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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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무수한 돌멩이들에 걸려 넘어지건 그 돌멩이로 무엇을 조각하건, 생의 길은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이 어디로 이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욕망은 성취로 이어지고 만족으로 이어지지만 어떤 욕망은 그 욕망이 야기했다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죄의 길을 걷게 하기도 한다. 왜 욕망이 그런 길을 걷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길을 따라 계속 갈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꿈과 같다. 우리는 가끔 달콤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악몽을 꾸기도 한다. 꿈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현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는 다른 세계다. 비약과 우연, 숨막히는 긴장 등 꿈은 현실 원칙(중력의 작용이라는 물리적 조건이 있음에도 나는 상상하고 꿈꾼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꿈이 기나길게 연장한 것일지도 모른다.)을 뛰어넘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작된 영상을 통해 비약과 우연을 삽시간에 삽입하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한다. 꿈이 진정 짧은 시간(인간이 꿈을 꾸는 시간은 몹시 짧지만 대부분 그 서사는 선명하다) 동안 서사를 완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2시간이 못 되는 동안 생(生)에서 사(死)로 이어지는 길지도 모를 시간을 모두 안으려 한다. 이 시간성 역시 꿈과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꿈의 구조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개개의 꿈마다도 다르다. 그러나 누구나 선호하는 구조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무의식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박찬욱은 욕망의 길을 따라 걷다 악몽과 부딪히는 구조를 선호한다. 박쥐도 마찬가지다. 태주 씨(김옥빈)의 욕망도 상현(송강호)의 욕망도 결국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악몽이란 엄청난 긴장을 일으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후회까지 꿈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후회까지 하다니.
「박쥐」 두 주인공의 욕망은 전혀 다르지만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태주가 심심하고 지루한 인생을 깰 탈출구를 원했다면 상현은 좁은문을 원했고 자기 희생으로 신성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둘은 결국 쾌락으로 만나고 쾌락으로 재가 되어간다.
욕망은 결국 쾌락을 원하는 것이다. 쾌락에 대해 프로이트는 긴장을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죽음충동과 만난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참조) 그런 면에서 그 둘의 욕망이 그 둘을 재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달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툭하고 떨어져 버릴 재에 이르기 위해 그 둘은 악몽의 시간을 지낸다.

박찬욱은 마치 악몽처럼, 영화 속에 가장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담는다. 특히 이번 영화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그것들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은 것 같다.
인물들간의 관계를 보자.
우선 뱀파이어와 신부라는 두 주인공의 관계가 눈에 띈다. 이 조합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꿈속까지 쫓아왔던 <엑소시스트>다. 물론 명확히 말하자면 엑소시스트에 등장한 소녀가 뱀파이어는 아니지만 결국 사탄에 씌인 가녀린 존재로 신부를 시험에 들도록 하며, 태주의 가녀린 육체는 이 소녀를 떠올리도록 한다. 그밖에도 뱀파이어와 신부의 결합은 고전적 뱀파이어 스토리 테오필 고티에의 약 200년 전 단편 소설「죽은 연인」(『뱀파이어 걸작선』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소재다. 이는 곧 선과 악에 대한 질문과 맞닿는다.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구절 ‘내 피를 마시라’는 구절처럼, 성경에선 종종 피에 대한 상징적인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한 영화들도 많다.) 종교에 대한 문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상현 스스로 시험에 들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실험을 자원했다는 점을 통해 쾌락과 성스러움의 문제에 대한 질문도 가능하다. 상현이 따른 길이 좁은 가시밭길이었는지 악마의 속삭임(지나친 희생에 대한 관념은 어쩌면 희생이라는 악마가 먹이를 얻기 위한 유혹의 속삭임일 수 있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 -팡세, 455(-863)’)
태주와 상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유혹하는 이브와 아담이라는 자극적인 주제 역시 끌어올 수 있다. 강우를 강에 빠뜨려 죽인 뒤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모습과도 같다. 태주는 동정심과 인간적 감정을 이용해 상현을 죄의 굴레로 끌어들인다.
이상하고 지독한 애정을 가진 엄마와 저능아 아들, 요부 기질을 가진 듯한 부인이라는 결합, 게다가 그들 가정은 버려진 딸이 며느리가 되는 극도로 신경증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마지막으로 상현이 죽인 그의 눈먼 스승을 통해, 사제 지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부인 스승은 보고 싶다는 정념을 버리지 못하고, 상현은 결국 그를 찔러 죽이며 사제 지간도 지독하게 강렬하고 기묘한 관계로 그려진다.
 

