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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환한 빛은 암시적이다. 인간은 아무리 퍼내도 물이 솟아나는 우물과 같은 존재다. 증명이 불가능한 존재, 그래서 환한 빛은 아무리 비추려 해도 비출 수 없는 것들을 부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환한 빛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환한 빛은 일본의 평범한 동네에 방치된 아이들이 죽음이란 사건에 내몰릴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음을 더욱 안타깝고 부끄럽게 만들며 존재의 어둠을 직시했다. 이번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역시 빛은 빛과 어둠 사이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로 빛을 통해 보여지는색이란 태양 에너지를 통한 가시 광선의 눈속임이다. 아무리 환한 빛도 인간 주체를 증명할 수 없다. 사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도 누구나 시각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빛이란 아이러니하다. 밝은 자연광일수록 우리의 어둠과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는 주관과 객관 사이의 줄다리기를 응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화면이 종내 짙은 어둠만 응시한다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기에 환한 빛을 보여줄 수도 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풍성한 빛.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빛은 영화 내내 풍성하지만 그 빛이 비출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가닥들이 있다. 그 가닥들이 어긋나는 풍경. 풍성한 빛 덕에 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내면의 미로는 영화가 끝난 뒤 더욱 도드라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빛으로 영상 미학을 실현한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후반부에 닿기 까지 근 한 시간 반 이상이 한 가족의 24시간을 담는다. 그 24시간은 준폐이의 기일이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 준폐이. 그는 10년 전에 죽었으나 어제 죽어서 아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그의 가족들은 준폐이란 이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꺼내고 혓바닥에 굴린다. 이미 사탕을 먹은 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사탕 맛을 쩝쩝거리는 아이들처럼.
어둠을 위해 빛이 사용된 것과 같이 죽음 때문에 모인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 역시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이제 10년 전 죽은 이를 위해 모여든 가족 구성원을 보자.
늙으신 어머니 토시코, 의사였던 아버지 코헤이 요코하마, 그 집안의 차남 료타와 그의 부인 유카리, 유카리의 아들 아츠시(유카리는 아들을 데리고 재가했다), 그 집안의 딸 유와 사위, 아이들. 이들은 각자 제 내면의 어둠을 안고서 관계를 맺고 그 어둠을 숨기거나 뜻밖의 순간에 드러낸다. 그래서 ‘무섭죠, 사람은’이란 유카리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아이인 아츠시조차 어둠을 품고 산다. 그의 꿈은 피아노 조율사. 죽은 아버지의 직업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차마 새 아버지 집에서 그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유의 아이들 역시 호기심 섞인 어둠(혹은 어둠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이들끼리만 만났을 때 유의 아이들은 아츠시에게 죽은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수박 깨끼를 하고 키가 1.5㎝ 자랐다고 자랑하는 열 살 남짓한 아이조차 숨겨두었다가 헉하는 순간 내뱉고 마는 것이 있다. 순간 드러나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심연. 이 어둠은 모두 관계 때문에 빚어지고 관계 때문에 깊어간다.
사회적 관계를 맺은 지 10년 정도 된 아이마저 숨겨야 할 것들을 품었으니 오래 산 어른들은 얼마나 품어둔 게 많을까.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어둠은 얼마나 그들의 목을 조일까. 갈고 갈다 보니 매서운 칼이 될 만큼 날카로운 어둠이 서로를 벤다. 게다가 죽음이란 알 수 없는 심연. 죽음은 그림자까지 저곳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여전히 그 그림자를 느끼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 덕에 그렇다.
그래서 료의 부인은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야 하고, 료는 죽은 형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과 더불어 그를 괴롭히는 것들을 숨겨야 한다. 10년 전 죽은 아들의 유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며 같이 사는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겨야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회적 위치나 가족적 위치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는 개성이란 것을 잘 보여준다. 가족 관계에 끼기를 마다하며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실제로 그 안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이 집은 자기가 돈 벌어 지은 건데 왜 할머니 집이라 하느냐고 묻는다.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는 순간 순간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새로 맞은 며느리와 식사 도중 음악을 틀기도 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 ‘걸어도 걸어도’란 노래다. 그런데 그 노래의 사연이 기가 막힌다. 할아버지가 외도할 때 아이를 업고 할아버지와 여자가 있는 아파트에 쫓아갔다가 문 앞에서 할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고 식사 도중 말한다.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 하며 그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할머니가 그 동안 무슨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쥰페이의 묘지에 다녀오는 할머니와 료, 아내 유카리와 아츠시의 이야기도 섬뜩하다. 그들은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걸으며 이별을 이야기하고 죽은 남편에 대해 말한다. 듣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숱한 말들이 쌓인 내면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종종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없었던 양 사라진다. 그뿐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극 사실주의 영화다. 나이가 들거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원망과 미움의 부스러기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그럼에도 결코 깰 수는 없는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지 과장도 하지 않고 미화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개인은 영원한 개인으로서 외롭고 아마 그 외로움을 품고 죽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 해도 삶은 신비롭다. 영화 속에서 빛은 그런 역할도 한다. 삶이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같이 <걸어도 걸어도>는 말로 다 이끌어낼 수 없는 사이를 남겨둔 채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