있는 역사, 지리, 문학, 예술 등 인문학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며 한탄강만이 지닌 지형과 지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두 번째 장은 지질명소로 지정된 26곳의 지형 및 지질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면서 각 명소에 얽힌 인문학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래서 지루해질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재미난 이야기나 전설들이 나와줘서 책을 읽는 보람(?)이 있었다.

재인 폭포에는 외줄 타기 재인의 슬픈 이야기가,

교동가마소에는 노총각 신랑의 새드 엔딩이,

화적연의 전설은 아직까지도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슬퍼서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나 보다.

각각의 명소를 찾아가는 안내표시와 함께 그 명소의 지질학에 대한 설명들이 한탄강을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사진들은 풍경뿐 아니라 한탄강이 품고 있는 지질학의 연대기도 설명해 준다.

그냥 눈으로 보면서 멋지다!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은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용암이 흘러 본래의 한탄강 줄기는 묻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탄강은 새로이 생긴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유구한 역사가 느껴진다.

주상절리의 개념을 확실하게 배웠고, 전곡리 유적지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긴 구석기 '전곡리인'들의 고향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토록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를 비로소 찾은 거 같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사진만 찍기보다는 그곳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 유구한 세월을 품은 비경 앞에서 절로 숙연해질 거 같다.

아이들과 함께 놀러도 갈 겸, 자연 학습도 할 겸 겸사겸사 가보기에 참 좋은 곳이다.

물론 이 책을 필수로 지참해서 아이들과 함께 자연 공부도 한다면 훨씬 더 유익한 시간이 될 거 같다.

명소를 찾아가는 법

그곳에 담긴 옛이야기

그 지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곳에 있는 바위는 어떤 바위인지

단순히 사진으로만 보고 글로만 익힌 지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함께 할 수 있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자연 박물관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역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나였다.

다음에 다시 갈 때는 이전과는 다른 마음과 다른 눈으로 한탄강을 보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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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안티 투오마이넨 지음, 전행선 옮김 / 리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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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환자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겁니다."

 

 

버섯 회사 사장 야코.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가 그가 의사에게 들은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중독된 독으로 인해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아내와 회사 직원과의 뜨거운 정사 장면을 목격한다.

 

 

내 마음속을 질주하는 이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어쩌지? 내 아내와 아내보다 열 살이나 어린 그녀의 연인이 정말로 날 독살하기로 한 거라면?

 

아내는 열 살이나 어린 직원과 불륜 중이고 그와 동시에 그를 죽이려 독을 탔으며 회사까지 장악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새로 생긴 버섯 회사는 최신 장비를 갖추고 그의 사업을 가로채려 하고 있고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 되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서

속절없이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 안의 무언가가 거칠게 떨어져 나가서 아래쪽의 차가운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쳐 내려가는 것 같다. 그런 감각이 몇 초쯤 지속한 다음 멈춘다.

 

 

멀쩡했다가도 갑작스레 찾아오는 몸의 이상 증상.

아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속이고

경쟁 회사는 직원들과 접촉해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그들을 빼내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은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말썽꾼들이고 다혈질이다.

충격적인 소식과 장면을 목격한 날 그는 새로운 경쟁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사무실엔 아무도 없고 야코는 열린 사무실로 들어가 그들의 최신식 장비들을 보게 된다.

별 볼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경쟁자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그의 밥그릇을 뺏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진짜 불행은 시작된다.

 

시한부 선고와 아내의 불륜보다 더 끔찍한 일은 뭘까?

 

다혈질 경쟁자들 중 둘이 그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고는 실종된다.

야코는 시체를 치우기 바쁘고, 경찰은 은근히 그를 떠보러 찾아온다.

야코는 이 상황에서 오로지 회사를 구하기 위해 홀로 싸운다.

과연 그는 복수를 하고 회사를 지키는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 어떻게 살아왔어야 하는가? 만약 삶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일주일이 남았다면? 한 달이 남았다면? 난 이런 문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웃픈 상황들 사이로 죽음을 앞둔 야코의 사색들은 지나간 인생들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나 역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이고, 어떻게 살아왔어야 하는지 죽음이 얼마 안 남았다면 무엇을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야코라고 그가 그런 상황에 빠질 거라는 상상을 한 번이라도 해봤을까.