이러한 자극적인 관계들은 강렬한 영상(개인적 환상에서 최악이라 평가될만한)을 덧입는다.  
우선,
온몸에 고름이 터져나올 듯한 종기가 돋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병, 그 병이 심해지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역시 끔찍하다. (영화 <미션>에서 신부님(제레미 아이언스)이 오보에로 성스러움을 실현했을 때의 감동을 역전시키듯 상현은 리코더를 불다 그 구멍으로 피가 튄다.)
맨발로 새벽 거리를 뛰는 여자(그녀의 가녀린 발목), 서로의 팔목에서 피를 빠는 남녀, 이를 지켜보는 시선(그들의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과연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하는 의문(카스테라 이야기를 했던 극 초반의 남성과 강우의 어머니 라 여사)은 관음증을 이중으로 건드리며 각 장면을 훨씬 더 자극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귀를 찢는 낚시바늘까지 나온다. 락앤락에 피를 담아 쪽쪽 빨아먹기도 한다. 이 정도면 자극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컬렉션의 조합은 너무 쥐어짜는 느낌이 강하다. 한번 볼래, 어디까지 가는지 하는 느낌. 그래서 한번 보지 뭐, 하고 싱거워진다. 원래 판을 깔아주면 하던 미친짓도 하기 싫어진다. 이미 판이 너무 깔려서 아무리 미친 짓을 해도 그만 그런가보다 하게 된다.
게다가 태주의 캐릭터, 이상하게 냉소적이며 아무런 활력도 없다가 갑자기 쾌활하고 순진무구하며 잔인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순수하게 재미와 호기심만을 위한 충동에 휩싸인 아이 같은 캐릭터도 새롭지 않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자주 보아왔기 때문일까?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워, 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좀 재미가 덜했다. (그래도 김옥빈이 연기는 잘 했다.)
마지막으로 사디즘적인 욕구를 강렬하게 표출하는 각종 물고 찢고 죽이는 장면 외에, 상현이 나병 환자인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마지막까지 그가 목숨을 포기하고 죽겠다고 결심한 직후에도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지고 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신은 없다는 것을 당당히 그들에게 전시하기 위해서인가? 굳이 이런저런 해석도 가능할 테지만, 이미 앞에서 충분히 자극의 압박을 했기에 멍해지고 만다.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판타지(강렬한 영상)와 현실(인물간 관계-특히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관계-의 찌질함의 극치, 갑자기 튀어나오는 현실적인 욕설)의 기묘한 조합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기묘하게 뒤틀려있고 생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역겨워 보일 때까지 그 집착을 드러낸다. 현실에서 감추고자 했을지도 모를 것들을 그는 까발린다. 그리고 즐기라고 한다. (관음증이란 이런 것일까?)


박찬욱의 영화 속에서 환상과 현실은 다르게 만난다. 아마 박찬욱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환상, 관계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부서지지만(상현이 태주에게 내뱉는 “이 씨발년아” 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없다. 태주가 상현에게 평온한 가정에 나타나서 가정을 망쳐놨다는 비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잘 되면 내탓, 잘못되면 남탓인데, 이건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신 새디즘적인 환상과 악몽 같은 영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벌여나간다. 대부분의 영화가 소망 충족이라는 형태로 판타지를 전시한다면, 박찬욱은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강을 건넌다.  
그래서인지 박찬욱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대하게 된다. 그 기대 심리의 이면에는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심사를 뒤틀어놓을까 하는 그런 작용이 있다. 사람은 이런 기묘한 데에도 기대를 품게 된다. 박찬욱은 관객의 이런 뒤틀린 기대 심리를 주무른다. (<박쥐>를 보며 때때로 그가 그 기대 심리를 응시하고 그 시선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박찬욱은 욕망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우리를 어렵게 하고 우리를 미칠듯이 괴롭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괴롭히는 방식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야기한다. 누구나 모순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단정하고 깔끔한 삶을 살기에 생은 길고 길며 우리가 원하는 스펙트럼은 너무 넓다. 그래서일까? 그는 욕망과 불쾌 사이의 줄 위에서 놀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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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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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뒤 부끄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현정의 그 말이 부끄러웠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게 부담스럽다. 왜냐면 말이 끌고 오는 거짓과 ‘척’이 쪽팔려지는데 사실 자신조차 자신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말의 폭포 중 어느 지류가 거짓이고 어느 지류가 척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도 당위적인 정황과 때론 진심이라는 오해 속에서 말을 내뱉지만 결국은 말은 말의 속성을 버릴 수 없다. 나는 또 어떤 척과 거짓을 말할 것인가. 또 어디서부터 척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이며 진실인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말을 하는 당사자인 내가,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 입 닥치고 묵언 수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결국 말이 아닌 것으로 생각을 전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나는 묵언수행은 포기했다.
(나는 미끄러졌다)

