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구조적인 문제를 들어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부통계 600만, 흔히 노동계 주장이 1,000만이다. 냉정하게 정부 통계의 손을 들어주어도 4명 중 1명 꼴이 비정규직 노동자다(이중에서 절반 이상이 여성노동자들이며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절반 수준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고이즈미 수상 시절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한국과 흡사했다. 이외 선진국들의 경우에도 비정규직, 청년실업 문제는 매우 고질적인 사회 문제 중 하나로 논의된다. 이들 나라들의 경우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이유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를 말하곤 한다. 한 가지는 한 국가의 산업구조 개편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 다시 말해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전환되는 것처럼 산업경제에서 지식서비스산업으로의 개편과정에서 벌어지는 필요악이며 산업구조개편이 마무리되면 사라질 현상이라고 전망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기업이 의도적으로 벌이는 경우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이 출현한 이유를 완전히 후자의 경우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기업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용안정성을 후퇴시켰다. 기업들은 인력감축만이 기업의 경영구조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졌다. 문제는 일거리와 일자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자리의 질이 낮아졌다는 것에 있다. IMF외환위기 당시 많은 이들이 장농 속에 잠들어있던 돌반지까지 끄집어내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우리는 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해준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수출이었다.
누가 수출할 물건을 만들었을까? 과거 정규직 노동자가 했을 일을 지금은 3대 1의 비율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채우고 있다(정부 통계가 아닌 민간 통계를 바탕으로 산출한다면 현재 우리나라 노동자의 50%는 비정규직이다). 산업구조의 개편으로 일자리 자체가 사라진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정규직의 절반 임금으로 비정규직이란 '2등 시민', '사회적 식민지'라는 손쉬운 방식으로 유지하려든다는 것이다. 이런 비정규직 유지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다!
앞서 선진국들의 경우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데 반해서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이동하는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다. 이럴 때 올바른 정부라면 정부가 나서 정규직 고용 비율이 높은 기업, 정규직 전환율이 높은 기업에게 세제 혜택 및 노동자 재교육 등의 기회를 부여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현 정부는 그럴 의지가 전혀 없으며 도리어 이와 반대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가장 강력한 출구는 정부의 의지이고,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국민의 의지다. '함께 살자'는 외침이 묻혀버리는 세상은 언젠가 '함께 죽자'는 외침도 낯설지 않게 된다.
1. 21세기 우리 사회의 풍경
직접 '1인시위'를 해본 적은 없지만 1인 시위하는 사람의 곁을 지켜본 경험과 오고가며 마주하게 되는 1인 시위의 풍경들은 낯이 익다. 독재시대라 사람들이 서넛만 모여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당하는 것도 아니지만 1인 시위의 풍경은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엔 주로 정부 청사 앞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시위가 잦았다면 지금은 '경제적 민주주의'와 관련한 1인 시위가 많아졌다는 정도의 차이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학로에서 한성대 입구 방향으로 올라가는 (주)재능교육 본사 건물 앞에서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습지 교사 1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재능교육 본사 주변의 건물들에는 '1인 시위도 하지 말아달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그것이 20세기를 지나보내고 21세기가 된지 어느덧 10년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다.
2. '불매'라는 촌스럽고 수동적인 운동
12월 2일 저녁, 퇴근하면서 불매선언을 한 뒤로 일주일여가 지났다. 그러나 불매를 선언한 사람들은 나보다 한 달 먼저부터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간 상당히 여러 번 페이퍼를 썼고, 나름대로 불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접할 때마다 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한 편으로 사람들이 참 남의 글을 잘 읽어주지 않는구나란 생각을 새삼하게 되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대표로 나선 자리도 아니므로 그 이야기가 꼭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처음 불매 제안이 있고나서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침묵했던 것은 지금 나름대로 합리적인 입장을 표방하며 직접 불매에 참여하지는 않으나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이 일들을 지켜보고 있는 분들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여와 불참 사이에서 나 역시 나름대로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밀어둔 일들이 너무 많아 한동안 잠수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나홀로 조용히 빠져나가도 그만이고, 또 누군가의 일에 그저 수저 하나만 얹어놓고 모른 척 곁에서 거들어도 그만이다.
