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이 많은 요리점 힘찬문고 19
미야자와 겐지 지음, 민영 옮김, 이가경 그림 / 우리교육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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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쏙독새가 이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생긴 새를 위해 동화를 쓰다니, 참 아름답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는 어딘가 재밌다. 그 어딘가란 게 다른 동화들과 지점이 어긋난다. 낮잠 자다 꾼 꿈 같기도 하고(도토리와 살쾡이, 주문이 많은 요리점, 첼리스트 고오슈) 인생의 모습을 아주 멀리서 바라본 것 같기도 한데(기러기 동자, 켄쥬 공원의 숲) 구분하다 보면 그 양면이 겹쳐지기도 한다. 인생은 낮잠 자다 꾼 꿈과 같은 것일 테지만 산다는 것은 또한 지독한 투쟁이기도 해서, 이리저리 뒤척이게 될 수밖에 없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는 그런 삶의 모습을 자기가 좋아하는 색으로 그려놓은 듯 하다. ‘사람은 남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기러기 동자)라는 기러기 동자의 아버지의 말이나 켄쥬나 쏙독색와 같은 바보인지 천재인지 모를 인물들이 미야자와 겐지의 대표적인 색채다. 그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에 나온 그가 바라던 인간형이 동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 인물들은 정말 사람들에게 천치라고 불리며 미움도 받지 않고 칭찬도 받지 않고 냉해일 때는 빨리 걷고 여름에는 땀을 흘릴 것만 같다. 심지어 자기가 살기 위해 먹는 음식(쏙독새가 먹는 벌레)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게다가 그의 동화의 또 다른 묘미는 끝부분이다. 다른 동화들이 대부분 이야기를 정리하려 든다면 그의 동화의 끝은 이제 막 열린 문으로 들어선 기분이 든다. 첼로 켜는 고슈의 고슈가 뻐꾸기에게 미안하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끝나는 부분은 최고로 좋다. 가장 작은 존재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을 이렇게 하나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니.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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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소동 

 

지하 식당의 음식 속에는 

여주인의 표정이 있고 

더러운 행주가 있고 

그리고 당근이 있다 

 

나는 음식 속의 이 풍부한 영양과 

여주인의 행방에 

모종의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덜 익은 당근을 꼭꼭 씹는다 

 

당근은 분명 감자와 다르다 

입속에 씹히는  

이 알 수 없는 뿌리는 

누구의 아름다운 발목인가 

 

나는 흙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겠지만 저기 

육개장 닭도리탕을 

주문하는 손님들 

당근은 붉고 가지런하고 

당근은 도마의 깊이를 가로지른다 

 

알 수 없는 식욕과 

채찍에 길들여진 밥상과 

초원을 달리는 

늙은 말의 상상력 

 

당근의 육질은 감자와 다르지 

영 다르지 

지하 주차장의 푸른 용달과 

당근 박스와 어지러운 

비닐봉지들 

 

뿌리가 있고 

행주가 있고 

용달이 있는 

 

지하 식당의 오후와 

조용하고 가지런한 바퀴들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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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옷장 

 

우리 배고프니 서로 잡아먹기로 하자 

자 어서 시작하자고 

그는 옷을 벗고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배부른 그녀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옷을 벗고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배부른 그가 쏟아져 나왔다 