하지만 상황은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야코는 죽음을 앞둔 사람답게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침착하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남자의 모습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다.

 

핀란드 소설은 처음이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고 술술 넘어간다.

게다가 철학적이기도 하고, 무려 코믹하기까지 하다.

 

핀란드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야코의 아이스크림과 도넛은 속절없이 녹아든다.

열정적이지 않지만 열정스럽고, 과도하지 않은 거 같으면서도 과하다.

그리고 고맙게도 반전이 있다.

 

북유럽 스릴러의 '고요한 맛'

이제 시작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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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살인 - 죽여야 사는 변호사
카르스텐 두세 지음, 박제헌 옮김 / 세계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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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동안 누군가를 때린 적이 없다. 그리고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현재 업무 환경에 비추어보면 도리어 늦은 감이 있다. 인정하건대, 일주일 뒤 여섯 건이 추가되긴 했다.

 

 

업무 스트레스와 아내와의 불화, 사생활이 없는 의뢰인의 요구로 스트레스가 극심한 비요른.

그는 변호사다.

그의 의뢰인은 마피아.

삐걱거리는 가정생활을 회복해보기 위해 그는 아내가 요청한 명상을 배워보기로 한다.

 

사랑이 우리 사이에 놓인 연약한 식물이라면 가족이라는 화분에 분갈이를 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현대 가정 대게가 겪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명상을 시작한 비요른은 일주일간 요쉬카 브라이트너에게 수업을 받고 그의 책을 받는다.

실생활에서 문제가 닥칠 때마다 호흡법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 책을 펼쳐서 지금 놓인 상황과 마음 상태에 걸맞은 부분을 찾아 읽으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매 챕터마다 브라이트너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이 나오고 비오른은 그 명상법에 따라 정신을 가다듬고 문제를 해결한다.

마피아 담당 변호사라는 신분은 각종 범죄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방법을 의뢰인을 위해 여태 써먹었을 뿐이었다.

그 갈고닦은 방법을 비요른은 이제 자신을 위해 쓰기로 한다.

 

명상 수업으로 비요른은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가고 관계 회복을 위해 아내와는 잠시 떨어져 있기로 한다.

온전히 쉬기 위해 쉬는 날은 휴대폰을 꺼둔다.

사랑하는 딸 에밀리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로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시작한 그의 새로운 삶은 에밀리와 호숫가로 주말여행을 떠나기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모든 것이 뒤바뀐다.

휴대전화를 꺼두는 걸 깜빡 잊어버린 순간이었다.

그 전화를 안 받았다면 비요른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 소풍이 먼저. 그다음에 일. "

 

비요른에게 닥친 문제는 바로 그의 의뢰인 드라간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동영상에 찍히고 쫓기는 신세가 된 것.

비요른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드라간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그를 차 트렁크에 태워 주말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명상 수업에서 배운 대로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트렁크에 있는 드라간을 꺼내주지 않고 철저하게 잊어버리는 것.

59.7도까지 올라간 트렁크 온도에서 그의 의뢰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첫 문장을 읽으면서 이 남자에게 상당한 공감을 했다.

이 명석하고 부지런한 변호사가 명상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탈바꿈 시키는지를 알게 될수록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의뢰인을 죽이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체를 처리하고, 그의 대리인이 된 변호사 비요른.

드라간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본떠 모형을 만들고 그걸로 모든 명령을 전달하고 그걸로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가는 수법은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세운 계획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요른은 명상을 통해 절박한 상황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을 뿐이었다.

 

스릴러의 격을 한층 업그레이드 한 작품이다.

 

이것이 계획된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흥미롭다.

그저 비요른은 순간순간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을 뿐이었다.

명상법에 따라.

 

명상은 사람을 죽이고 코를 부러뜨릴 수 있다. 그리고 빙산도 녹일 수 있다.

 

 

 

명상으로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을 각성한 살인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 라고 생각하고 읽어간 이 이야기는

엉뚱하고, 피식피식 웃기고, 뭔가 조마조마, 불안불안한 감정을 끝까지 몰아간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어 버렸다.

