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가를 잊을 정도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한마디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2,400백년 전 70세의 한 노인이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름 소크라테스. 오늘날 위대한 철학자, 인류의 성인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는 그는 왜 사형을 선고 받았을까?
대중의 무지를 지적하고 '너 자신을 알라'며 진리를 설파한 그를 우매한 대중이 죽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은 스파르타의 법정이 아니다. 최초의 민주주의. 온 인류가 추앙해마지 않는 바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법정'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아테네 민주주의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배운다. 특히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로 비록 여자와 노예, 외국인에게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민권이 있는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였으며,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 판결했던 민주법정 또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주의만은 우매한 민주주의이다. '아테네 민주법정'과 '소크라테스'. 어느 쪽이 옳은가? 소크라테스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우선 나는 보다 오래된 고발과 최초의 고발자들에 대해 답변하고, 다음에 그후의 고발과 고발자들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고발자들이 나를 여러분에게 거짓 죄목으로 수년에 걸쳐 고발해 왔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 재판을 이야기할 때 민주주와는 별개로 논의를 해왔으나,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한 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으로서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만 알아보도록 하자.
기원전 8세기에 미케네 시대의 왕정이 무너지고 그리스는 귀족이 지배하기에 편리한 언덕(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살면서 폴리스가 성립됐다. 기원전 683년부터 임기 1년의 아르콘 9명이 정권을 잡은 이후 아테네에서 귀족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의 금권정치가 이어진다. 기원전 561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참주정이 들어서고 참주정이 종식된 뒤 기원전 508년에는 솔론계의 평민파였던 클라이스테네스가 집권해 민주정의 기초를 세웠다.
클라이스테네스는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중심적 부족 구획을 지역적인 10개 구로 나누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를 구성했다. 이어 명문 가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여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 질서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원전 469년에 소크라테스가 태어난다.
이어 등장한 페리클레스의 15년 계획의 시대에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참된 중심이 된다. 그러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기원전 411년에 적국 스파르타와 공모한 불만세력이 민주정을 전복시키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을 '400인 과두정'이라 하는데 이 공포정치는 4개월만에 끝났으나, 아테네가 패전을 하게 되는 기원전 404년에 '30인 독재정'이 수립되어 8개월이나 지속되고 그 정도도 너무도 끔찍했다고 한다.
기원전 403년에 민주정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기원전 401년에도 민주정 전복을 기도한 세력이 있었고, 이 세 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그리고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는다.
자, 그러면 나는 변명을 시작해야 하며, 짧은 시간 내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비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성공이 나나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라면 내가 성공할 수 있기를, 또는 나의 변명이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아테네의 최초 입법은 기원전 7세기 말에 드라콘이 만든 드라콘법이었지만 수십 년 뒤 솔론이 정치와 경제를 개혁할 때 드라콘법을 폐지하고 법제를 민주적으로 개혁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론의 국제(國制)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특징을 갖는 것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대부의 금지다. 둘째는 피해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를 대신하여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인정한 점이다. 셋째는 민중재판에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 번째가 바로 헬리아이아(Heliaia)라고 하는 민중법원이었다. 이것은 시민이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 재판관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 최초의 법원이었다. 솔론이 창설한 법원이란 아테네의 민회를 말하며, 그 민회가 재판 목적으로 열린 경우 그것을 '헬리아이아'라고 했다. 이처럼 법원에 상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재판을 하는 최종 권한이 민중에게 있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그 상소는 무료로 보장됐다.
'헬리아이아'는 작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다카스테스(배심원)에 의해 집행된 공개재판이었다. 공개재판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중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헬리아이아'였다.
아테네에서 소송은 공법상의 소송과 사법상의 소송으로 나뉘었다. 공법상 송사는 국가 공동의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고, 사법상 소송은 소송당사자간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재판관, 검찰, 변호사가 따로 있지 않았고 시민이면 누구나 그 모든 역할을 담당하는 아마추어리즘이 철저했다.
