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후배 편집자가 써온 원고청탁서를 반려시켰다.

 

그동안 꽤 여러 명의 후배들과 함께 일했고, 상당히 많은 편집자들과 작업을 하고, 인연을 맺었다. 황해문화는 수도권이긴 하지만(서울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아닌 모든 지역이 외지(外地), 동시에 후지(後地)), 수도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발간되기 때문에 인력 충원이 어렵다. 그래서 지금껏 나와 일한 이들 대부분은 경력이 전혀 없었다. 전공도 제각각이었다. 아주 드물게 경력 있는 후배를 만나 일하기도 했지만, 내가 누군가의 선배로서, 직장상사로서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편집장을 맡은 초창기에 만난 후배들은 무능한 ’, 아직 경험이 일천한 선배 사수 때문에 고생했다.

 

사람들은 편집자란 직업이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불리는 직업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일이 있는지, 각기 다른, 많은 전문성이 요구되는지, 다시 말해 이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실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인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편집자는 책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인문학 전문 편집자, 사회과학 전문 편집자, 문학, 역사, 경제, 의학 및 과학, 경영 등 실용서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영역이 있으며 어린이책, 그림책, 사진책으로 가면 거의 큐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때로 출판사 편집자(와 마케터)는 문학평론가들보다 더 중요한 판단을 내린다. 이 작가의 책이 팔릴 것인가? 팔리지 않을 것인가? 또 편집자의 역할 중에서 기획이 점점 더 중요한 업무가 되어가고 있다. 과거엔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인들이 출판사 대표 주변에서 중요한 기획자 역할을 많이 했지만(물론 여전히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전문기획자의 역할이 더욱 중시되고 있다.

 

기획이 강조되다보니 과거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던 교정·교열 작업을 손쉽게 외주화로 해결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출판편집자로 시작했다가 결혼 이후 이른바 경단녀가 된 여성 편집자들 중 많은 수가 외주교정자로 일한다. 부끄럽게도 한국에서 뛰어난 경력과 능력과 경험을 가진 여성편집자들이 결혼 이후 경력이 단절된 채 집에서 인형 눈을 박듯, 원고교정을 보면서 한국 출판의 하부구조를 지탱하고 있다.

 

그래서 현업 여성편집자들 중에는 어차피 나도 결혼하면 외주 교정자가 될 텐데, 현직에 있을 때 외주교정자 단가라도 올려주고 나가자는 자조 아닌 한탄을 이야기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판권에 편집자로 이름이 오르지만, 편집과정에 거의 전혀 관여하지 않고, 해외번역서 에이전시 업무만 진행하고 전체 편집 작업을 외주작업자에게 책임 편집이란 형태로 떠맡겨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책이 나올 때까지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언론사 릴리즈를 위한 보도자료까지 외주자에게 맡긴다.

 

그런가하면 제법 큰 규모의 출판사는 제작 실무를 도맡아 진행해주는 제작 전문가들이 있어서 어떤 편집자들은 종이 발주 내는 법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과거 내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지질은 물론 종목과 횡목까지 따지던 시절에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그만큼 우리 출판이 전문화되는 경향이기도 하지만, 출판계 편집자 중에서 30년 이상 경력의 현업 편집자가 몇이나 있으려나 헤아려 볼 일이다. 만약 훗날 독립해서 출판사를 차릴 생각이라면, 미리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쨌든 후배를 새로 들이면 몇 가지는 반복해서라도 꼭 가르쳐주려는 교훈이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압축해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한다.

 

첫 번째. 일 잘하는 건 기본이다. 일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편집자는 협업자이기도 하다. 저자(필자), 디자이너, 제작자, 서점 관계자, 독자 등등과 협업해야만 책이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신뢰와 배려다.

 

신뢰는 상대로 하여금 나를 믿고 함께 일할 수 있겠다고 믿게 만드는 힘이고, 배려는 작은 친절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나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도록 여유를 주고,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어서 더 높은 수준의 작업 결과물이 도출되도록 할 수 있다.

 

두 번째. 편집자는 의견이 없을 때조차 의견이 있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오늘 후배의 원고청탁서를 반려시킨 이유다. 우리는 살면서 모든 상황에 대해 의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편집자는 매 순간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작은 문장 하나, 토씨 하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빼도 무방한가? 살려둬야 하는가? 같은 작은 일로부터 보다 큰 결과까지 책임지고 선택한다. 잡지 편집자에게 있어 원고청탁서란, 단행본 편집자에게 있어 출판기획서와 흡사한 의미를 지닌다.

