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정은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들 종이인형 같다. 얇고 팔랑대는 종이인형들의 세계. 그래서 그 중 어떤 종이인형이 모자나 오뚜기로 변하거나 뒤편에 문이 달려있다거나 해도 ‘아, 그렇구나’ 하게 되지, ‘에이, 설마,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황정은의 서술 방식, 황정은의 문장은 이런 반응을 유도한다. 짧고 간결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런 것이다, 뿐이다. 하지만 단순하다거나 건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애들이 생각나는 대로 지어서 부르는 즉흥곡 같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시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동화적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데에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영향도 크다. 짓빠, 짓빠라거나 풉풉풉풉, 퐁퐁 같은 의성어들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의성어가 빠지면 허전할 만큼.

황정은의 서사는 변신 이야기처럼 가지각색의 변신이 등장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변신 그 자체-무엇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의 반응이다.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 인물들은 그 변신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거나 절대 일어나설 안될 일이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한다. 따라서 소설을 따라가는 독자도 뭐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하며 소설을 계속 읽게 된다.

하지만 왜 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은 변신할까. 이런 구차한 질문을 굳이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사실 소설의 서사가 말해주는 것이 이 변신의 이유이다. 오뚜기로 변신한 기조씨가 물속에서 수영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라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난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꿈이잖아. 

꿈이래도, 있잖아, 사람들이 헤엄쳐, 난 힘이 빠져, 잠방잠방하다가, 가라앉아. 머리 위로 수면이 점점 멀어지고, 내가 가라앉은 자리에서 파문을 만들며 헤엄치는 내 다음 사람의 배가 보여. 그런데 그 사람도 결국 가라앉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중략)

마지막 사람이 가라앉고 나면, 역시 물만 남을까.

남겠지.

흑. 흑. 흑.

왜 울어.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해서.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 주체의 상실이라도 부를 수도 있는 이 막막함이 인물들의 변신을 이끈다. 더 이상 변혁의 의지가 없는 세계, 지금 이 세계는 옳은가 혹은 그른가에 대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긍정적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막함은 인물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고 싶게 하고 다른 것이 되게 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표제작이기도 한 ‘일곱시 삽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나온다. 파씨는 동물원에 가는 일이 인간적이기에 동물원에 가자고 한다.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두고 관람하는 인간적인 세계의 인간적인 평화. 누군가를 극악무도하게 괴롭히고 거기에는 분명 인과가 있고 그래서 인간적인 세계. 그러나 똑같이 보복하지 않는 것도 인간적인 세계.

다시 앞으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그래서 황정은의 인물은 종이인형 같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인간적’이라는 것, 맹렬한 욕구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책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변신은 표면적으로 맹렬히 원해서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태로 처리된다, 마법사님이 불쌍하고 평범한 주인공의 마지막 희미한 바램을 들어준 것처럼- 인간이 모여 인간이 이룩한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세계의 기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다 문득 하일지의 『경마장의 오리나무』가 떠올랐다. 그 작품 초반에 주인공이 남산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왠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