 

재밌는 건 비요른의 살인 행각과 사기 행각을 응원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고, 더 많은 나쁜 놈들을 파괴하기를 바라며

아예 마피아 조직 전체를 접수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그건 아마도 비요른이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기에 그런 거 같다.

회사일로 바빠 가족과 시간을 점점 보내기 힘들어지고, 자기가 번 돈으로 좋은 집에서 편하게 생활하는 아내는 항상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게다가 마피아의 뒤를 봐준다고 은근 그를 경멸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된 건 바로 당신이 누리는 모든 자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고뇌 속에서 시시각각 쌓여왔던 그의 분노가 명상을 통해 조용하고, 깔끔하게,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을 정리해가는 영리한 수법을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에 대해 은밀하게 감추고 있던, 상상만 했던 일들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낸다.

드라간의 시체를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능수능란한 연쇄살인범 같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 명상 살인은 3권까지 나왔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당연히 다음 편을 빨리 만나고 싶다!

왜냐하면.

비요른에게 살인의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유능한 형법 변호사는 자신이 아는 법률 지식과 자신이 훔쳐버린 드라간의 '힘'을 가지고 어떤 일을 벌이게 될까?

비요른은 드라간의 라이벌 보리스를 트렁크에 싣고 떠난다.

이로써 마피아 양대 산맥의 수장 드라간과 보리스는 비요른의 손에 넘겨졌다.

앞으로 비요른은 어떤 일을 벌이게 될까?

이 이야기가 시리즈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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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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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통역은 '들리지 않는 사람'만을 위함이 아닌 '들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들리는 사람'중에는 이런 의식이 없는 사람이 이따금 있다.

 

 

책을 읽는 동안 6년의 시간이 흐른다.

아라이는 미유키와 결혼하고 딸 히토미를 낳는다.

그리고 히토미는 아라이가 우려했었던 상황이 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사건에 치중하지 않고 별개의 이야기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어진다.

이야기들 사이로 시간이 흐르고 인물들은 나이 들어가고, 그들의 상황은 바뀌어 간다.

 

 

아라이의 조카 스카사의 방황,

미와의 사춘기.

히토미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

이런 개인사들 사이사이 통역 의뢰를 맡게 되면서 부딪히는 현실의 벽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농인 부부의 산부인과 방문기에서 아라이는 여성 통역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땅찮아 하는 부부의 심정을 이해하고 병원 수속만 도와주지만 그들이 의사와 필담으로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긴급상황이 발생하고 아라이가 그들에게 달려가지만...

 

 

병에 대해서는 의사와 환자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데 의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환자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쫓기는 시간에 많은 환자를 만나야 하는 의사의 고충도 있겠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촉'을 동원해 의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게다가 힘든 병일 때에는 의료용어나 그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통역이 필요하지만 의료지식을 가진 통역인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다.

 

 

들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수화 통역은 그래서 청인들이 많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평생 소리라는 개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설명은 도대체 얼마나 와닿을까?

게다가 수화는 하나의 사인이다.

모든 말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짧은 에피소드에 담긴 답답한 현실이 마음을 짓누르는 기분이다.

 

 





장애인 고용 부문으로 회사에 입사한 야요이.

처음 입사시엔 수화 통역사를 붙여주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갈수록 그녀의 주위는 냉랭해지고, 승진에서도 누락되고, 사람들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야요이는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약자를 위한 지원'이 아니다.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바라고 있다.

 

 

회사에서 제공한 통역사는 같은 회사원으로 수화 모임에서 수화를 배운 경험이 있는 사람이지만

야요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화를 한다.

각종 회의나 전달사항들도 야요이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녀가 발성도 하고 입모양을 읽는다는 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신경함을 덮는다.

소외되고, 방치된 야요이의 외침이 가슴에 점점이 남는다...

 

 

저는 있는 힘껏 들리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민폐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입 모양을 읽어 내려고,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어 전하도록. 저는 그렇게 해서 열심히 함께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사람들은, 당신들은 조금도 옆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다수의 의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은 묻히기 쉽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HAL의 이야기는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포장하고, 광고하고, 이용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HAL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를 읽는 동안 아주 조금 들리 않는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은 거의 모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나의 무신경을 건드려주었기 때문이다.

사회, 의료, 법 모든 분야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장애는 타고나는 것보다는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각종 사건 사고는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요인이다.

