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성, 그 초월의 과정에서 인간성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인간적이 된 그런 인간성만이 이 역사적 사건(아우슈비츠)에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中
누구나 자신의 삶에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한때를 갖는다.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가버린다. 한나에겐 마이크와 함께한 여름날이 그러한 한때였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단어들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가 그녀를 울리거나 화나게 했을 때, 그때 그녀는 경이로웠고 환희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언어와 의미에 대해 깨닫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비의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는 일이며,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을 느끼는 일이다.
<더 리더>의 아이러니는 동물성의 만남이라 할 수 있는 남녀의 만남이 이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고, 또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 관계는 복잡해서 단번에 알아챌 수 없지만 그 미묘한 얽힘이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일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역사와 만난다. 인간은 개체로서 살아가지만 사회적으로 관계지워진 까닭에 당신의 삶은 당신 시대의 역사에 한정지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은 서로간에 관계를 맺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역사가 먼저인지 개체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더 리더>의 한나와 마이크는 이러한 인간 조건 속에서의 삶을 전시한다. 한나는 마이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물론 자신이 글자를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개인적인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이크 역시 그녀의 수용소 감독 지원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린 소년과의 사랑을 자신의 의지로는 끊어낼 수 없으나 지속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감독관으로 지원하고 마이크와 함께했던 시간 깨달았던, 언어가 언어를 초월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유태인들에게 책을 읽도록 시킨다. 그리고 그 유태인들을 죽이도록 지명함으로써 그녀의 비인간성의 증거 자료를 만든다.
성은 개별성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인 충동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지적처럼, 마이크와 한나의 만남 역시 비인간적으로 시작해 인간성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결국 두 인물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사회적 위치에 대해 진지해져야만 하는 성인이 되고, 인간성을 찾는 순간엔 늙어버렸고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인간에서 인간성으로 진입하는 그 지점(마이크로부터 언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지점)에서 한나는 떨어져나갔으며, 그녀는 역사의 수레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아간다. 단지 계산을 좀 더 할 뿐이지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산이다. 결국 인간으로 넘어서는 지점에서 대부분 미끄러져 나간다.)
한나의 순수성은 여기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솔직하며 그것을 삶으로 끌어들인다. 동물이 자기 욕망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그녀는 마이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후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투옥 생활을 한 뒤 그녀가 한 말,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거지’라는 말 역시 그런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이는 또 다른 지점에서 초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재판장에서 했던 주장, 그 모든 일은 자신의 임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당당한 주장은 그녀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란 역사적 사건이 초월해 있는 지점에 대해 일반인들은 대부분 인간적이라 명명할 만한 어떤 감정을 연기하려 들지만, 한나는 그러한 연극(실제로 마이크의 대학 친구는 재판을 연극이라 말한다)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연극으로 삶을 꾸밀만큼 영악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런 한나를 직접 대면한다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문화로 치장하지 않은 인간, 인간성 자체를 대면한다는 것은 겁나는 일일 것이다.
한나는 나치 시대의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자신이 죄를 짓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염된 사회의 굴레 안에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죄있는 존재이기에 그녀가 무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더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대의 죄를 가장 순수하게 증류한 상태로 존재하는( 희생양의 신체는 사회 일반의 비인간성이 가장 순수하게 증류된 형태로 나타나는 지점이며, 그런 이유로 해서 죄로 뒤덮인 존재이다.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 그녀는 전혀 낯선 존재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는 언어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레비나스는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가 이런(희생양으로서의) 형용 모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나는 주체로 태어나는 순간, 그녀는 죽음만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합당한 행동임을 깨닫는다.
아우슈비츠 사건에 대해 당사자가 뉘우친다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는 죽음만이지 않을까. 물론 이 죽음을 종용하는 것은 마이크다. 이전에도 그녀에게 주체로 태어나야 함을, 그녀가 감각이 있고 슬픔이 있고 능동적 기쁨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이는 소년 마이크였으며 그 요구에 대해 응답할 수 없었기에-실은 우리는 누구나 그 요구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없는 미숙한 이들이지만- 그녀가 조금 더 세계의 바깥-세계란 차라리 심연일 테지만, 누구도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누구나 다른 세계를 살고 있으므로 대화 자체가 어느 정도 불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으로 나아갔듯 감옥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마이크의 질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응답은 아마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이 그 죄를 죄 아닌 것을 만들 수 있는가. 마이크의 질문은 그녀를 다시 세계의 바깥으로 내모는 질문, 심연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마이크와 책을 쓴 유태인 여자가 만나는 장면에서 두 인물을 한번씩 클로즈업한다. 과연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미묘해진다. 마이크는 한나에게 가해자였던가, 혹은 감옥에서 모은 돈을 유태인 여자에게 바친 한나는 가해자인가, 대체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가, 상처 입은 이들, 죽은 이들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 명확한 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인간이란, 인간이 영위해나가는 삶이란 얼마나 미묘한가(유태인 여자의 집은 한나의 푼돈 따윈 필요치 않을 만큼 부유해보인다)?
역사의 폭력, 한 사회에 잠재된 폭력이 개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러나 아름답다. 문자라는 세계를 정렬하는 방식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예술이란 것(영화, 만화, 책, 음악 등등)은 결국 어느 정도는 기괴한 세계를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