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불매선언을 하면서 나는 정대만의 3점 슛을 떠올렸다. 농구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멋진 슛, 덩크슛이라도 보통의 풋내기(레이업)슛과 마찬가지로 2점뿐이다. 3점 슛이란 분명히 보통의 슛보단 어려운 모양이다. 단지 좀더 멀리서 농구공을 날렸을 뿐인데 그것이 림을 통과하면 제 아무리 멋진 슛보다 반점이나 점수를 더 준다.
87년을 거치며, 97년을 거치며 다시 2007년을 거치며 나는 믿음과 냉소, 불신의 강을 건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함께 건넌 강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때나마 열렬한 믿음을 가졌던 내가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이제와서 그것을 후회하는 내가 부끄럽지 않다. 나는 그것이 성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훈이 매력적인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그의 문장을 손꼽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오로지 이 한 가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말을 믿는 대신, 현실의 조건을 믿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의 무자비한 법칙들이 관철되는 생태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훈은 그런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들을 보여준다.
'보아라! 이것이 세상이다.'라며...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완성되는 문학은 어디에도 없다. 글을 쓴다는 건, 그 행위 자체로 어느 구석에선가는 여전히 인간에게 잔인한 희망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조차도 없는 자가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이율배반이다. 희망 따위 없어도 우리는 누군가는 나의 말을 들어주겠지라는 심정으로 말을 건넨다. 막막한 절해고도에서 구조될 희망을 담아 해변에 돌멩이로 S.O.S.를 새기는 것처럼... 희망이 가장 큰 저주라는 사실을 알아도 사회는 인정이 아니라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란 사실을 알아도, 싸우면 싸울수록 좋아지긴 커녕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들어갈 확률보다 들어가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도 우리는 3점슛을 던진다.
바로 그 순간 '정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한 그뿐이기 때문이다. 가끔 왜 글을 쓰느냐, 왜 어떤 일에 나서느냐고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가끔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그외에 별로 할 일도 없지 않느냐고...
우리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이유가 되지 못한단 뜻이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 설령 손 끝을 떠난 볼이 림을 통과하지 못해도 버저가 울릴 때까지 슛도 못해보고 머뭇거리는 것보단 분명 나은 일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 단순한 '불매'에서 조금씩 '시위'의 모습을 띄어가고 있다. 알라딘뿐만 아니라 네이버, 다음에서도 그리고 이곳의 블로거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알라딘 불매'가 조금씩 더 많이 알려지고 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도대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