생각해보면 홍상수는 내가 어느 감독 영화를 다 본, 내가 인지하기로는 국내에는 유일한 감독이다. 그렇기에 그의 변화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던 기억. <강원도의 힘>이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나는 웃지 않았던 것 같다. 비디오에 테입을 넣고 보던, 아직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라고 기억하지만 어쩌면 학부 초년생이었는도 모르겠다)이라고 기억하기에 그의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의 세계가 상당 부분이 거의 완전 신세계였다. 그러므로 기억 속 그 영화는 우울하고 어두웠다. 그의 영화 속 우울이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극장전>부터인가, 나는 그의 영화에 웃기 시작했다. 거의 대폭소를 터뜨렸다. <해변의 여인>에서도 <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십대 중반을 넘어선 시기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홍상수가 위트를 가졌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다. 그러나 어딘가 조금은 구멍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의 방식이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관계에서 비틀어지는 속물성을 그리고 있고 그 안에서 있는 척 하지만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다시 조우하는 인간들을 그린다. (그 조우의 주인공은 타인을 통한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부드러워졌달까. 그런 느낌이다. 약간은 춤과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몇 번의 상황의 반복이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관계를 따져보자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관계도 더럽다. 감독들이나 예술가들은 여배우나 친구(선후배)의 여자를 속된 말로 따먹는 데 혈안이 돼있고 그런 관계를 여자들 역시 이용하거나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니까 다 같은 놈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데 이 위선과 위악의 들판을 적어도 구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어쨌든 한번은 다 봤지만, 그의 영화가 어떻게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지 모른다. 저렇게 솔직하기 힘들어서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도 같지만 실은 그것도 오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잘 알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왜 그의 영화를 보는지도 잘 몰랐다. (실제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보고 난 뒤 대단히 불쾌했다) 그런데 실은 여기저기 그런 관계들이 널려있다. 또한 자칫하면 그 관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꼭 원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잠깐 눈 떠 보면 그 안에 있다. 그게 인간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의 단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의 프레임은 다른 프레임과 차별점이 있다. 이 프레임을 지켜나가면서 변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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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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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부터 열심히 봤다. 그전부터 보긴 했지만, 어제 저녁부터 열심히 본 셈이다.

상대성 원리란

에너지와 질량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c은 빛의 속도의 제곱을 말하며

이 책은 친절하게 에너지 개념을 이끌어낸 페러데이(전기력과 자기력의 상호 작용을 통해), 등호(=) 개념을 상용화시킨 레코드, 질량 보존을 발견한 라부아지에, 빛의 속도를 알아낸(?) 뢰머, 빛의 파동성(얼싸안기mutual brace라고 표현된)을 알아낸 맥스웰, 왜 제곱이 붙어야 하는가 하는 데는 힘을 측정하는 데 필요한 공식 mv을 알아낸 샤틀레와 볼테르에 대한 소개가 그들에 대한 일화와 함께 나온다.

그리고 나서 아인슈타인 특허국 직원으로 일하던 1905년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생각하게 되고 발표하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에 대한 해설도 나온다. 뒤편에는 상대성 이론이 핵폭탄으로 상용화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독일의 하이젠베르크와 연합국의 여러 과학자들)가 꽤 길게 나온다.

책의 마지막 장은 E=mc이 전 우주의 작동을 설명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태양 또한 이러한 수소 핵분열을 통해 에너지를 내뿜어 우리를 살게 하고 우주 또한 그렇게 핵분열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핵분열로 블랙홀이 설명되고 우주의 미래가 그려진다.

이를 위해 핵 분열 방법을 알아낸 마이트너와 오토 한, 태양이 수소로 이루어진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낸(그전까지 태양이 철이라는 게 스펙트럼 분석을 통한 공식적인 생각이었다) 페인, 수소 핵 분열 이후 내부 폭발에 의해 온도가 올라가 헬륨 핵 분열을 시작하고 탄소 핵마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밝혀낸 호일(이는 우주의 탄생까지 짐작 가능하게 한다), 블랙홀과 태양의 마지막이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밝혀낸 찬드라세카르 등에 대해 소개된다.

신기하다. 핵이라는 미세한 영역에서부터 우주라는 거대한 영역까지 아우르는 어떤 공식이 있고, 그것은 질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이다. 질량이 에너지로 환하기 위해 필요한 빛의 속도의 제곱. 이런 책들을 보다 보면, 이 세계의 모든 것들 중 정지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느 정도 안정된 움직임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은 엄청나게 미세하게 바라보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결국 아인슈타인 이론은 공간과 시간의 휘어짐이라는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서 시간이란 것도 각각의 질량에 따라 다른 값을 가지게 되며, 그러므로 절대적 시간 개념이 부서지고 공간 개념도 또한 부서진다. 여기서는 휘어짐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겨우 부록까지 읽고 나니 대강이나마 알겠다 싶더니 이제 쓰려니 또 너무 어렵다. 원래 물리적 지식이 너무 부족한 상태라 더욱 그렇다.

