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언컨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제목때문이었다. 이슬람 정육점. 교차점이 있을 수 없는 제목 아닌가. 무심코 스쳤다 눈에 들어온 책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슬람 정육점이란 제목은 정말 이슬람인이 정육점을 경영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은유적인 표현일까. 매우 모순적인 제목과 달리 표지는 꽤 유쾌해 보였다. 만화 주인공들처럼 모두 밝은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목의 비밀이 밝혀졌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하산이(그는 터키 출신의 무슬림이다.) 실제로 정육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식당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는 안나 아주머니조차도 그에게 어떤 고기가 좋은 고기인지 알려달라고 조를 정도로 좋은 고기를 골라내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는 제목 안에 어떤 대단한 은유적인 표현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약간의 기대는 그렇게 무너졌지만, 소설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이율배반적이었다. 이슬람 정육점. 그것은 평생을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또 다른 말이자, 그 상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얘야, 네가 겪어보지 못한 운명이란 없단다. - 이 불쌍한 녀석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 네가 태어날 때 너만 태어난 게 아니라 너의 운명도 함께 태어났거든." 그날 운명은 나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방심했던 탓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낯선 이가 찾아오면 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하산 아저씨를 보고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까맣게 모른 채 너른 개활지에 홀로 핀 들꽃처럼 서 있었던 거다.   p. 18

 

주인공 소년은 고아원에서 어느 날 하산아저씨에게 입양된다. 벌써 몇 번이나 다른 고아원에서 길러진 소년에게 낯선 아저씨(그것도 외국인)의 입양이 처음엔 해외입양인 줄 알고 두려웠지만(고아원 아이들 사이에 해외입양은 입양된 집 아이를 위해 장기가 적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곧 자신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대통령 사진이 없는 동네에 익숙해진다.

 

돼지고기를 난도질하는 무슬림, 식당을 운영하면서 온 동네 사람들의 배고픔뿐만 아니라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주는 안나 아주머니, 말은 더듬지만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유정, 자신이 벌써 몇 번째 거듭 태어났다는 맹랑한 녀석, 월세를 못 내 야반도주한 6명의 식구들이 살던 곳에 이사 온 매일 군가를 부르는 대머리아저씨, 세상의 온갖 개를 불러와 욕을 하는 쌀집 아저씨, 안나 아주머니 식당에 얹혀사는 그리스 병사인 야모스 아저씨 등등등. 사실 그런 익숙함은 바깥이라는 세상이 고아원과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고아원보다 더 이상했다.


야모스 아저씨는 전쟁터의 병사들은 누구나 자신이 천국에 갈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가 지금 견디는 이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이라고.     p. 27


신은 치사해.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제트기로 실어다 지옥에 처넣어버리거든. ... 정말로 이 세상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다면 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야 하고,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지녀야 돼. 그런데 나는 아무런 욕망이 없어. 그래서 죽지 못해. 억울해. 내가 태어나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대체 누가 왜 내 엉덩이를 걷어차 이 세상으로 처넣은 걸까?   p. 44


가난과 상처. 이 책의 주제는 이 두 단어로 압축된다. 하산은 가난과 사랑은 바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서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뚫고 나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뚫고 나오는 가난에 사람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는 어떤 이는 구성지게 군가를 부르게 만들고, 어떤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분홍 코끼리로 만들어 버렸으며, 또 어떤 이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된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처넣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마다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주요한 원인은 전쟁이었다.

 

작가는 한국전쟁 전사자 명단에서 하산과 야모스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터키와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작가에게 말을 건넸고, 작가는 이 소설을 완성한다. 작가에게 이 소설은 어떤 의무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게도 지금 이 글은 어떤 의무감이다. 이 책을 읽은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런 어쭙잖은 의무감. 


한국전쟁 당시 전 세계에서 이 땅으로 온 그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왔으며 전쟁 이전과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기억하는 전쟁은 다르다기보다는 이제는 틀리다고 해야 할 정도다. 서로 네가 틀렸다고 한다. 각종 이슈에 등장하는 군복 입은 할아버지들과 구닥다리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은 전쟁 영웅들. 한 땐 비장했던 반공구호들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릴 만큼 세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몸부림을 쳤으며,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내가 맞든 네가 틀리든 전쟁이 남긴 것은 가난과 죽음, 온 몸에 남은 상처들 뿐. 다른 나라에서 온 병사들 역시 전쟁이 남긴 유산은 어김없이 물려받는다. 하산과 소년은 똑같은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다.