불매운동은 얼마전 우리 기억에도 생생한 낙천낙선운동과 거의 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일단은 포지티브한 운동방식이 아니라 네거티브한 운동방식이란 한계가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 근본적인 구조를 건드리는 운동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포지티브한 운동방식을 취하기 위해선 공정무역 바나나나 커피와 같은 방식의 운동을 취해야 할 것이고, 근본적인 구조를 건드리는 운동이 되려면 끝도 없는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노암 촘스키는 개인적 차원의 '불매'운동을 사회, 사회구조에 실질적으론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개인적 자살'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는 자살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것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조직화된 개인들의 프락시스(praxis, 실천)로 전이될 때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운동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3. 알라딘 vs. 알라디너의 이항대립이란 생각?
나는 불매선언 이후 이 싸움이 알라딘 대 김종호가 아니라 결국 알라디너 대 알라디너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대개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 가장 유리한 사람은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나중에 말하는 사람이기 마련이고, 그 와중에 정작 당사자들은 사라지곤 한다. 또 아무리 현 단계의 논리를 앞세운다한들 결국 각각의 사람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니고 있던 자신의 입장에 따라(그걸 정치적 입장이나 계급적 입장이라 한다해도 무방할) 자신의 의견을 표방하게 될 것이란 것도 안다. 다시 말해 설령 아무리 옳은 일을 하더라도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것은 원천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구 없는 단순한 이항대립이 아니다. 불매 선언은 나 혹은 알라디너들이 알라딘과 직접 당사자로 맞붙는다는 의미보다 알라딘 대 김종호, 알라딘(고용인, 원청업자) 대 비정규직 노동자(피고용인, 파견, 도급)의 싸움에서 알라딘의 소비자로 나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피력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알라딘 불매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알라딘에게 받는 피해는 정 떨어진다 정도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출구 없는 이항대립'은 너무 거창하다.
4. 어째서 알라딘을 문제 삼는가?
1인 시위 하는 이들은 대개 침묵이다. 1인 시위 중인 사람에게 다가가 당신은 왜 홀로 거리에 나와 서 있는가? 를 묻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그도 이미 백방으로 알아보았을 것이고,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다. 그가 왜 1인 시위에 나섰는가에 대해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당사자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에 대해 알아보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홀로 다수를 상대하는 싸움은 동어반복의 싸움이고, 그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지치기 마련이니까.
어째서 알라딘을 문제 삼는가?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알라딘이 해고 과정에서 잘못했다고 판단했다. 논리적 근거는 물론 김종호 씨의 글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르게 판단할 이유도 없다. 알라딘이 보여준 두 차례의 해명은 결국 원론적인 답변뿐이었다. 다시 말해 김종호 씨의 문제제기이든, 그의 문제제기에 따라 알라딘이 정말 저렇게 했을까 궁금해서 묻는 사람에게조차 알라딘은 사실상 묵묵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알려주는 것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우리는 알려줄 의무도 없다고 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알라딘에 문의했던 사람들은 '바보'가 되었다.
둘째. 알라딘이 기업으로서 보여준 이미지에 반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간 알라딘은 상당히 여러 차례 사회적 공익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어떤 이는 그렇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려고 한다. 물론 알라딘이 기업으로서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이란 것은 누구보다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알라딘의 속내까지 짚어가며 헤아리고 이해해주고 있다. 삼성이 아무리 문제를 일으켜도 삼성이 반도체를 통해 지난 20년간 우리나라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헤아려주는 분들과 백날 이야기해도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이 역시 매순간 무수한 동어반복을 잉태할 뿐이다.
'알라딘 불매'는 알라딘은 물론 알라딘의 소비자들에게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 '피해'라는 말 자체도 말이 안 된다. 어느 서점에서 소비할 것인지는 그야말로 소비자의 마음 아닌가. 지하철, 버스,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서민대중이 고통받는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정작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아니, 설령 그로인해 고통받는 것이 실제 서민이라고 하더라도 알라딘 불매가 지하철, 버스, 철도노조의 파업의 일부분 만큼이라도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가?
어떤 이는 불매에 대해 비꼬며 김종호 씨의 호소를 '우는 소리'라 표현하며 마치 불매가 해고된 사람들, 임시 고용직 모두 복직시키고, 정규직화하라는 요구인양 말하기도 했다.
