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후... - 할인행사
대니 보일 감독, 나오미 해리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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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보일의 28일 후는 재밌지만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딜로의 28주 후는 재미가 없다.

왜일까?

물론 나는 대니 보일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니 보일의 무엇이 먹히는 걸까?

대니 보일은 적절하게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안다.

좀비라고 ‘우아’하면서 피를 쏟고 마구 뜯어먹으려 들고(물론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럼 무진장 무섭겠지만) 그런다고 무서운 건 아니다.

인간 속에 내재한 공포란 무엇인가.

짐을 통해 나타나듯 진정한 공포는 혼자 남겨진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좀 더 유식하게 말하자면 모든 타자화된 이들 속에 갇혀 온전한 고립감(전혀 공통감이 없는 상태)을 느낄 때.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꾸는데 가장 최근에 내가 무서워서 새벽에 일어난 꿈도 이거였다.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혼자 남겨졌다. 왜 그곳에 있게 된지도 알지 못한 채.)

또 대니 보일의 이야기는 한 주인공을 끊임없이 쫓아간다. 그는 그닥 영웅심이 있는 인간도 아니고 용감하지도 않다. 단지 잘생겼을 따름(킬리언 머피, 보는 내내 집중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인가?) 그러나 차츰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소중하달까 하는 가치에 눈 뜨고 이 사이사이 좀비가 끼어든다. 그래서 와구와구 잡아먹으려 든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인간이나 좀비나 마찬가지란 사실인데, 결국 소령과 군인들이 여자들을 어떻게 해보려 하는 건 좀비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짓이다. 하지만 사실 짐이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눈알을 파는 장면(사실 이 장면이 영화 내내 가장 잔인하다)을 보면 모든 인간에 내재한 좀비성, 뭐 이런 것을 대니 보일은 슬쩍 슬쩍 비춰준다.

이에 비해 28주후는 영화에서 끌어달 쓸 만한 것은 다 끌어다 쓴다. 좀비, 폭파, 코드 레드(무조건 저격), 가족 간 살해, 영웅적인 남녀(도일, 스칼렛) 등등. 하지만 그래 돈 많이 썼구나 그런 기분이다. 그러니까 잔인하고 끔찍한 것들의 나열품이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기분으로 몇 번이나 끌까 하다가 그래도 끝까지 다 봤다.

다행이다. 28개월 후는 대니 보일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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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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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읽었다. 절멸 속에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할까.

의미가 말소된 세계, 세상의 모든 나무가 쓰러지고, 신탁이 모든 말을 끝마치고, 죽음과 삶의 구분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남자는 의미를 견지하려 한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로써. 힘겹게. 의미라는 것을 제 안에 남기려 한다. 남자는 거의 속삭이듯 말하고, 조심스럽고, 상냥해지려 한다. 미쳐가는 세계 속에서. 아니 제 본질에 충실한 세계인지도. (추위, 강간, 식인의 세계)

다 읽고 난 뒤에는 1mm의 빛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의미가 빛인가?

실은 자식을 낳는다는 행위가, 제가 무언지도 모르는 이 절망과 아귀다툼 속에 생명체를 던져놓고, 어쩌면 니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한 곳, 아니 낙원, 아니 행복에 대해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곳인지도 몰라, 라는 그런 숱한, 잡초처럼 밟혀도 다시 솟아나는, 그런 희망 같은 것을 품고자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인간에 대해, 거짓은 아닌지도 모른다.(맥카시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책을 바쳤다.)

그렇다면 의미란 선(善)일까? 빛이 있어 사물의 구분이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는 존재, 자와 타의 구분이 없는 상태라면, 선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순결함이 깃든 것일 테지. 공포를 이겨내고 있는 것이니까. 강한 존재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선인지도 모르겠다. 좋음과 나쁨이 아이 속에는 존재하고, 남자는 그 아이와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이어나가려 한다. 

적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적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 스테이지 막판에 이르면 대왕은 안 보이다 보이며 자꾸 한 대씩 때린다. 그런 것처럼.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드러눕고 싸워 보겠다고 일어서고 있는 중. 이 이야기 속에서 적은 자멸이다. 이야기 속의 아내가 자멸 속으로 굴러 떨어지듯 세계가 자멸 속으로 굴러 떨어지듯.

태양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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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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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박남철 

 

 

-마치 한 치도 크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20살에 좋아하던 시를 좋아하고 있다.  

게으름이란 레파토리마저 지겨워질 무렵 

여전히 나는 짐노페디를 듣고 앉아서 

나는 왜 나인가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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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며칠 전부터 생각나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정말 눈이 푹푹 나리고 

그래서 버스는 잘 가지 않는다.  

이런 날은 집구석에서 렛미인이나 보고 시집이나 보며 쳐박혀 있어야 제 격인데 

나는 눈 구경하러 나와서 

그가 왜 전화를 받지 않을까 잠깐 생각하다가 

또 삶을 궁구하고 늘 울기 직전인 채 누구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는

집에 가서는 책장에 당나귀 그림이나 그려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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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2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에 관한 신간 두권을 훑어만 보았는데 선뜻 마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눈이 오니 출근길 걱정만 되는것이 어른이 되었나봅니다.

kangda 2009-12-3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 걱정을 안 하는 철 없는 어른으로 사는 게 나은 걸까요 출근길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서글픈 어른으로 사는 게 나은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