그저 내가 지금 그나마 짐직할 수 있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이다. 질량은 빛의 속도의 제곱에 이르는 운동을 하게 되면 에너지로 환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

또한 우주는 점점 이 핵분열 과정을 거치며 블랙홀이 많아지고 텅 비어간다고 한다. 그것은 거대하고 또한 어딘가 나의 미약함 때문일까?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막막하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다 보면 인간의 삶이란 게 대단히 이상해진다. 어제는 이승하 선생님의 「지금 빛나는 것은 다」를 다시 읽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강, 자아와 타자 사이에 놓인 강, 물질과 非물질 사이에 놓인 강이 너무 아득하다.




그렇지 않아도 『코펜하겐』이 연극으로 상연 중이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다시 한번 코펜하겐(희곡)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하이젠베르크를 지독한 나치주의자로 그려내며 어느 정도 연합국은 정의라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에게는 하이젠베르크의 고뇌가 없지 않았으리라. 그런면에서 희곡 코펜하겐은 아름답다. 물론, 객관적인 자료들은 그가 원자폭탄을 만들고 싶어했으나 어떤 능력 부족으로 못 만들었다는 의견을 유력하게 하지만, 실은 그의 내면에 어떤 고뇌가 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가정할 수 있을 뿐이고 코펜하겐은 아름다운 가정을 보여준다.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가정. 말하자면 인간을 무수한 고뇌(떨림)를 간직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 나타난 사실을 바탕으로 정보를 쥐어짜내 종합하기 보다는, 그의 떨림을 보여주는 것. 나는 작가의 임무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친놈, 살인자에게도 떨림이 있고 사랑이 있다.

부록에 나온 책들을 보고 싶은데, 우리 나라에는 번역되지 않은 게 좀 많은 듯 하다.







-지금 빛나는 것은 다




풀벌레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

마냥 좋구나 그대 곁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니

온통 별이야 때때로 별똥별이 떨어지다 사라지고 말아

그대, 무슨 말이라도 하렴 22년의

괴로움과 온갖 슬픔 마침내 끝났으니 오죽이나 좋아

그런데 별빛은 光年을 달린다

수십, 수백, 수천 광년을 달리면

 (1광년은 9,467,000,000,000㎞라는군)

가물가물 반짝이는 한 개의 작은 점

 (작은 점들의 지름이 얼마인지 말한 필욘 없겠지)

아냐 별은 반짝이지 않아 스스로 쉼 없이 타올라

빛을 내고 있지 빛으로 존재하는 수천억의 별

별빛은 광년을 달린다 별과 별 사이

별과 행성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성간 물질을 헤치고서

타오르는 별만이 스스로 존재하지

그대와 나는 타오를 수 없었을까

타오르다 타오르다 초거성으로 폭발하지 않으면

차차 식어 백색 왜성으로 숨거둠을 알지만

그대와 내가 떨리는 손 내밀면 따뜻한 교류

아물지 않은 서로의 상처까지 보여줄 수 없었을까

그대, 아무 말이라도 좋아 듣고 있을게

내 제일 가까웠던 사람 태양계 밖 제일 가까운 별은

켄타우루스자리의 프록시마란 별이라는군 제일 가깝다는 게

지구와 태양 거리의 40만 배라고 해 우와 40만 배

그대와 나의 거리는 40만 배의 40만 배보다 더욱 멀다

여름밤 풀 향기 그윽한 그대 무덤가 찾아와 벌렁 누워

추억한다 아련한 머릿결 냄새 때때로 글썽거리던 두 눈

스물세 살이었다 차가운 별은 없지 그러나

타오르는 것은 다 식는다 지금 빛나는 것은 다




-이승하, 『사랑의 탐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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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靈魂과 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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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여름 나는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이 떠오른다 

 

나무를 가꾸는 방식으로 구름을 가질 수 있다면...... 

 

그해 여름 나는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구름의 형상과 구름의 습기는 무관한 것인가 

구름이 물고 가는 것은 나의 상상력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고 스스로를 다시 선택할 때 

구름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아름다운 방향과 

치어 죽은 고양이와 새들의 영혼이 추스르는 

조각난 뼈와 살점들 

 

골목에서 담장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는 구름  

 

1999년 그 여름의 습도는 전부 형상을 가졌지만 

사라진 동물들의 꼬리에서 다음 해가 이어졌다 

 

나는 한결같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생각에 매달린다 

 

전쟁은 분명하지 않으며 

매번 다시 죽기 위해 

 

구름은 구름의 뒤를 물고 

치어 죽은 동물들은 더욱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이다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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