'불매'에 나선 사람들이 과잉일 수도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을 남의 일에 대해 나섰다는 점에서 분명 과잉이다. 그러나 반대로 저렇게까지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입장에 서 있는 걸까, 불매의 어떤 점이 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알라딘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판단이었을까? 만약 김종호 씨가 알라딘에 서재를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던 이였다고 한다면 우리의 입장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실제로 알라딘에서 서재를 하다가 알라딘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받고, 알라딘에서 장차 취업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알라딘의 도서소개 MD나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가 그 이후 알라딘에 실망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알라딘은 여전히 오래오래 일해줄 사람을 찾는 채용공고를 내고 있다.
알라딘이 도덕성을 겸비해야 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알라딘은 지금까지 노출된 언론의 기사들을 통해 사회적 공헌과 새로운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경영자 스스로 끊임없이 강조해온 전력이 있다. 그에 대한 구체적 근거는 이미 이전의 페이퍼들에서 제시한 바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란 점도 확인되고 있다. 이와 다른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에 있다.
셋째. 알라딘의 블로그는 구조적으로 알라딘 서점의 하부구조로 매우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알라딘에 서재를 연 사람들은 대부분은 알라딘 서점 자체의 서비스보다는 다른 인터넷서점이 주지 못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끌려 알라딘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끈끈한 인간미를 나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알라딘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특히 인터넷서점들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알라딘은 진보적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팔아온 덕분에 '책과 문화'라는 다분히 지식인적 콘텐츠에서 다른 블로그들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실제로 재생산된 이미지를 여러 매체를 통해 노출시키며 성장해 왔다.
한 편으로 네이버나 다음 등의 '블로그'가 개인적인 공간이라면 알라딘 서재는 알라딘 서점이라는 거대한 카페 내부에 각자 개인의 공간을 준 셈이므로 그만큼 중심을 향하는 인력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기업으로서의 알라딘과 소비자로 구분될 수 있는 서재인들 사이의 동일시가 강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라딘은 구조적으로 리뷰와 페이퍼 등을 통해 알라딘의 주요 판매 상품을 알라딘 리뷰어들을 통해 홍보하고, 이들 각자가 '얼리아답터'이자 '리뷰어'로 기능하도록 구성해놓고 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급부도 있다. 예를 들어 소비등급에 따라 플래티넘에게 주는 갖가지 할인혜택 못지 않게 실제로 알라딘 서점을 애용하지 않더라도 페이퍼나 리뷰만으로도 우리는 알라딘이 주는 적립금 이벤트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고, 이주의 마이리뷰 같은 포상제도도 있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의 블로거들이 쓰는 글에 원고료를 매긴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올린 리뷰를 통해 누군가 책을 구입하는 요인이 되고, 때로 스스로 얼리아답터로서의 인기를 누리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신간 서적을 탑처럼 쌓아올리기도 한다. 물론 소비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나 알라딘이 이를 통해 알라딘이 누리는 이득에 비해 알라딘 서재의 블로거들이 누리는 이득도 그만큼 큰 것인가? 분명 경제적으로는 아닐 것이다.
5. 알라딘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재와 커뮤니티' 때문이다. 그러나 알라딘은 서재 사람들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하지 않는다. 굳이 이번 불매 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불쑥 서재가 생겼고, 이후 한 차례의 큰 개편이 있었다. 개편 과정에서도 커뮤니티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기억이 없지만 이후 무언가가 신설될 때도 그에 대해 충분한 공지나 안내가 있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런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알라딘은 스스로 '진보적(그것이 반드시 진보적이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이미지라 할 수도 있다)' 이미지를 공들여 생산해왔고, 그런 이미지에 끌려 알라딘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라딘에 불매를 선언해 가면서까지 질의하는 이유는 그만큼 궁금하고, 정말 내가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으며 한 편으론 알라딘의 수익사업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라딘에 머무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회의하며 묻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이번의 김종호 씨 사태로 알라딘에 질의를 했다고 생각한다.
6. 구체적인 요구가 왜 없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러 사람이 참여하고 있고, 그 숫자만큼 다양한 요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합의된 요구와 질의들을 압축해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정말로 김종호 씨의 해고과정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가(물론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현재 진행 중일테니 쉽게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라딘을 부도덕, 파렴치한 기업으로 몰아가는 것이기 보다 쯧쯧,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의 차원이 일반적이다. 비록 '불매'카페를 열기는 했지만 불매를 선택한 분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혼자 서 있다거나 개인 의견만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와 반응을 보고 듣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부분에서는 즉답을 할 수 없기도 하고, 때때로 동어반복적인 이야기에 모두 답할 수도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참선언도 이미 하나의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알라딘 서재에서 며칠 동안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진지하게 참여하고 논의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라딘의 두 번째 답변은 '한 사람'만을 지칭했다.
