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다, 당신을 만나다
임정일 지음 / 책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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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나는 집 앞 고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날씨에 따른 교통상황과 들쭉날쭉한 버스 배차시간을 고려해서 많게는 몇 십분 더 서두르다보니 절로 부지런해졌다. 지각에 대한 두려움 내지 강박이 있어서 내 뜻과 무관하게 지각할 때를 제외하고는 여유있게 다녀서 그런지 등굣길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다. 버스로는 짧은 거리지만 책을 읽던 기억, 학교에 도착해서는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교실을 둘러보던 기억, 학년부장 선생님보다 먼저 도착한 경우도 더러 있어서 교실 앞에서 각 교실마다 문을 열어주셨던 학년부장 선생님을 기다리던 기억, 창문을 열어놓고 교실을 환기시키면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던 기억 등 부지런함이 내게 가져다 준 추억들이다.

 

이 책 느리게 걷다, 당신을 만나다가 말하는 느리게 걷는다는 것도 그런 거다.

 

그 차이는 10분이다. 10분이란 시간은 내가 마주치는 대상과 대상 사이에 쉼표를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낙엽을 밟았고,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노란 버스에 손을 흔들어 주었고, 담쟁이넝쿨을 보며 도종환의 시를 떠올렸고, 우체통 앞에서 손 편지를 써 본 지 참 오래되었다는 반성을 했으며 먹이를 찾아 기웃거리는 길고양이에게 말을 걸었고, 닭둘기가 되어 버린 비둘기의 진화에 대해 생각했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그런 거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일상에 쉼표와 여백을 얻기 위해 10분 일찍 움직이는 것이다. (p.49)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시간을 내서라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지않나. 10분이면 우리는 포털사이트의 연예란 속 기사들을 전부 확인할 수 있고, SNS에 접속해서 재밌는 컨텐츠를 즐기거나 지인의 근황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처럼 느리게 걷고, 당신을 만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전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좀처럼 아무나가 되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방법이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SNS를 통해 새파란 가을 하늘이나 낙엽을 찍은 사진을 감상하고 담쟁이넝쿨 사진을 배경으로 쓰인 도종환의 시를 읽으며 비둘기가 닭둘기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들을 코믹하게 풀어낸 만화를 읽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스마트한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낙엽을 밟으며 낙엽 냄새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꿈쩍하지 않는 비둘기의 느릿한 움직임을 보며 어쩌다 닭둘기가 되었을까 상상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인 것이다.

 

이전에 읽었던 글과 크게 다른 글은 아니었지만 한 장 한 장 읽고, 실린 사진들에 시선을 둔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임은 분명하다. 바쁜 연말이지만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쉼표를 찍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이 책의 뒷표지 구절처럼 정말이지 느리게 걷다 보면 분명 당신이 잃고 있던, 그 무엇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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