 

편집회의를 통해 어떤 주제의 원고를 누구에게 청탁할 것인가까지 결정되었다고 해서 바로 원고청탁서를 보낼 수 있고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편집위원이나 기획자가 청탁서까지 써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청탁을 하는지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물론 시나 소설은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의도가 반영된다. 그 경우엔 어떤 시인, 어떤 작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편집진의 메시지가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계간 황해문화2017년 겨울호(통권 97) 같은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편집자는 원고의 모든 내용을 저자나 필자(또는 번역자)보다 더 많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당신에게 왜 이런 글()을 청탁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또한 편집자의 의견이자 의도이기 때문에 나중에 원고를 받았을 때(PC), 1차 교정 과정에서 저자(필자)에게 편집자의 의도를 의견으로 알려주고, 이에 대한 수정 요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자에게 의견이 없다는 것은 의도가 없다는 것이고, 의도가 없다는 것은 식당에 가서 주문한 대로 음식이 나오지 않아도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서 오늘 원고청탁서를 반려시키면서 매정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공부하기 싫다면 편집자를 그만 둬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세 번째(병 주고 약 주고).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의 호흡을 잃지 말라고, (자기중심)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편집자가 항상 자신이 열어둔 무대에서 춤추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과 협업하는 과정은 그만큼 다종다양한 스트레스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저자(내지 필자)들은 대부분 편집자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게 마련이다. 요리사가 자신이 상품으로 요리하는 우럭이나 광어로부터 감정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곤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지만, 편집자에겐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책은 잘 되기도 어렵지만, 잘 되면 대부분 저자 덕분이거나 나머지 힘센 자들의 순서대로 그 공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잘못되면 천하의 역적은 오로지 편집자다.

 

나는 항상 후배 편집자들에게 이곳에서 너의 편은 오로지 나뿐이지만, 심지어 나조차도 네 편이 아닐 때가 있으므로 절대 남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해준다. 네가 네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어라. 심지어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것도 믿으면 안 되는 자가 편집자다. ? 절대로 내가 지시한 대로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제대로 업무 지시를 내렸더라도 상대가 그대로 해준다는 보장이 없다.

 

출판은 이렇게도 봤다가 저렇게도 봤다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본문 디자인은 세세하게 보면 잘 보이지 않다가도, 멀리서 크게 보면 작은 오류들이 보일 때가 있다. 디자이너들에게 글자 사이를 반각만 띄워달라는 요구를 하는 자들이 편집자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들과 일하다보면 각자의 사정이나 상황 심지어 후배 편집자와 나의 문장 감각조차 다르기 때문에 교정은 둘째고, 교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의 문법은 경우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경우에 따라 다른 문법 체계를 구사할 때가 있다. 게다가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을 가진 필자와 만나기라도 하면 일일이 다 물어봐야 한다.

 

그럴 때마다 혹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공연히 기죽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해주는 충고가(우선 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의 호흡을 잃지 말라고, (자기중심)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편집자도 띄어쓰기, 맞춤법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너무나 뻔히 알고 있는, 심지어 내가 가나다를 제대로 쓰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가끔 멀찍이 서서 책에서 꼬투리 하나 잡고 즐겁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보면서 욕하는 사람들일 때가 많다. 그래도 어찌하랴. 우리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책을 팔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무사히! 프로는 오늘만 살지 않고, 내일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직장인이지 순교자가 아니니까.

 

우리 후배 편집자님은 어제의 실패를 발판삼아 오늘은 여러 자료를 검색하고 공부한 뒤 멋진 원고청탁서를 작성했고, 저도 흔쾌히 잘 하셨다고 칭찬을 드렸습니다. 신입편집자는 나날이 성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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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18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햐~! 정말 좋은 글이네요.
우리나라처럼 편집자가 홀대 받는 직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되면 작가 탓. 못 되면 편집자 탓이란 말은 예전부터 들어 온 말입죠.
천하의 하루키님도 편집자 말이라면 고개를 숙인다는데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면 편집자가 대우 받는 시절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든든하게 버텨주시는 바람구두님 같으신 분들이 계시니
언젠간 그날이 오겠죠. 편집자 홧팅입니다!
그 신입편집자 승승장구하면 좋겠네요. 외로워도 슬퍼도...^^

바람구두 2022-12-18 21:39   좋아요 1 | URL
^^ 후배들에게 1년만 기다리면 더 이상 야단 맞을 일이 없을 거고, 3년이 지나면 도리어 날 타박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해주곤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