자 자 울지 마 다시 내 차례야 

배부른 그와 그녀가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옷장이 어둡군 

옷장이 더럽군 

자 자 웃지 마 네 차례야 

배부른 그와 그녀가 옷장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옷장이 뒤틀렸다 

거대한 단추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탁기로 기어 들어가는 그와 

빨랫줄에 목을 거는 그녀 

너무 많은 단추를 삼켰어 

자 우리 이제 배부른데 서로 내뱉기로 하자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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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전거를 타러 갔다. 날씨는 화창, 그래, 캐치볼을 해도 좋을 날씨, 그래서 성산대교 북단에 사람들은 넘쳐나고 그들은 각자 뭔가 생각을 할 것이고 나는 도대체 그 생각은 알 수 없고 그저 성산대교 북단에 앉아 이 책을 읽다 들어왔다. ‘사랑의 스타디움’ 부분이었다. 말 그래도 사랑의 스타디움에서 사랑의 스타디움을 읽은 셈. 옆에는 두, 세 쌍의 연인이 수건돌리기라도 하듯 오갔고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그저 ‘연인’이지만 필시 각자 다른 연인일 듯. 기간 상으로도 일주일 된 연인이 있는가 하면 어제 키스한 연인, 이제 섹스가 지겹기 시작한 연인 등등이 있을 것이며 어쩌면 삼각관계에 빠진 연인, 한 쪽이 바람 피는 연인, 두 쪽 다 바람 피는 연인 등등이 있을 테지만 그건 대체 내 알 바가 아닌 셈이다. 내 알 바는 얼굴이 조금 탔고 팔뚝도 조금 탔다는 것, 아무래도 선크림을 좀 더 바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란 말인지.

어제도 그제도 밥 말리를 듣는 중, 좋아서라기 보다는 그저, 한번 다 들어볼까 하는 그런 생각의 발현, 적어도 지겹지 않으면 계속 들을 수 있으니까,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적어도 지겹지 않았다는 점에서 밥 말리는 대단하다.

책을 왜 읽지 생각해보면 겸손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문장의 속도는 적어도 생각의 속도보다는 느리기 때문에 그런 속도를 맞추다 보면 조금은 겸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 게다가 책을 읽다보면 조금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많이 말고 조금만. 이것은 좋은 점. 책을 읽다 보면 대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아니라, 착각일지라도.

책을 읽다 박민규에 대한 생각 조금, 하지만 구차하니까 이에 대해서 더는 쓰지 말자.

생각해보면 할 수 있는 말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가진 유기체(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유명한 화가의 작품 제목, 하지만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니까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놈이 되고 급기야 이상한 년이 되며 급기야 싸가지 없는 놈/년이 되며 그러므로 말을 하지만 실은 할 수 있는 말 같은 것은 거의 없고 그것은 실은 이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진짜 야구를 찾아 돌고 돌다 보면 야구 같은 것은 없어지고 야구 비슷한 것만 남고 무엇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진짜 무엇 같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꿈에서도 무엇을 하는 것 같고 그러다보면 내가 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 비슷한 것인지 헷갈리고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고 결국 세계는 음부와 페니스뿐인가 싶을 즈음(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 ‘겐지와 겐이치로’ 중 한 단편에 나온 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고 역시 할 말이란 없는 채로 계속 말을 지껄여대며 사랑의 스타디움을 꿈꾸다가 치매에 걸리거나 정신병원에 가거나 어쨌든 마지막으로 가게 될 구멍은 하나, 이것은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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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내가 진정한 청교도라면 

 

워낙 내가 진정한 청교도라면 

혹은 완벽한 무사라면 

이야말로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하여 

읍에서 돈 한푼도 빌리지 않고 

팔월까지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팔월 말까지 

아무런 수입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 황폐한 밭을 파헤쳐서 

오늘 갑자기 수확한 

삼십 킬로도 나가지 않는 이 돼지감자 

내일도 반드시 이 정도 수확되고, 

삼사일은 더 수확될 것이다 

이 돼지감자 

이눌린과 과당이 들어 있어 

소아시아에서는 그대로 먹고 

라틴 민족은 삶아 먹는다 

옛부터 식용하는 돼지감자 

그렇지만 이 지역에서는 

한 사람도 살 사람이 없어 

결국 최초로 식용하는 것처럼 

나 혼자만 먹고 있다 

오로지 이것만 먹고 살면 

팔월 안에 반드시 병이 날 것이다 

질려서 죽더라도 

동기설에 들어맞는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정신주의가 아니고 

동기 따위의 청순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요컨대 쌀밥도 먹고 싶어 

팔 수 있는 한은 책도 팔고 

여기저기서 돈도 빌리며 

애매한 생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매우 바르지 못한 방법이다 

어쨌든 땀을 흘려 매우 춥다 

짚을 모아서 불을 지피자 

느티나무 뒤로 해가 떨어지고 

건조한 서풍이 불어온다 

 

-미야자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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