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 실린 크리스 카터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번 극장판은 멀더와 스컬리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외계인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래도 섬세한 감정 묘사가 있나봐 라고 기대를 했지만...

사실 극장판은 tv 시리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머나먼 곳에 떨어져 사는 것 같은 멀더는 FBI에서 나와 혼자 집 안에서 여전히 자신의 외계인 찾기 작업에 몰두하고

스컬리는 의사가 되어 어느 소년의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러던 중 아동성애 전과를 가진 신부가 예지력과 비슷한 능력으로 실종된 FBI 요원을 찾아나서는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현 FBI가 스컬리에게 도움을 요청, 스컬리가 멀더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뜨악해하던 멀더는 결국 사건에 몰입하게 되고 신부의 예지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사건 현장에 가게 되는데

이야기인즉슨, 신부가 이전에 성폭행했던 소년이 성인이 되어 병을 앓고 있으며 그 남자의 애인(남자다)이 그 남자를 살리기 위해 러시아의 암시장 의사들에게 치료를 맡기고 결국 다른 사람의 몸을 그 남자에게 가져다 붙이기 위해 납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멀더가 알게 된다-물론 신부와 스컬리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이전에 소련에서 데미코프 박사에 의해 개 머리 두 개를 가져다 붙이는 실험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고 하며 그외에도 이런 실험을 본 적이 있으며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간에게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어딘가 TV 시리즈 같기만 하고

멀더와 스컬리는 좀 많이 늙었을 뿐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그대로이려 노력하고 있다. 스컬리는 멀더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에 약간 진저리를 치긴 하지만 멀더에게 벗어나지 못하며 멀더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곤 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멀더와 스컬리의 사랑 이야기인가요 하면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다는 것. 뭐 사실 극장판에서 크게 내용이 달라질 수도 없지만.

그리하여 이 신부가 그 소년의 일을 예지력에 의해 알게 된 건 신부가 믿는 주님이 신부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죄악을 저지르고도 회개만 하면 된다는 건지 진정 구원이란 대체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는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지-쉽게는 내게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 일어날 때면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꿈을 꾼다든지 하는 방식으로라도-  등등의 궁금증만 안겨준 채 멀더랑 스컬리는 그래도 키스 한 번은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인드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키스를 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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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독일에 있다가 혁명의 불길이 샘솟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달려간 로자는 괴물일까 인간일까.심장의 힘찬 박동을 느끼며 행동의 가장 선두로 나가 서는 이 인간, 자신의 감정을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주저없이 행동하는 이 인간, “혁명은 장엄하다. 나머지 모든 것은 시시할 뿐이다!”고 말하는 이 인간은 인간일까 괴물일까. 숭고함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걸까. 정치라는 바알신,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재물이었던 걸까.
“나 자신과 내 심장을 현기증나게 만들기 위해, 나는 곧 소용돌이 속으로 온몸을 던질 것이다. 그것만이 나에게는 유일하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로자는 묘비에 ‘츠비-츠비’라는 두 음절을 새겨주기를 바란다. “그건 검은 박새들의 울음소리예요. 내가 그 소리를 그럴듯하게 흉내내면 새들은 금방 날아오르곤 하지요.”
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한 몸으로 끌어안았던 인간.
“내게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생의 날들과 아직도 배워야 할 수많은 것들을 생각할 때면, 나는 두렵다.”
“요컨대, 만사를 크게 보고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 이별 그리고 향수. 삶이란 그런 게 아니던가. 그리고 늘상 있어온 문제들이 아니던가. 삶을 전체적으로 볼줄 알아야 한다. 동시에 그 무엇도 빠뜨림 없이, 삶이 제시하는 모든 것 속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면 그녀의 수많은 콤플렉스가 그녀를 그렇게 이끈 걸까. 여자에 유대인, 절름발이라는 콤플렉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이 모든 흔적을 떼어놓은 채 살아간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이 독일에서 낭만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이 콤플렉스가 그녀를 이상주의자로 만든 걸까.
“나는 본래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기를 원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며 역사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책에 나오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인간성, 희생, 연대-는 단순히 교과서일 뿐이며 어떤 선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것인지도. 어느 때가 되면 이 선을 끊고 나와 먹고 먹히는 사회로 편입되어야 하는지도. 그곳에서 인간성이란 달콤하고 따뜻한 단어는 합리화를 위해 필요한 전설 같은 건지도.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어떤 중요한 행동을 이루려는 조급함과 주의력 부족으로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그저 그들에게만 허용되는 말일지도. 거인들. 너무 많은 눈물이 세상에 흘러넘치는데, 이 작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만 될 뿐인 전설. 우매한 대중이 그 역사의 현장에서 나치즘 쪽으로 기울어졌던 데 대해, 이 대중의 우매함에 대해 무엇이라고 할까.

