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전인철 연출 

 윤영선 극 

 

-어느날 들이닥친 이웃들 

이웃과의 상생을 도모하자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독문학 전공 교수 김가형과 그의 가족들이 연말 무렵 시골로 이사온다. 집은 왠일인지 너무 쌌고 그것을 행운으로 여기던 그들 가족에게 들이닥친 화해의 길닦기 클럽 마을 주민들. 동장과 노망 든 할아버지, 오로지 청소밖에 모르는 여자, 시끄러운 여자, 삼수생이자 시인지망생 홍모씨까지. 그들은 점점 멋대로 집을 점령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 늦은 밥 그들을 내쫓지 못하고 맞이할수밖에 없던 교수는 그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점점 그들의 무례는 도를 넘어선다. 마침내 김희아란 남자가 들어서며 그들의 정체는 가족들로 드러나고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방식으로 집 1층을 지배하지만 인텔리인 김가형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맞서지 못한다.  

지식인 계층의 허위 의식과 배우지 못한 이들의 무례를 동시에 폭로하는 이 작품은 두 계층 사이의 화합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말로만 상생과 조화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가를 보여주는가 하면 각각의 캐릭터로 극 전체를 압도한다. 못배웠기에 그게 한이고 그런 만큼 더더욱 예의바른 듯한 방식으로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을 몰아가는 동장, 초등학생 때 청소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에 몰입하는 청소하는 여자 등등은 극을 풍성하게 한다. 희안한 방식의 폭력, 말로만 화합을 떠들기에 인각 각자의 삶과 그에 따르는 성격, 숨겨진 본성은 얼마나 기괴한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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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 - Fight Club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과연 이 시대에 혁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소비의 시대, 물질의 시대, 자본의 시대, 돈만 강물처럼 흐를 뿐 의식이 부재하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파이트 클럽”은 이 시대의 혁명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질문하는 영화이다.

햇빛조차 쐬지 못한 듯 허여멀건한 피부에 유약한 이미지의 에드워드 노튼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독백을 읊으며 소비만이 유일한 유희가 되어버린 시대를 비판한다.
그 역시 시대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자동차 리콜 심사관인 잭은 스웨덴 산 고급 가구로 집안을 장식하고 고급 메이커의 옷을 입는 것으로 인생의 여가시간을 채워 나간다.
또한 모임 중독자가 되어 각종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집에 일어난 폭발은 그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영위토록 변화시키고, 그러한 변화는 이제까지의 삶에 대한 반란으로 귀결된다.
바로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라는 잭과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의 인물과의 만남이 그 전환점이 된다.
그는 충실히 욕망에 따라 폭력을 즐기고 가족영화 필름에 포르노 장면을 부치는가 하면 고급 레스토랑의 스프에 자신의 소변을 첨가시키며 이 지루한 시대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대는 인물이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의 불타는 구두는 ‘파이트 클럽’이라는 모임을 통해 점차 불길이 번지며 대형 참사로 변해간다.
다른 구역으로, 다른 도시로, 그리고 도시의 일꾼들은 모두 파이트 클럽의 멤버가 되어 타일러 더든은 혁명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완벽한 카리스마를 갖춘 슈퍼맨은 자본에 소속되어 자신의 희망과 꿈을 포기한 이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당장 다시 너의 꿈을 찾으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행성처럼 즐비한 스타벅스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신용이라는 이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카드 회사를 전부 폭파해버릴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이 얼마나 멋진가.
무기를 들고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우매한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 지도자, 타일러 더든.

그러나 영화는 한낱 꿈이고 혁명은 일장춘몽 같은 것.
“파이트 클럽”은 결코 헛된 망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영상을 통해 현실을 포장하는 영화의 미학을 그대로 폭로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없습니다.’라고.
단지 정신병자, 이중인격자가 존재할 뿐이다.
영화 중반부부터 “파이트 클럽”은 최고의 반전(反轉) 영화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뛰고 싶은 일상인들처럼 일탈을 꿈꾸던 잭은 다른 인격을 만들어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혁명을 실행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 잭이 왜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그가 왜 매일 밤 죽고 다시 태어났는지 이제는 확실해진다. 관객은 스쳐지나간 대사 하나하나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깨어나며 변화를 원했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은 타일러 더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환영이라는 것.
그의 구원자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정신이상자였다는 것.
신에게,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마저 버림받은 잭은 슈퍼맨처럼 머리에 총으로 구멍을 뚫고도 살아남아 자신과 다르지 않은 미아 같은 여자 말라를 안고 자신이 꾸민 지상 최대의 쇼를 감상한다.

