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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가 끝난 뒤 부끄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현정의 그 말이 부끄러웠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게 부담스럽다. 왜냐면 말이 끌고 오는 거짓과 ‘척’이 쪽팔려지는데 사실 자신조차 자신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말의 폭포 중 어느 지류가 거짓이고 어느 지류가 척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도 당위적인 정황과 때론 진심이라는 오해 속에서 말을 내뱉지만 결국은 말은 말의 속성을 버릴 수 없다. 나는 또 어떤 척과 거짓을 말할 것인가. 또 어디서부터 척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이며 진실인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말을 하는 당사자인 내가,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 입 닥치고 묵언 수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결국 말이 아닌 것으로 생각을 전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나는 묵언수행은 포기했다.
(나는 미끄러졌다)
생각해보면 홍상수는 내가 어느 감독 영화를 다 본, 내가 인지하기로는 국내에는 유일한 감독이다. 그렇기에 그의 변화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던 기억. <강원도의 힘>이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나는 웃지 않았던 것 같다. 비디오에 테입을 넣고 보던, 아직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라고 기억하지만 어쩌면 학부 초년생이었는도 모르겠다)이라고 기억하기에 그의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의 세계가 상당 부분이 거의 완전 신세계였다. 그러므로 기억 속 그 영화는 우울하고 어두웠다. 그의 영화 속 우울이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극장전>부터인가, 나는 그의 영화에 웃기 시작했다. 거의 대폭소를 터뜨렸다. <해변의 여인>에서도 <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십대 중반을 넘어선 시기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홍상수가 위트를 가졌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다. 그러나 어딘가 조금은 구멍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의 방식이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관계에서 비틀어지는 속물성을 그리고 있고 그 안에서 있는 척 하지만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다시 조우하는 인간들을 그린다. (그 조우의 주인공은 타인을 통한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부드러워졌달까. 그런 느낌이다. 약간은 춤과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몇 번의 상황의 반복이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관계를 따져보자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관계도 더럽다. 감독들이나 예술가들은 여배우나 친구(선후배)의 여자를 속된 말로 따먹는 데 혈안이 돼있고 그런 관계를 여자들 역시 이용하거나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니까 다 같은 놈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데 이 위선과 위악의 들판을 적어도 구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어쨌든 한번은 다 봤지만, 그의 영화가 어떻게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지 모른다. 저렇게 솔직하기 힘들어서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도 같지만 실은 그것도 오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잘 알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왜 그의 영화를 보는지도 잘 몰랐다. (실제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보고 난 뒤 대단히 불쾌했다) 그런데 실은 여기저기 그런 관계들이 널려있다. 또한 자칫하면 그 관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꼭 원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잠깐 눈 떠 보면 그 안에 있다. 그게 인간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의 단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의 프레임은 다른 프레임과 차별점이 있다. 이 프레임을 지켜나가면서 변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