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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 - Fight Club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과연 이 시대에 혁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소비의 시대, 물질의 시대, 자본의 시대, 돈만 강물처럼 흐를 뿐 의식이 부재하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파이트 클럽”은 이 시대의 혁명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질문하는 영화이다.
햇빛조차 쐬지 못한 듯 허여멀건한 피부에 유약한 이미지의 에드워드 노튼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독백을 읊으며 소비만이 유일한 유희가 되어버린 시대를 비판한다.
그 역시 시대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자동차 리콜 심사관인 잭은 스웨덴 산 고급 가구로 집안을 장식하고 고급 메이커의 옷을 입는 것으로 인생의 여가시간을 채워 나간다.
또한 모임 중독자가 되어 각종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집에 일어난 폭발은 그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영위토록 변화시키고, 그러한 변화는 이제까지의 삶에 대한 반란으로 귀결된다.
바로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라는 잭과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의 인물과의 만남이 그 전환점이 된다.
그는 충실히 욕망에 따라 폭력을 즐기고 가족영화 필름에 포르노 장면을 부치는가 하면 고급 레스토랑의 스프에 자신의 소변을 첨가시키며 이 지루한 시대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대는 인물이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의 불타는 구두는 ‘파이트 클럽’이라는 모임을 통해 점차 불길이 번지며 대형 참사로 변해간다.
다른 구역으로, 다른 도시로, 그리고 도시의 일꾼들은 모두 파이트 클럽의 멤버가 되어 타일러 더든은 혁명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완벽한 카리스마를 갖춘 슈퍼맨은 자본에 소속되어 자신의 희망과 꿈을 포기한 이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당장 다시 너의 꿈을 찾으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행성처럼 즐비한 스타벅스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신용이라는 이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카드 회사를 전부 폭파해버릴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이 얼마나 멋진가.
무기를 들고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우매한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 지도자, 타일러 더든.
그러나 영화는 한낱 꿈이고 혁명은 일장춘몽 같은 것.
“파이트 클럽”은 결코 헛된 망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영상을 통해 현실을 포장하는 영화의 미학을 그대로 폭로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없습니다.’라고.
단지 정신병자, 이중인격자가 존재할 뿐이다.
영화 중반부부터 “파이트 클럽”은 최고의 반전(反轉) 영화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뛰고 싶은 일상인들처럼 일탈을 꿈꾸던 잭은 다른 인격을 만들어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혁명을 실행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 잭이 왜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그가 왜 매일 밤 죽고 다시 태어났는지 이제는 확실해진다. 관객은 스쳐지나간 대사 하나하나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깨어나며 변화를 원했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은 타일러 더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환영이라는 것.
그의 구원자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정신이상자였다는 것.
신에게,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마저 버림받은 잭은 슈퍼맨처럼 머리에 총으로 구멍을 뚫고도 살아남아 자신과 다르지 않은 미아 같은 여자 말라를 안고 자신이 꾸민 지상 최대의 쇼를 감상한다.
“파이트 클럽”은 가슴 한 구석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구멍을 점차 확대시킨다.
혁명은 있으되 진실한 혁명, 온전한 백퍼센트의 혁명가는 없기 때문이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이중인격자로 분하여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에드워드 노튼은 다시 한 번 관객을 속이는데 성공했을 뿐.
혁명가는 거짓이며, 영화는 거짓말이라는 유희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영화가 끝나면 다시 이 시대의 지상최대 유희는 소비이며, 사회를 굴리는 최고의 시스템은 그대로 신용인 것처럼.
-이제와 생각해보면 좀 더 정신분석학적인 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