배심원의 자격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모두 갖춘 30세 이상인 자로 그 임기는 1년이었으나,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시민이라면 누구나 희망하기만 하면 종신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매년 6천 명의 배심원이 추첨에 의해 선발됐고(위협이나 수뢰를 방지하기 위해), 10개의 법원에 각각 5백 명씩 배치됐으며, 나머지 1천 명은 예비였다.
재판은 피고나 피고인의 증인 앞에 구두로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현재와 같은 검찰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고소를 할 수 있었다. 원고나 고발자는 공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고발 이유, 사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청구 원인을 법적 기초와 함께 서면으로 작성해 5일 이내에 담당 아르콘에게 보내야 했다. 소환된 피고 또는 피고인은 자신의 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법적 쟁점을 담당 아르콘 앞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구두변론이 공판 전의 예심절차로 행해졌다. 여기서 공판 준비로서 아르콘이 소송당사자를 심문하고 증명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도왔다. 소크라테스 재판의 경우에는 바실레우스라는 아르콘이 예심절차를 담당했다.
예비심문 절차가 종료되면 아르콘이 구두변론과 공판의 기일을 지정해 10개의 배심법원 가운데 하나의 법원에 그 사건을 회부하고 공판 심리를 주재했으나, 그 자신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구두변론과 공판을 하는 날에 소송당사자는 증인과 지지자를 데리고 사건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법원에 출두한다. 공중이 방청을 의해 둘러싸고 그 중간에 법정이 형성됐다. 법정의 정리가 공개절차의 개시를 고시하면, 법원의 서기가 당사자의 소장 및 반소(反訴)를 낭독했다.
그 후 양 당사자는 높은 대 위에 서서 자기주장을 전개했다. 이때 시간제한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 재판처럼 공법상 소송인 경우에는 사법상 소송의 경우보다 변론시간이 길게 주어졌다.
당사자의 변론이 끝나면 배심원이 사실문제, 법률문제, 형평문제에 관해 투표로 평결을 했다. 평결은 투표의 과반수로 결정되고, 동수로 표가 나뉠 경우에는 피고의 승소 또는 무죄가 됐다. 배상액이나 양형이 법률상 정해지지 않은 사건이면 양 당사자가 주장하는 배상액이나 양형 중 하나를 배심원이 투표로 선택했다.
대규모의 배심원단은 개인의 책임감을 떨어뜨리거나, 데마고그(자파의 이익을 위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의 선동에 의해 정치적인 도구로 악용되거나, 법정변론에 의해 정치적 편견이나 감정의 호소에 치우치게 되는 등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배심원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1회적 결론만을 내렸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법적 추론이 발달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법은 '이론을 결여한 법'으로 불렸다. 또한 사법의 작용이 여러 국가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소송비용이 무료인 데 따르는 소송남용이 비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재판은 강력한 범죄자를 교정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기관으로 기능했다. 배심원은 추첨으로 선발됐기 때문에 소송당한 사람은 사전에 배심원의 구성을 전혀 알 수 없었으며, 배심원 또한 자신이 맡은 사건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투표의 비밀이 보장됐기 때문에 권력자가 배심원을 협박하거나 수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사적인 분쟁은 반드시 중재를 거쳐 재판에 회부됐던 점도 민중재판의 발달된 모습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상의 장단점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정치이론에서는 사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면 적극적인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배심에 의해 실현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배심재판의 결점은 시민의 양식에 의해 보완돼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나를 고발한 자들이므로 나는 소장(訴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하는 자이며 괴상한 사람이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청년타락죄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당시 고대 그리스는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반드시 명확한 법률적 근거에 의해서만 기소나 고발이 가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죄목으로 언급된 혐의들은 그 내용이 분명하지 못하고 애매하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불문법에 의한 지극히 예외적인 재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재판은 문제시 되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명확히 항변하지 않는다.
또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는 당시 무신론이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고발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발당했고 재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운다는 소위 '산파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라고 불리는 이런 대화방식은 많은 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당대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소피스테스들에게...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싫다고해도 그를 욕할 수는 있어도 그런 이유로 고소를 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는 불특정 다수의 배심원들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몇사람에게 미움을 샀다고 해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마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이고, 무지한 대중은 이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말도 안되는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평생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웠던 그는 어찌하여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을 변론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