“운명은 면식범이다.”   p. 17


운명은 우리가 이 세상에 처넣어질 때 같이 왔다. 그리고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린다. 운명이라는 녀석을 믿는 순간 녀석은 최초이면서 최후의 발길질로 간단하게 우리를 끝장낸다. 전쟁은 하산과 야모스를 이 땅에 보냈고, 소년은 하산에게 입양되었다. 하산은 왜 늙은 나이에 소년을 입양했을까? 이 땅은 그에게 빼앗기만 했을 뿐 준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세상에 흉터 없는 사람은 없단다. 모든 상처는 아무리 치료를 잘 해도 흉터가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로 이뤄진 가시덤불이라서 지상에 단 일 초를 머물더라도 상처 입지 않을 수가 없단다.” p. 111

 

주인공 소년은 여느 성장소설에서 보듯 하산 아저씨에게 입양되었다고 해서 따뜻한 보살핌으로 못된 아이가 점점 착한 아이로 달라진다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으로 환골탈태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 다국적인들이 살아가는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모든 게 허구라는 게 명백함에도 한 가지 진실만은 놓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한 없이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따뜻하지도 않지만 삭막하지만도 않은. 그리고 늘 그렇듯 이별은 다가온다.


가난한 동네에 재개발의 열풍이 불고 하산은 재개발과 돈의 논리에 밀려 정육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다. 아랫동네부터 점점 기계들에 의해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던 하산은 결국 쓰러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너무 늙었다.


그는 11월 10일을 기다렸다.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하산 아저씨에게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추모해야 하는 날이었으므로.

...

“보자마자 알았다. 그 흉터가 무엇인지. ... 그건 총상을 입었음을 증명하는 흉터다.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생길 수 없는 흉터야.”

...

“언젠가 너는 알게 될 거다. 네게 상처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p. 235~236


책 전체에 줄을 그을 만큼 마음에 쏙쏙 박히는 말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주인공 소년의 생각으로 표현되지만 그보다 꼭 남겨야 할 말은 이 말이 아닐까 싶다. 이 땅에는 전쟁이 있었고, 코리아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른 채 먼 타국으로 파병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서 죽었다. 그들에게 감사와 명복을 빈다.


그에게 이곳은 신이 없는 땅이었다. 맨 처음 파견군으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었다. 내가 왜 그랬냐고 묻자 그는 신이 없는 땅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고 했다.

“이국의 병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갔단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 수없이 많은 나라의 수많은 군인들이 묻혔지. 인류 가운데 제일로 밤일을 잘하는 앵글로-색슨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그런 출중한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어찌 지구 곳곳에 퍼져 있을 수 있겠니? 앵글로-색슨이 더럽히지 않은 대륙과 대양은 이 지구에는 없단다-안데스에서 커피나 마시던 게으름뱅이에 허풍쟁이들이었던 콜롬비아인들, 춥다고 참호에 난로를 피워놓고 꼼짝도 안 하던 멍텅구리 태국인들, 그놈들과 전혀 분간이 안 되던 필리핀인들-오 신이시여, 더러운 이교도 놈들을 입에 올리는 걸 부디 용서해주시길-정원에서 튤립이나 기르면 꼭 어울릴 것 같던 네덜란드인들, 사내다움이라곤 전혀 없이 수탉처럼 꽥꽥대던 프랑스인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잔뜩 기가 죽어 지내던 겁쟁이 벨기에인들, 코딱지만 한 곳에서 장난감 같은 총을 들고 왔던 룩셈부르크인들, 유태인처럼 밤을 아침이라고 생각하던 고집쟁이 에티오피아인들도 있었지 ...... 어디까지 했지? 그래, 맙소사! 입만 열면 고약한 물담배 냄새와 계피 냄새가 나는 더러운 터키 놈들도 있었지. 보스포루스 해협에 오줌이나 갈겨대던 녀석들이 사내랍시고 우우 몰려왔지. 만약 이곳이 한국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총을 겨눈 건 그놈들이었을 게다. 우리 그리스인들이 튀르크들의 엉덩이를 크레타에서 치면 그놈들은 단번에 에게 해 위를 날아서 카파도키아에 곤두박질친단다.”   p.120-121



ps. 나는 왜 자꾸 이 책을 알라딘 정육점이라고 발음하는지 모르겠다..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