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와 겐이치로 세트 - 전2권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A. 

노인 문제를 다루는가 하면 세계가 망해가는 모양새에 대해서 자기 멋대로 상상하거나 해석하거나 하는가 하면 젊은이들의 세계, 혼자인 사람들의 세계 같은 것을 그린다. 게다가 AV 찍는 회사에서 일하는 남자가 어떻게 배우를 만나게 되는가(정말 젊은이의 시선이다)하면 원조교제를 하는 여자애를 다루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너무 천연덕스럽다. 전혀 “이게 진짜야, 내가 말해줄게” 이런 느낌이 아니다. “그냥 그런 거지, 뭐.” 이런 느낌이다. 코끼리를 기르는 오츠베르가 코끼리를 기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길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코끼리를 받기 위해 네트워크에 대해 애완동물 가게 점원과 하는 대화가 훨씬 길다. 그런가 하면 아사로 죽어가길 택한 여자애는 마지막으로 남자친구에게 “나 사랑해?”라고 묻는다. 미야자와 겐지의 「주문 많은 요리점」은 AV 배우를 섭외하는 남자 이야기가 되고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는 책과 인간에 대한 다른 종의 상념이 뒤범벅된 이야기가 된다. 불경을 외는 아톰이 나오고 고양이 사무소에 나가 연필을 깎는 일을 하는 무직 시대의 인간이 나온다. 그런 이야기들 어딘가에서는 소외의 극지점을 찌른다. 거기 그 극지점에 혼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단어의 의미는 모두 빠져나가고 소외소외 해봐도 ‘그래서 뭐?’라는 기분밖에 안 남은 현대성의 한 지점을 이런 식으로 매만질 수도 있다니.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미덕인가 보다.

종종 친구들과 만나 점점 세상이 망해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늙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인류는 실패라도 다음 인류는 뭔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아련하고 절박할지도 모를 그런 의문이 고개를 쳐들 때가 있다. 이 소설책은 종종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인간이 누군지도 모르고 결국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이 이상한 동물이 이 생에는 실패한 것 같은데 다음 인류는 좀 더 나아질까 하는 그런 질문 같은 것이 맴돈다.

그럼에도 모든 소설은 쿨하다. 전달하려는 느낌에 충실하며 단지 그럴 뿐이야다.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것은 없다. 자연스럽다. 요새 내 뇌속엔 윤리에 대한 강요, 논리에 대한 강요가 가득한데 오랜만에 시원하다. 뇌가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동화도 한 편 있는데(「수선월의 4월」) 그 동화는 아름답다. 결국 자아와 죽음, 삶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동화인데 눈이 내리는 설원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어딘가 기묘하게 아름답다. 
 

 

 

B. 

 

즐기고 있는 건지 비판하자는 건지 그 지점조차 모호하다. 근데 그게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실은 인간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는 즐기고 어느 정도는 비판하며 산다. 그 지점이 실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모호해지지만 어딘가 걱정스럽긴 하다. 그래서 쓸쓸해지기도 한다. 이게 사람이 살고 있는 모습이라니 하면서.

「영결의 아침」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낭독회(왕따라든가 실직 가장)의 한 단면

「돌배나무-크람본 살인사건」은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일하는 직업남의 이야기+오래된 음식을 먹는 은둔형 외톨이 이야기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남성들 이야기-세계는 페니스와 음문으로 이루어졌다는 해석

「봄과 아수라」-치매 노인+무관심한 가족들에 대한 기록

「푸리오신 해변」-성매매+각각의 인간과 각각의 사물의 꿈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

「가죽 트렁크」-내일 세상이 끝나라는 소리를 배경으로 딸과 아빠 사이의 대화-결국 세상은 미묘해라는...