그들이 함께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복지는 나라에서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이 시리즈가 계속해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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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귀를 너에게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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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다. 용에게는 뿔은 있지만 귀는 없지. 용은 뿔로 소리를 감지하니까 귀가 필요 없어서 퇴화해 버렸어. 쓰지 않는 귀는 결국 바다에 떨어져 해마가 되었단다. 그래서 용에게는 귀가 없어. 농이라는 글자는 그래서 '용의 귀'라고 쓰지.

 

 

聾 = 龍 + 耳 즉 용의 귀는 '농(聾)'이라는 뜻이다.

미와와 미와의 학교 친구 에이치에게 마스오카 노인이 농자를 설명하는 장면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라이는 통역일을 시작한지 2년째되었고, 그 사이 미유키와 살림을 합쳐서 아라이, 미유키, 미와는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간간이 들어오는 통역일로 살림은 아라이가 맡고 미유키는 교통과에서 형사과로 가기를 희망한다.

미와는 아라이에게 말을 하지 않는 학교 친구 에이치에게 수화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고, 아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에이치에게 수화를 가르친다.

'함묵증' 들리지만 소리를 내지 못하는 병을 가진 에이치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좋아 수화를 빠르게 배워간다.

그러던 중 맞은편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한 이야기를 수화로 전한다.

 

한편 2년 전 문제가 되었던 '해마의 집' 폐쇄가 결정되고, 방송과 학회에서는 '정육학'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방침을 장려하는 분위기다.

부모 양쪽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정상적인 가족만이 제대로된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교육학이다.

아라이는 농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신카이를 위해 통역을 하게 되는데 중도실청자인 신카이의 생각을 마주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용의 귀를 너에게.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농인을 비롯 발달장애를 가진 에이치를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병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취조시 수화 통역의 준비도 마찬가지다. 어느 지자체든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사고나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피해자. 가해자를 따지지 않고 수화 통역사 파견을 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고 하지만, 수사관이 알지 못하거나 혹은 필담으로 충분하고 보청기를 하면 들릴 것이라는 '현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취조시에 통역을 맡으면서 아라이는 부당함을 몸소 체험했기에 그가 겪는 마음의 고통은 읽는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야기 속의 상황인데도 답답하고, 화가나는 상황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무지함으로 그들을 대하는지 나 스스로를 반성해보는 시간이었다.

 

음성일본어의 발성을 강요받는 일, 그건 저에게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굴욕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것은 저에게 '언어'가 아닙니다. 제가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알 수 없으니까. 그것은 제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소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발성을 하도록 강요 하는 것은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일까?

 

수화 통역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통역사일까?

수화 통역사 대부분이 청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수화 통역사의 수화를 대부분의 농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 이야기를 읽으면 무수한 물음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전혀 상관없을 거 같은 살인사건은 에이치 주변과 연결되어 있고, 정육학의 본질을 파헤치게 되는 사건은 '교육'이라는 것에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 이야기에 쓰인 에피소드에는 이길보라작가의 에피소드도 담겼는데 이길보라 감독의 독립영화를 보고 작가 마루야마 마사키가 직접 찾아와 이길보라 감독을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아라이의 이야기를 통해 담아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감정선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여러번 했는데

작가의 환경과 작가의 노력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읽었다.

감정적이지 않게 양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아라이의 생각이나 입장을 통해서 현실의 모순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필력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어느 한쪽의 이야기로 치우쳤더라면 이렇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을 거 같다.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작품은 아주 많다.

하지만 계속 생각하게 하고, 계속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데프 보이스 시리즈,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는 읽는 이에게 적절하게 스며와 적절하게 적셔준다.

 

그 적절함의 수위를 잘 조절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작품들이 나와주길 바란다.

에이치를 통해서 에이치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을 수 있게 이해하고 도와준 미와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깊이 이해하고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감내하는 엄마의 마음.

에이치의 상황을 알고 사랑과 이해로 에이치를 지도했던 선생님과 대조적으로 에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눈총을 주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교육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서 들리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의료계나 범죄를 다루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들리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이제부터라도 배워간다면 앞으로 생길 상처들이 전보다는 많이 줄어들테니..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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