물론 거기에도 원인이 되었던 김종호 씨 개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고용안정에 대한 고민, 전환 배치 등의 대안을 어째서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도 없다. 그냥 피치못할 구조적인 원인이니까 이해하란 것이다. 그러면서도 빼먹지 않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다른 기업들보단 비정규직에 대해 잘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자랑인데, 그래서 뭘 잘하는지 물어보면 묵묵부답이다.
만약 알라딘이 이런 문제제기가 있던 초반에 조금만 더 성의있게 답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라딘은 기업 비전부터 여러 경로로 자랑할 일들은 빼놓지 않고, 프레스룸을 통해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일에 대해 알라딘이 조금만 성의있게 대했다면 불매가 이 정도나마 결집하는 동력을 얻기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선인님이 구체적으로 질의한 부분도 있지만 알라딘에서 조유식 사장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근속한 사람은 몇년이나 근무했을까? 또 장기 근속자 수는 얼마나 될까? 알라딘에 노조가 있기는 한 걸까? 알라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규직으로 전환 채용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연 있기는 있는 걸까? 이런 의문들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질문들이기도 하다.
결국 불매에 참여한 사람들의 요구는 두 가지다.
"김종호 씨를 복직시켜라!"
(계속해서 알라딘의 고정 업무를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 - 물류센터 등 - 을 정규직화하라,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정규직 비율을 높여라. 그마저도 어렵다면 어려운 이유를 대서 우리를 설득해달라.)
"알라딘이 말하는 사회적 공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잘 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줘!"
불매가 엄청나게 대단한 요구를 알라딘에게 하고 있는가? 설득해달라고 읍소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 본질은....
서재에 머무는 사람들 중 알라딘에 애정도 없고,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떠났을 것이다. 저런 문의를 하는 이유가 뭘까? 알라딘 서점이 자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좋은 기업이란 것을 보여달라는 것 아닌가? 그마저도 거절당할 때....
7. 이번엔 어떤 답이 올까?
이번에 라주미힌님이 다시 한 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질의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 기다린다. 물론 마냐님이 걱정해주는 것처럼 알라딘이 내가 기대한 성의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이들이 기대하는 정도만의 답변이라도 제대로 해준다면 결국 불매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솔직히 말해 현재 나의 수준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김종호 씨의 글을 얼마나 자세히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해고된 사유로 스스로 손 꼽는 것 중 하나는 추석 시즌 휴가 계획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알라딘은 확인해주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선 확인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논외로 해야할까? 불매에 나설 때 현실적으로 고민한 것 중 하나는 한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내가 알라딘의 기업 관행으로 해석해도 무방한가였다. 알라딘에 대해 과잉기대한 부분이 내게 있는가?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나마도 과잉기대였구나란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요구의 내용을 구체화 하라는 분들이 계시다. 더 어떻게 구체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알라딘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는데...
* 알라딘의 동어반복에 이어 나 역시 다시 한 번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 아마도 끝 없는 동어반복의 계속일지도 모르겠으나 오늘부터 다음 주 내내 사무실 이전으로 인해 인터넷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대학로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1인 시위'하는 사람보다 나의 처지는 훨씬 낫다. 나는 회사를 짤린 당사자가 아니다. 게다가 누군가 지나가며 혀를 끌끌차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고 있다.
물론 여전히 '불매 시위'를 하고 있다는 걸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인터넷 시위 방식의 한계이고,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해야 하는 것이 피곤하긴 하다. 그러나 혼자서 하고 있는 건 아니다(어느 분이든 불매를 직간접적으로 선언한 분들의 명단을 추려주면 좋겠다).
불과 일주일여 밖에 안 되었지만 그 사이 제법 많은 글들이 오고 갔다.
힘들었고 여기 아니면 책 살 곳이 없냐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라딘에서 노는 이유가 물질적인 혜택이 아니라 알라딘 사람들 때문이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 기대조차 깨질 수도 있겠지란 불안도 있다.
어쨌거나 며칠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계속 '연대 시위' 중이다.
짬짬이라도 들어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아, 자꾸만 나오라고 보채는 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