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한, 저는 쇼핑 중독자입니다. 책을 향한 기이한 허기와 갈증으로 허겁지겁 이제껏 1만 권이 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지만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합니다. 다른 물건들을 살 때는 우유부단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도, 유독 책만큼은 덥석덥석 챙긴 뒤 과감하게 카드를 긁지요 (어제만 해도 하루에 열아홉 권의 책을 샀습니다). 물론 결제일인 매달 27일이 되면 긴 한숨을 쉬며 후회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날 하루뿐. 저는 도무지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책에 관한 한, 저는 허영투성이입니다. 이미 구입한 책들을 미처 다 읽지 못했는데도 계속 사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할까요(심지어 어떤 책은 결국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삽니다). 서재를 둘러본 어떤 사람들은 놀라면서 묻습니다. “이 책들을 다 읽으신 거예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젠 제법 뻔뻔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반도 못 읽었죠.” 저는 도저히 만족할 줄 모릅니다.

 

책에 관한 한, 저는 고집불통입니다. 좀더 체계적이고 능률적인 독서법이 있을 텐데도, 나만의 책읽기 방식을 고수합니다. 산만한 독자인 저는 한꺼번에 10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갑니다.(게다가 그 책들은 대부분 분야가 다릅니다). 완독에 대한 의지도 없어서 흥미를 잃으면 서슴없이 중간에 그만두지요. 책을 구입할 때도 남들의 추천 리스트나 베스트셀러 순위 같은 것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1만 권이 넘는 책을 사면서 오랜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물건을 고르는 나만의 감식안이 생겼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서재에 꽂아둘 때도 나만의 방법을 고수합니다(그러다 내 서재에서 특정 책을 못 찾아 쩔쩔매면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저는 도대체 요령부득입니다.

 

하지만 저는 변명합니다. 이게 제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했지요. 사랑하기 위한 조건을 줄줄이 내걸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활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책을 정말 사랑한다면 문자의 형태로 책에 박혀 있는 지식이나 서사뿐만이 아니라, 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 책에 서린 정신, 책에서 나는 냄새,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을 파는 공간, 책을 읽는 시간 등이 모두 모이고 모여 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낸다는 것이지요.

 

저는 목적지향적인 독서를 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특정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책을 선택해서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게 책읽기는 그저 습관입니다. 과거에 그래왔고 현재에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미래에도 저는 관성적으로 책을 읽겠지요. 그렇게 사랑에 습관이 더해질 때, 마침내 책은 제게 말을 걸어옵니다. 책읽기는 제게 오락이고 영감이면서 시간을 배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인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 이동진, 밤은 책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


종종 꺼내 읽는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은 사실 프롤로그다. 글이 어쩜 이리 아기자기한지,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도 있지만 책에 대한 동진님의 욕심과 허영과 고집이 그대로 묻어나서 참 좋다. 

 

 

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는, 오락이고 영감이면서 시간을 배우는 방법 앞에서 내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반도 못 읽었죠."


p.s. 새벽에, 이 글을 필사하다가 비가 내리는 소리에 잠이 들었다. 속상할 땐 필사가 제격이며, 필사하는 여름밤에는 밤비가 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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