「겐쥬 공원의 숲」-에로 게임에 빠진 초딩4학년 -엄마, 아빠, 형도 아이템이 되는 세계

「안방 동자 이야기」-말없는 아이의 친구 네로는 누구인가

「가돌프의 백합」-계속되는 꿈+밀실 살인 사건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기막힌 지점들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봄과 아수라」라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제목이 이런 소설로 태어날 수도 있다니, 어디에도 봄에 대해서도 아수라에 대해서도 쓰여져 있지 않지만 너무나도 어울린다.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걸까? 그런데 그 지점에서 태풍이 치고 있는 것처럼. 「가돌프의 백합」은 하루의 기억을 가진 남자에 대한 꿈이 계속되는 이야기인데, 깨어나도 꿈, 깨어나도 꿈인 이상한 세계를 밀실 살인 사건과 연결지어 놓았다. 이것이야말로 밀실인가, 싶다. 가끔, 이렇게 아무리 깨도 꿈인 이런 꿈을 꾼 날은 정말 지독하게 최악이다. 누구나 이런 꿈을 꾸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끔 꾼다. 그리고 최악이다. 그런데 이렇게 쓸 수도 있다니. 어쨌든 한번 읽으면 눈을 뗄 수 없다. 거의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읽기 시작하면 계속 읽었다. 혼자 방에서 읽다가 엄청나게 웃었던 적도 있다. 소설이 아직도 이럴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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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성, 그 초월의 과정에서 인간성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인간적이 된 그런 인간성만이 이 역사적 사건(아우슈비츠)에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中




누구나 자신의 삶에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한때를 갖는다.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가버린다. 한나에겐 마이크와 함께한 여름날이 그러한 한때였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단어들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가 그녀를 울리거나 화나게 했을 때, 그때 그녀는 경이로웠고 환희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언어와 의미에 대해 깨닫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비의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는 일이며,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을 느끼는 일이다.

<더 리더>의 아이러니는 동물성의 만남이라 할 수 있는 남녀의 만남이 이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고, 또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 관계는 복잡해서 단번에 알아챌 수 없지만 그 미묘한 얽힘이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일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역사와 만난다. 인간은 개체로서 살아가지만 사회적으로 관계지워진 까닭에 당신의 삶은 당신 시대의 역사에 한정지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은 서로간에 관계를 맺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역사가 먼저인지 개체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더 리더>의 한나와 마이크는 이러한 인간 조건 속에서의 삶을 전시한다. 한나는 마이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물론 자신이 글자를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개인적인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이크 역시 그녀의 수용소 감독 지원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린 소년과의 사랑을 자신의 의지로는 끊어낼 수 없으나 지속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감독관으로 지원하고 마이크와 함께했던 시간 깨달았던, 언어가 언어를 초월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유태인들에게 책을 읽도록 시킨다. 그리고 그 유태인들을 죽이도록 지명함으로써 그녀의 비인간성의 증거 자료를 만든다.

성은 개별성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인 충동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지적처럼, 마이크와 한나의 만남 역시 비인간적으로 시작해 인간성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결국 두 인물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사회적 위치에 대해 진지해져야만 하는 성인이 되고, 인간성을 찾는 순간엔 늙어버렸고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인간에서 인간성으로 진입하는 그 지점(마이크로부터 언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지점)에서 한나는 떨어져나갔으며, 그녀는 역사의 수레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아간다. 단지 계산을 좀 더 할 뿐이지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산이다. 결국 인간으로 넘어서는 지점에서 대부분 미끄러져 나간다.)

한나의 순수성은 여기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솔직하며 그것을 삶으로 끌어들인다. 동물이 자기 욕망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그녀는 마이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후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투옥 생활을 한 뒤 그녀가 한 말,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거지’라는 말 역시 그런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이는 또 다른 지점에서 초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재판장에서 했던 주장, 그 모든 일은 자신의 임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당당한 주장은 그녀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란 역사적 사건이 초월해 있는 지점에 대해 일반인들은 대부분 인간적이라 명명할 만한 어떤 감정을 연기하려 들지만, 한나는 그러한 연극(실제로 마이크의 대학 친구는 재판을 연극이라 말한다)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연극으로 삶을 꾸밀만큼 영악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런 한나를 직접 대면한다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문화로 치장하지 않은 인간, 인간성 자체를 대면한다는 것은 겁나는 일일 것이다.


