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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 - 유쾌한 영국인 글쟁이 팀 알퍼 씨의 한국 산책기
팀 알퍼 지음, 이철원 그림, 조은정.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5월
평점 :
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 문득 ‘영국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영국남자들이 떠올라서 흐뭇했다. 타임로드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닥터, 베이커가 221B에 사는 탐정과 그의 동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말하는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한 명 한 명 봐도 좋은 남자들이 떼로 나와서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던 엑스맨 리부트 시리즈 속 배우들 등등 서평이 아니라 영국남자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거뜬하게 3장은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글에서 소개할 영국남자 역시 스크린과 브라운관과 모니터 너머로 만나는 영국남자 못지않게 매력이 넘친다.
200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 다이내믹한 한국인들과 버라이어티한 한국 음식의 매력에 빠져 2007년부터는 아예 한국에서 살게 된 영국인 칼럼리스트이자 문화통역관 팀 알퍼. 이 책 『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는 그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아오며 느끼고 생각하고 맛보고 사랑하고 슬퍼했던 경험을 담은 한국 문화 산책기다.
영국남자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며 경험했고, 지켜 봐온 한국 이야기였어도 충분히 재밌었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꼽는 매력은 따로 있다. 먼저, 그가 자랑하는 유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 살 때는 외우고 있는 농담이 수백 가지는 되었는데 이제는 거의 ‘농담 깡통’이 되어버렸다지만 그의 유머는 내게 정말 잘 맞았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제대로 원한다면 ‘참치집-호프집-노래방-해장국집’ 코스를 따르면 된다. 아직 자신이 젊고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태리 식당-지나치게 비싼 술집-역시 지나치게 비싼 클럽-편의점 라면’ 코스를 즐긴다. (p.30)
한국의 밤 문화, 특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설명하는 이 구절이 너무도 웃겼다. 1차 참치집부터 4차 해장국집까지, 어쩜 이리도 디테일한지. 그의 유머를 느끼기에는 한 구절로 부족하니, 한 구절을 더 보태자면 이 구절이 좋겠다.
때로 서울 지하철은 달리기 시합이 벌어진 운동장이나 헬스장을 연상시킨다. 목표물을 향해 뜀박질하는 승객들 때문이다. 집이 북한산 근처라 주말이면 지하철에서 숱한 등산객을 만난다. 그들은 해발고도 837미터인 북한산 백운대는 거침없이 오르면서 지하철 계단은 걸어 올라가기 싫어한다. 꼭 노약자용 승강기를 타려고 든다.
지난주에는 노약자용 승강기를 향해 뛰어가는 등산객들에게 휩쓸렸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승강기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 승강기 앞에서 걷고 있던 나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그들에게 밀려 넘어질 뻔했다. 세렝게티 초원의 배곯은 사자에게 쫓기는 한 무리 양 떼도 그렇게 뛰진 않을 것 같다. (p.43)
수업 시간엔 틈틈이 수면을 보충하고, 점심시간이면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가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뛰어 내려가 배드민턴을 치던 고등학교의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면 이와 같은 문장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던 구절이다.
두 구절만 소개했지만, 글이 전반적으로 유머가 배어있어서 읽는 내내 유쾌했다. 이쯤에서 이 책의 두 번째 매력을 소개해야겠다. Part 2 한국인만 모르는 버라이어티 코리아에서 유교에 대한 그의 글이 인상 깊었다. 세월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 한국 여성이 성형수술을 많이 받는 이유와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서양 매체의 시선, 최순실 게이트와 한국 걸그룹이 롤리타콘셉트로 인기를 끄는 이유 모두 유교 사상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에 그는 ‘무엇이 유교 사상 덕분이란 말인가’하며, 위에 언급된 일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서양 글쟁이들 다수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한국에 무슨 일만 있으면 유교 사상을 끌어들여 탓하는 서양인들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그는, 태어나서 줄곧 한국에 살아온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문화의 가장 훌륭한 특징 가운데 일부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산물이다. 『격몽요결』에서 배움과 자기수양이 좋은 행정의 토대라고 한 이이(李珥)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존경할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나 테리사 메이 같은 서양의 지도자들도 조금이나마 배움과 자기수양을 실천해 자기 안의 무지를 몰아내려고 애쓰면 좋겠다. 기존의 문화적 가치를 이용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정약용의 사상 또한 매우 훌륭하고 실용적이다. 신윤복처럼 혁명적인 예술로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들마저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다. (p.120)
특히 마지막 줄.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신윤복이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인 건 알았어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산물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단순히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저자만의 균형있는 시선이 오롯이 느껴져서 좋았다. 파트 제목 그대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까지 담겨 있다니. 물론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지하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파트 2를 지나면, 푸드칼럼리스트인 그의 장기가 펼쳐진다. 평소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찜질방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쩐지 식혜와 미역국과 맥반석 달걀은 찜질방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솥에다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리 서양 사람에게는, 그 모든 떡의 이름을 외우려면 최소한 몇 년은 할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지만 그가 떡 이야기를 하면 좋아하지 않는 콩떡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은 스크린, 브라운관, 모니터로 만나는 그 어떤 영국남자가 해낼 수 없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이 나라 한국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애정을 갖게 만드는 글을 써내는 남자. 그렇게, 내 영국남자 리스트에 조용히 걸어 들어온 유쾌한 글쟁이, 팀 알퍼 씨. 그의 한국 산책기는, 이 책을 읽은 내게 즐거운 산책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