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가네.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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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대 생은 거짓말 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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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가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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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7-25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룰루랄라 주인장님이세요?
일전에 심보선 시집을 읽고 계셨는데..
저는 이 시집의 우습고 담담한 씁쓸함이 참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반가워요~~~ 호들갑..
주말에 가끔가는 손님인데 2주째 안계셔서 그리웠는데 이렇게라도 뵈니 좋아요 훌쩍..

kangda 2009-07-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 저는 룰라랄라 주인장이 아닙니다. ㅎ
저도 그 카페 좋아하고 자주 가긴 해요~

무해한모리군 2009-07-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kangda 2009-07-26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한잔의 룰루랄라 말씀하시는 거 맞죠? ㅎ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7-2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ㅎㅎㅎ
룰루랄라님 언제 마주쳤을수도 있겠네요~~
 
칸트의 동물원 민음의 시 132
이근화 지음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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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순례가 있을까 

정신의 방랑자, 떠돌이가 

 

시가 무얼까, 몇 번쯤 했던 질문,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이근화 시집의 첫 시를 보면 시가 무언지 약간 가늠이 된다. 여기와 저기 사이를 잇는 단어들, '오토바이의 형식'과 '모래의 날들' 사이, 말을 넘어서려는 존재와 말 속에 갇힌 존재를 바라보게 한다, 시는.  

그러다가도 왜왜왜 

왜그래야 되는데?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 대체 왜? 

라고 묻고  

그러다가도 또 날아가고 혹은 날려가고(이것은 존재를 넘어서는 일) 

때때로 이 산뜻한 감각에 반발하기도 하며  

시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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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5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인입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반갑거든요.
무척이나 운문스럽게 표현하네요. ㅋㅋ ^^

kangda 2009-07-2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뭐라 해야 할지...
 
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환한 빛은 암시적이다. 인간은 아무리 퍼내도 물이 솟아나는 우물과 같은 존재다. 증명이 불가능한 존재, 그래서 환한 빛은 아무리 비추려 해도 비출 수 없는 것들을 부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환한 빛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환한 빛은 일본의 평범한 동네에 방치된 아이들이 죽음이란 사건에 내몰릴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음을 더욱 안타깝고 부끄럽게 만들며 존재의 어둠을 직시했다. 이번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역시 빛은 빛과 어둠 사이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로 빛을 통해 보여지는색이란 태양 에너지를 통한 가시 광선의 눈속임이다. 아무리 환한 빛도 인간 주체를 증명할 수 없다. 사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도 누구나 시각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빛이란 아이러니하다. 밝은 자연광일수록 우리의 어둠과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는 주관과 객관 사이의 줄다리기를 응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화면이 종내 짙은 어둠만 응시한다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기에 환한 빛을 보여줄 수도 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풍성한 빛.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빛은 영화 내내 풍성하지만 그 빛이 비출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가닥들이 있다. 그 가닥들이 어긋나는 풍경. 풍성한 빛 덕에 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내면의 미로는 영화가 끝난 뒤 더욱 도드라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빛으로 영상 미학을 실현한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후반부에 닿기 까지 근 한 시간 반 이상이 한 가족의 24시간을 담는다. 그 24시간은 준폐이의 기일이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 준폐이. 그는 10년 전에 죽었으나 어제 죽어서 아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그의 가족들은 준폐이란 이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꺼내고 혓바닥에 굴린다. 이미 사탕을 먹은 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사탕 맛을 쩝쩝거리는 아이들처럼.

어둠을 위해 빛이 사용된 것과 같이 죽음 때문에 모인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 역시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이제 10년 전 죽은 이를 위해 모여든 가족 구성원을 보자.

늙으신 어머니 토시코, 의사였던 아버지 코헤이 요코하마, 그 집안의 차남 료타와 그의 부인 유카리, 유카리의 아들 아츠시(유카리는 아들을 데리고 재가했다), 그 집안의 딸 유와 사위, 아이들. 이들은 각자 제 내면의 어둠을 안고서 관계를 맺고 그 어둠을 숨기거나 뜻밖의 순간에 드러낸다. 그래서 ‘무섭죠, 사람은’이란 유카리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아이인 아츠시조차 어둠을 품고 산다. 그의 꿈은 피아노 조율사. 죽은 아버지의 직업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차마 새 아버지 집에서 그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유의 아이들 역시 호기심 섞인 어둠(혹은 어둠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이들끼리만 만났을 때 유의 아이들은 아츠시에게 죽은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수박 깨끼를 하고 키가 1.5㎝ 자랐다고 자랑하는 열 살 남짓한 아이조차 숨겨두었다가 헉하는 순간 내뱉고 마는 것이 있다. 순간 드러나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심연. 이 어둠은 모두 관계 때문에 빚어지고 관계 때문에 깊어간다.

사회적 관계를 맺은 지 10년 정도 된 아이마저 숨겨야 할 것들을 품었으니 오래 산 어른들은 얼마나 품어둔 게 많을까.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어둠은 얼마나 그들의 목을 조일까. 갈고 갈다 보니 매서운 칼이 될 만큼 날카로운 어둠이 서로를 벤다. 게다가 죽음이란 알 수 없는 심연. 죽음은 그림자까지 저곳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여전히 그 그림자를 느끼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 덕에 그렇다.

그래서 료의 부인은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야 하고, 료는 죽은 형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과 더불어 그를 괴롭히는 것들을 숨겨야 한다. 10년 전 죽은 아들의 유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며 같이 사는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겨야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회적 위치나 가족적 위치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는 개성이란 것을 잘 보여준다. 가족 관계에 끼기를 마다하며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실제로 그 안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이 집은 자기가 돈 벌어 지은 건데 왜 할머니 집이라 하느냐고 묻는다.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는 순간 순간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새로 맞은 며느리와 식사 도중 음악을 틀기도 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 ‘걸어도 걸어도’란 노래다. 그런데 그 노래의 사연이 기가 막힌다. 할아버지가 외도할 때 아이를 업고 할아버지와 여자가 있는 아파트에 쫓아갔다가 문 앞에서 할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고 식사 도중 말한다.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 하며 그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할머니가 그 동안 무슨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쥰페이의 묘지에 다녀오는 할머니와 료, 아내 유카리와 아츠시의 이야기도 섬뜩하다. 그들은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걸으며 이별을 이야기하고 죽은 남편에 대해 말한다. 듣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숱한 말들이 쌓인 내면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종종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없었던 양 사라진다. 그뿐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극 사실주의 영화다. 나이가 들거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원망과 미움의 부스러기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그럼에도 결코 깰 수는 없는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지 과장도 하지 않고 미화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개인은 영원한 개인으로서 외롭고 아마 그 외로움을 품고 죽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 해도 삶은 신비롭다. 영화 속에서 빛은 그런 역할도 한다. 삶이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같이 <걸어도 걸어도>는 말로 다 이끌어낼 수 없는 사이를 남겨둔 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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