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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일을 쓰는 것은 싫은 일이다. 싫은 일을 읽는 것도 싫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일은 싫은 일 없이 살아지지 않는다. 싫은 일은 흔하고 좋은 일은 드물다. 하지만 사는 일은 좋은 일 없이 살아진다.
(p.60)

사랑이라는 감정은 좋은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에 관해 말하든 법에 관해 말하든 분노나 용서에 관해 말하든 사랑을 빠뜨린 적이 없다. 사랑이 결여된 인간은 정치도 법도 분노도 용서도 올바르게 행할 수 없다. 사랑으로 그것을 다룰 때 인간은 이 세계에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정치와 법을 세우고 분노와 용서가 인간을 장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계도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이다(사실상 호소에 가깝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마사 누스바움의 모든 저작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결여된 채로 이 세계를 건설하고 통치한다. 사랑 말고 다른 많은 것이 이 세계를 장악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p.63)

내가 살아온 날들에 하루도 같은 것이 없다면 나와 날씨일 것이다. 나와 날씨가 하루 아니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멀리서 하얗게 엎어진 파도가 넓은 품으로 밀려와 내 발끝을 적시는 것 같다. 기억하자. 일생을 다해. 나와 날씨는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는 것을.
(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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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장수양 시인의 글이 그랬던 것처럼 유진목 시인의 글도 시보다 산문을 먼저 읽었다. 시와 산책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어서 작가님의 또 다른 산문을 읽고 싶기도 하고, 시는 어떻게 쓰실지 궁금해서 시를 읽고 싶기도 했다.

연초에 부산에 갔을 때 손목서가에서 둘러 본 서가의 인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단단하고 우직한 느낌의 서가였다. 나는 그날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구매했는데,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걸이 옆에 놓인 환상의 빛의 구절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그때는 엄마와 같이 살자."

힘들 때 찾아간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흘러 힘든 순간이 오면 다시금 찾아가 서가에서 주는 기운을 받고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 하고 와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서점이었다.

드문 좋은 일이었던 그날의 부산이 그리우면 이제는 유진목 작가님의 책을 펼쳐야지 싶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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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지는 채로 인생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생에는 나아지는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다. 각성과 반성이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후에도 인생의 실패는 여전하다.
깨닫고 자책하고 새 삶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만 그렇다. 삶은 부메랑처럼 언제나 돌아간다. 자기만 알고 상처를 주고 망쳐버리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순간으로.

-『술과 농담』 p.28
편혜영, 몰(沒) 9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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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슬픔이나 우울 같은 감정은 잘 감췄지만 기쁜 마음은 감추지 못하는 편에 속했다. 아마도 마음에 드는 잔을 발견하곤 들뜬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슬픔을 다루는 방식엔 나름 일가견이 있지만 기쁠 때 어쩔 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건 그동안 기쁜 일이 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험 부족. 말하자면 기쁨 부족. 나는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기쁜 거랑 행복한 게 다르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몰라"라던 보라의 말을 곱씹곤 했다. 이어지던 보라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도.

-『술과 농담』 p.141-142
이주란, 서울의 저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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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 매우 예민한 당신을 위한
샤히다 아라비 지음, 이시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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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클럽문학동네 5기 서평단으로, 샤히다 아라비의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읽었다. 책에 대한 내 감상에 앞서 팩트로만 설명하자면, 예민도가 높은 성격적 특성 때문에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 심리학 책이다.

1. 북클럽문학동네 5기 서평단으로, 샤히다 아라비의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읽었다. 책에 대한 내 감상에 앞서 팩트로만 설명하자면, 예민도가 높은 성격적 특성 때문에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 심리학 책이다.

 


2.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내가 매우 예민한 사람, 이른바 초민감자empath’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이 책의 42쪽부터 44쪽에 걸쳐 매우 예민한 사람 체크리스트가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해당 쪽수를 찾아보기 바란다) 초민감자가 아니더라도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은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책을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다.



3. 책을 읽는 내내 정세랑 작가님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의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이 글에 담아본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마티아스 마우어는 그런 면에서 예방주사에 가까웠던 셈인데, 그런 예방주사 두 번 맞았다간 죽을 일이었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잃은 것들과 얻은 것들(1993)에서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p.125-126)

 

심시선의 손녀 화수와 지수는 어느 날 할머니 심시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p.182)

 

이 부분을 유해한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유해한 사람을 못 떠나는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관계가 좋아서가 아니라 훨씬 더 위험하고 중독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우리는 해로운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정서적인 뇌에 충격이 가해져 편도체와 해마 같은 부위가 영향을 받는 한편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피질은 비활성화된다. 이는 우리의 자제력과 충동성, 감정, 위협에 대한 반응, 기억력, 학습, 계획 및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또 트라우마를 겪으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간 소통이 막히고 좌반구가 비활성화되어 집행 기능이 멈춘다. 집행 기능은 우리의 경험을 조직화하여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유익한 결정을 내리는 데 매우 중요한 능력인데 말이다.

(p.67)

 

화수와 지수의 말처럼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른 것이 분명하다. 심시선은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라 마티아스 마우어와의 관계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었으나, 시작선이 달랐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심시선이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매우 유해한 관계로부터 자신을 지켰고, 쉽지 않았으나 이제는 지나온 갈림길을 글로 쓰며 이해한 사람이라니.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나는 심시선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실재하는 인물이었다면 나는 그의 책을 구매해서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4. 나르시시즘적인 파트너에게 상처 입은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포럼 사이코패스 프리에서는 어떤 MBTI 유형이 나르시시스트들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지를 파악하기 위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시작했는데, 샤히다 아라비는 이 결과를 두고 놀랍지도 않다고 평했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가장 표적이 되기 쉬운 유형은 INFJ INFP로 조사되었단다. 이런 성격 유형은 감성이 발달하고 양심적이며 공감 능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을 볼 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이 지닌 특성과 유사하다고.

(p.45-46)

 

MBTI가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건 아니구나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MBTIINFPINFJ가 나온 나로서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MBTI가 전부가 아닌 만큼,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악성 나르시시스트들을 경계해야한다. 또한 유해한 성격 유형에서 양성에 해당되는 사람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경계 침범자, 짜증 유발자와 관심 종자, 에너지 뱀파이어 등등. 심리학이다보니 용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어, 부족한 후기지만 이 글로 말미암아 이 책에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일독하기를 권한다.

 

샤히다 아라비가 소개한 것들 중 가장 인기가 많았고,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매우 예민한 사람이 유해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남들을 돕는 일이 좋지만, 내게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당신의 해로운 행동을 받아줘야 할 책임은 없어요. 당신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관리하거나 당신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거나, 평화를 유지하려고 당신이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책임도 없죠. 나는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고 감정 스펀지도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당신의 고통을 투사할 대상으로 존재하지도 않아요. 내가 할 일은 나 자신, 즉 가장 나다운 사람이 되어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것뿐이죠. 내 상처를 치유하고, 나를 자극하는 요소들을 관리하며 나 자신을 돌봄으로써 스스로 고갈되지 않고 진심으로 남들을 대하는 일이요. 결국 다른 사람들과 특히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과 건강한 경계를 유지하는 일이죠.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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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2022년은 말들의 흐름 시리즈 도장깨기하며 보낼 것이다.

정용준 작가님 소설집 『선릉 산책』도 함께 ꒰◍ˊ◡ˋ꒱੭⁾⁾



정용준, 선릉 산책

유진목, 산책과 연애

김괜저, 연애와 술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 『술과 농담』

김민영, 농담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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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이민진, 파친코2

박웅현, 문장과 순간

다카노 가즈아키, 13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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