그러나 로자가 이상주의자일 뿐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정치 투쟁의 현장에 뛰어들고 자신이 택한 사회주의 노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쓴 여러 편의 논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것도 그저 안간힘이었던 걸까. 그녀는 인간과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잔인함과 이기심에 대해, 또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는 한갓 아무것도 아님을. -물론 후기의 글이다
“압제, 폭력, 불의, 가난, 그리고 절망이……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영혼을 형성한다.”
“나는 모든 것이 결산되지 않으리란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으로 두 주먹을 움켜쥡니다……. 현재의 모든 죄악들은 결산되지 않은 역사의 계산서 더미 속에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과정만이 있을 뿐인가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유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 전부를 운명의 큰 저울 위에 유쾌하게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끝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은 그 자체로서 기쁨의 원천이며,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따라서 과연 모든 것이 잘 해결될까 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혁명 혹은 역사와 몸을 같이 하다보면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 쪽으로 먼저 몸이 가있기도 할까 라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길 그 앞자리에 이미 몸이 가있기도 할까. 그러니까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몸이 그 방향으로 말을 유도하고 사고를 유도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를 보면 그래 보인다, 완전히 역사 속에서 흠뻑 젖어서 먼저 물살의 흐름을 가늠하는 어부처럼.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흔히 운명론자에게서 볼 수 있는, 지나친 자기 본위의 무기력한 인내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온힘을 다해 부딪치는, 결코 쓰러지지 않고 화강암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인내 말입니다. 역사라는 이 용감한 두더지는, 빛에 도달할 때까지 밤낮으로 파헤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그런 인내심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가능성의 끝까지 가려 한다. 항상 행동하고, 또한 행동을 꿈꾸며.


책을 다 읽었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류애, 연대, 평화라는 것은 말뿐인 공허함이며 실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오직 자신 혹은 좀더 나아가 자신의 집단만을 생각할 뿐인가? 아니면 저 말들이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게 있을까, 그나마 불안하게라도, 아슬아슬하게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법, 끊임없이 낙관하는 법, 아니 차라리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거대한 시대에 대해 말하는 로자, 그녀의 말대로 그 시대는 거대했고 거대한 선 대신 거대한 악이 출현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절은 수상하고 그리하여 곧 무엇이 출현할까.


마지막으로 로자와 레오의 관계는 흥미롭다. 스위스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1889년부터 무수한 다른 연인들을 거쳐가며 죽음에 이르는 1919년까지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로 남는다. 폴란드 사회 민주당에서 스파르타쿠스단까지, 소수파 당의 선두로서 그들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한다. 또한 인간적으로, 마치 또 다른 자기를 대하는 듯한 두 사람.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는다.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보니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대화의 결을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이므로 서로가 떼놓을 수는 없게 되어 버린 듯. 그들은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만나는 대신 글로 의사소통을 하곤 했다. 그래서 1910년에는 90통의 편지를, 1911년에는 60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편지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마치 수신자가 추상적 존재인 듯, 로자는 페이지마다 호칭은 단 한마디도 없이 글을 썼다. 레오와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를 말할 때에도, 빙 돌려서 말하거나 아예 인칭을 생략해버렸다.

-“매번 나를 고문하는 것, 그건 이런 생각이에요. ‘그건 어떤 삶이었는가? 저 사람이 살다 갔다는 것, 그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나에겐 이 질문보다 더 끔찍한 건 없어요. 일단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역사의 교훈…… 그것은 스스로 불쌍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조용히 앉아서 숙고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정 놀랍다는 것을 느껴요. 내가 ‘놀랍다’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문제들을, 사상을 날카롭게 만드는 위대한 문제들을 무더기로 제기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독일 작가 그라베의 극작품 제목을 인용하자면, ‘비판과 아이러니와 깊은 의미’의 문제를 던지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중략) 우리 시대는 수많은 거대한 것들, 예컨대 거대한 범죄들(공허한 정부), 거대한 실패(공허한 ‘두마’), 거대한 어리석음(공허한 플레하노프 상회)을 낳는 시대입니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진정한 부유함은 내면적인 자유입니다. 언제나 자연스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정열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를 깨뜨릴 만큼 강렬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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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ngda 2008-08-1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그넘 코리아

오래전부터 꽤 볼 만하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었다.

어제 한겨레에 박노해 씨 기사를 보니 기다림이 헛된 게 아니겠구나

더더욱 기대에 부풀어

머나먼 예술의 전당까지 보러 갔건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이전에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훨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일반 사람들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사진도 많았다.

-물론 좋은 사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술의 전당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중 유난히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매그넘은 왜 저 기획에 동의했을까

생각해보니

분단 이전의 한국

유일한 분단 국가 한국을 찍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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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두환 1 - 화려한 휴가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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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앉아 금세 두 권을 다봤다. 어릴 때는(1990년대 즈음) 최규하(확실치 않다)가 청문회에 나오는 게 왜 중요한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사람들은 진실을 밝혀내고 싶었던 거다. 너무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권선징악이 이 세계에 통용되기를 바랬던 거다. 그러나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 정권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고 만다. 대체 왜? 여기에는 또 어떤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을까?