한나는 나치 시대의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자신이 죄를 짓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염된 사회의 굴레 안에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죄있는 존재이기에 그녀가 무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더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대의 죄를 가장 순수하게 증류한 상태로 존재하는( 희생양의 신체는 사회 일반의 비인간성이 가장 순수하게 증류된 형태로 나타나는 지점이며, 그런 이유로 해서 죄로 뒤덮인 존재이다.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 그녀는 전혀 낯선 존재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는 언어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레비나스는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가 이런(희생양으로서의) 형용 모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나는 주체로 태어나는 순간, 그녀는 죽음만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합당한 행동임을 깨닫는다.  

아우슈비츠 사건에 대해 당사자가 뉘우친다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는 죽음만이지 않을까. 물론 이 죽음을 종용하는 것은 마이크다. 이전에도 그녀에게 주체로 태어나야 함을, 그녀가 감각이 있고 슬픔이 있고 능동적 기쁨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이는 소년 마이크였으며 그 요구에 대해 응답할 수 없었기에-실은 우리는 누구나 그 요구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없는 미숙한 이들이지만- 그녀가 조금 더 세계의 바깥-세계란 차라리 심연일 테지만, 누구도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누구나 다른 세계를 살고 있으므로 대화 자체가 어느 정도 불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으로 나아갔듯 감옥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마이크의 질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응답은 아마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이 그 죄를 죄 아닌 것을 만들 수 있는가. 마이크의 질문은 그녀를 다시 세계의 바깥으로 내모는 질문, 심연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마이크와 책을 쓴 유태인 여자가 만나는 장면에서 두 인물을 한번씩 클로즈업한다. 과연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미묘해진다. 마이크는 한나에게 가해자였던가, 혹은 감옥에서 모은 돈을 유태인 여자에게 바친 한나는 가해자인가, 대체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가, 상처 입은 이들, 죽은 이들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 명확한 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인간이란, 인간이 영위해나가는 삶이란 얼마나 미묘한가(유태인 여자의 집은 한나의 푼돈 따윈 필요치 않을 만큼 부유해보인다)?




역사의 폭력, 한 사회에 잠재된 폭력이 개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러나 아름답다. 문자라는 세계를 정렬하는 방식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예술이란 것(영화, 만화, 책, 음악 등등)은 결국 어느 정도는 기괴한 세계를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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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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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팡세를 읽다가 생각이 나 다시 읽었다. 인간 존재에 내재해있는 모순을 수렴하는 데 있어, 비슷한 논의를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성함과 비속함(악)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들에 대해 논의한다.

디오니소스 제전, 숭고, 무의식과 죽음충동, 유대교 신의 공포성, 법과 자유의 이중성, 순교, 희생양 등을 통해 테러의 이중적 의미를 분석한다. 결국 테러를 유발한 힘은 사회 내부에 있다는 이 인식은 개인으로 보자면 죽음과 삶의 관계와도 같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이라는 것의 특성을 인지한다. 또한 죽음으로만 생을 유지한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은 악의 축을 제정하며 그 사건의 원인을 규정 불가능하고 비역사적인 적으로만 간주했다. 이러한 서구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특히 프랑스 혁명), 철학적 개념들(칸트, 들뢰즈, 라캉, 지젝, 바디유 등), 문학작품들(특히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우리피데스),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아직 읽어보지 못함-로렌스), 비밀요원(역시 읽어보지 못함-콘래드)을 예로 들며 테리 이글턴의 기획대로 테러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을 하고 있다. 테러가 단순히 사회적 비판 행위라고 긍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테러에 대해 단순히 부정적인 적으로만 대응한다면 그 사회는 부활의 가능성을 닫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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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놀이 

  

아이들 공놀이를 하고 거짓말같이 공이 떠오르고 엄마는 멀리 그늘에서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고 손끝에 핏물 곱게 들고 나팔꽃 지지배배 몰래 울고 

 

지나갈 비가 지나고 거짓말같이 옷이 마르고 

 

공원에는 시작되는 연인들 끝나는 연인들 쌍을 지어 날아오르고 못 본 척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아이들 멈추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서, 내 오랜 엄마는 어둡고 

 

팬지는 차갑게 웃고 지고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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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진화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어제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리고는 영원한 침묵)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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