“파이트 클럽”은 가슴 한 구석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구멍을 점차 확대시킨다.
혁명은 있으되 진실한 혁명, 온전한 백퍼센트의 혁명가는 없기 때문이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이중인격자로 분하여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에드워드 노튼은 다시 한 번 관객을 속이는데 성공했을 뿐.
혁명가는 거짓이며, 영화는 거짓말이라는 유희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영화가 끝나면 다시 이 시대의 지상최대 유희는 소비이며, 사회를 굴리는 최고의 시스템은 그대로 신용인 것처럼. 

 

-이제와 생각해보면 좀 더 정신분석학적인 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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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샘 - I Am Sam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눈물이 질질 흐르는 영화.
주인공이 말했었지.
마음을 아무리 말하려해도 다 되지가 않는다고.
또 눈물이 질질 흘렀었지.
가족은 참 눈물 나게 하는 존재.
비틀즈 음악을 듣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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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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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디스 월드 - In This Worl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고 나와서 세상이 달라 보이는 영화,

내가 서있는 광화문 땅이 달라 보이는 영화였다. 


 

야윈 사람들
The Thin People


-실비아 플라스


그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영화 스크린에 나오는
창백한 사람들처럼 빈약한 체구의

야윈 사람들. 그들은
實在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들이 굶주려 야위어가고,
평화가 가장 인색한 식탁 밑에 있는

쥐들의 배를 불룩하게 해 줄 때도
그들의 꽃대같은 四肢를

다시는 살찌우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영화 속에서였다고, 또 우리가 어릴적

불길한 記事거리를 만들어 주던 전쟁 때문이었다고.
그 긴 굶주림과 싸움 끝에

그들은 야윔 속에서 견디며
훗날 우리의 악몽 속에 들어오는

재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위협은
총이나 욕설이 아니라

야윈 침묵.
벼룩에 뜯긴 당나귀 피부에 감싸여,

불평도 없이, 언제나
양철컵에서 식초를 따라 마시며, 그들은

제비뽑힌 속죄양의 참을 수 없는 圓光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야위고

그처럼 잡초같은 종족은 꿈속에만 머무를 수 없었고,
머리 속의 축소된 나라에서

異國의 희생자들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마치 진흙 오두막에 사는 노파가

밤마다 뜰에 발을 내민 달을
칼로 잘라내어

마침내 조그마한 빛의 껍질로 남을 때까지
그 관대한 달의 허리에서

살찐 고깃조각을 잘라내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듯이.
이제 야윈 사람들은 새벽 어스름이

푸르스름해지고 붉어지며, 이 세계의
윤곽이 또렷해지고 색깔로 가득찰 때

그들 자신을 말살하지 않는다.
그들은 햇빛 비치는 방 안에서 살아간다. 겹장미와

수레국화가 그려진 작은 벽은
그들의 야윈 입술의 미소와

시들어가는 主權 밑에서 창백해진다.
서로를 버텨주는 그들!

우리에게는 그들의 용맹한 大軍을 막을
요새가 되어 줄 만한 풍요롭고 깊은 황야가

없다. 보라, 야윈 사람들이 그저 숲속에 서 있으면서
이 세상을 장수말벌의 둥지처럼 야위게 하고

더 창백하게 만들 때면, 어떻게 나무 줄기가 평평해지고
그 좋은 갈색을 잃게 되는가를.

그들이 뼈 하나 꼼짝않아도. 

 

-양식 있는 척 굴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는 굶어죽고 누군가는 배 터져 죽는 게 당연한 세상이란 것도 이제 더 잘 안다. (그게 우리의 비참이고 타락의 모든 증거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 영화의 존재 의의를 무조건 비아냥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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