대한민국사는 말 그대로 가려진 역사이다. 개인의 야욕이 대한민국사를 철저히 가림막했고 여전히 가리워진 채로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결코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태정태세문단세밖에 없다. 물론 모든 역사는 다 만들어진 역사이지만 그래도 이건 한 개인의 야욕을 위해 이렇게까지 많은 인물들이 죽어가야 한다니. 인간은 지성이 있는 집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성이 있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일 뿐이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이제부터 공부 좀 해봐야겠다.

이 만화책이 뚜렷하게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짚어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보기 쉽게 간략하고 커다란 스케치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자식 있으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애들은 만화책이라면 뭐든지 다 좋아하는데 이렇게 공부도 되는 만화책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만화책 쓰신 분은 정말 전두환과 맞짱을 뜬 건지도. 새롭게 태어날 교육을 위한 전략이니. 결국 역사에서나마 그 놈이 진정 나쁜 놈임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 수단을 만들어낸 것이니.

12.12가 뭔지 5.18이 뭔지,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아, 그냥 그런 게 있나보다 정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어떤지, 김영삼, 김대중은 누군지도 잘 몰랐다.

근데 사실 자신이 없기도 하다. 그런 x가 아직 살아서 29만원밖에 없다고 전국민을 능멸하고 그런 x를 전직 대통령이어서인지 아니면 대통령으로서 돈 버는 방법을 알아보려해서인지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찾아가는 현직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는 그가 있는데 지금은 또 얼마나 올바른가? 먼후일 어떤 책이 나와서 지금의 역사에 대해 심판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무얼하는가?  이 시대의 전기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뉴또라이의 기수와 승부해 선거를 치뤘지만 국회의원으로 당선도 못 되는데 이게 분명 선거의 결과였는데 대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집단이 지성을 가진 집단일까? 인간은 뭘까?

어쨌든 당장은 좀 더 공부하자는 결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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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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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들 종이인형 같다. 얇고 팔랑대는 종이인형들의 세계. 그래서 그 중 어떤 종이인형이 모자나 오뚜기로 변하거나 뒤편에 문이 달려있다거나 해도 ‘아, 그렇구나’ 하게 되지, ‘에이, 설마,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황정은의 서술 방식, 황정은의 문장은 이런 반응을 유도한다. 짧고 간결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런 것이다, 뿐이다. 하지만 단순하다거나 건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애들이 생각나는 대로 지어서 부르는 즉흥곡 같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시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동화적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데에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영향도 크다. 짓빠, 짓빠라거나 풉풉풉풉, 퐁퐁 같은 의성어들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의성어가 빠지면 허전할 만큼.

황정은의 서사는 변신 이야기처럼 가지각색의 변신이 등장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변신 그 자체-무엇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의 반응이다.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 인물들은 그 변신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거나 절대 일어나설 안될 일이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한다. 따라서 소설을 따라가는 독자도 뭐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하며 소설을 계속 읽게 된다.

하지만 왜 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은 변신할까. 이런 구차한 질문을 굳이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사실 소설의 서사가 말해주는 것이 이 변신의 이유이다. 오뚜기로 변신한 기조씨가 물속에서 수영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라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난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꿈이잖아. 

꿈이래도, 있잖아, 사람들이 헤엄쳐, 난 힘이 빠져, 잠방잠방하다가, 가라앉아. 머리 위로 수면이 점점 멀어지고, 내가 가라앉은 자리에서 파문을 만들며 헤엄치는 내 다음 사람의 배가 보여. 그런데 그 사람도 결국 가라앉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중략)

마지막 사람이 가라앉고 나면, 역시 물만 남을까.

남겠지.

흑. 흑. 흑.

왜 울어.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해서.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 주체의 상실이라도 부를 수도 있는 이 막막함이 인물들의 변신을 이끈다. 더 이상 변혁의 의지가 없는 세계, 지금 이 세계는 옳은가 혹은 그른가에 대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긍정적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막함은 인물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고 싶게 하고 다른 것이 되게 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표제작이기도 한 ‘일곱시 삽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나온다. 파씨는 동물원에 가는 일이 인간적이기에 동물원에 가자고 한다.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두고 관람하는 인간적인 세계의 인간적인 평화. 누군가를 극악무도하게 괴롭히고 거기에는 분명 인과가 있고 그래서 인간적인 세계. 그러나 똑같이 보복하지 않는 것도 인간적인 세계.

다시 앞으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그래서 황정은의 인물은 종이인형 같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인간적’이라는 것, 맹렬한 욕구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책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변신은 표면적으로 맹렬히 원해서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태로 처리된다, 마법사님이 불쌍하고 평범한 주인공의 마지막 희미한 바램을 들어준 것처럼- 인간이 모여 인간이 이룩한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세계의 기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다 문득 하일지의 『경마장의 오리나무』가 떠올랐다. 그 작품 초반에 주인공이 남산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왠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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