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손에 책 두 권이 들려있었다. 한 권은 뇌에 관한 책이었고, 한 권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에쿠니 가오리, 황경신에 이어 사강의 책으로 익숙한 소담출판사의 책이 아니었다. 범우사의 범우문고로, 판형이 신선해서 손에 쥐었을 때 그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강의 책이라면 으레 제목 한 번쯤은 들어봤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꼼꼼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두 권의 책을 읽어봤는데 이 책 마음의 푸른 상흔은 또 달랐다. 쓸쓸했던 단편집과 다소 격했던 환각 일기를 지나 만난 이 에세이 소설은 정말 새로웠다. 첫 장은 그냥 시작이 이런가보다 싶었다. 2장부터는 무일푼으로 프랑스에 온 스웨덴 출신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의 파리 생존기를 그려나가기에 이 둘이 주인공인 소설이구나 싶었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집필하는 작가 자신의 생존기가 다시금 펼쳐진다. 그녀의 소설을 집중해서 읽다말고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그녀가 포스팅 해둔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재밌는 건, 소설은 시종일관 냉정하고 담담한 문체인데 반해 에세이는 열정적인 걸 넘어 거침없는 문체로 쓰였다는 점이다.

 

마약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자신을 변론하던 사강답게 이 책에서도 곳곳에서 사강다운 면모를 느낄 수가 있는데 소설보다는 에세이 쪽이 그렇다.

 

그리고 아이를 갖는 문제는 여자가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고, 낙태는 합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낙태가 돈 많은 여자에게는 잠깐의 불편이겠지만 돈 없는 여자에게는 끔찍한 도살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낙태를 한 적이 있다고 나의 위대한 신들 앞에서 맹세했다. (p.56)

 

그렇다. 그것은 나의 권리이다, 내 전집을 사지 않는 것이 모든 독자의 권리이듯이. (p.57)

 

그 이미지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페라리, 위스키, 스캔들, 결혼, 이혼 등 대중이 말하는 예술가의 삶을 보낸 지도 벌써 십팔 년이다. 하긴 그 아름다운 가면에게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소 원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취향, 그러니까 속도, 바다, 자정, 모든 화려한 것, 모든 어두운 것, 나를 잃게 만드는 것, 고로 나를 찾게 만드는 것에 딱 들어맞는걸. 자기 자신의 가장 극단적인 면, 자기가 가진 모순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혐오하는 것들, 자기가 가진 분노와 악랄하게 싸워야만 인생이란 게 뭔지, 어쨌든 적어도 내 인생은 뭔지, 아주 약간, 그렇다, 아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 무엇도 내게서 그 생각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p.68-69)

 

낙태에 관한 사강의 이야기를 꽤나 덤덤하게 읽었는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귀하게 여기는 법인데 사강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사강의 이러한 생각들이 사강의 작품 속에 녹아있고, 사강 자신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는 이 작품을 두고 어떤 작품보다 사강의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얼떨결에 그녀의 대표작을 두고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어 얼떨떨하다. 이전에 읽은 길모퉁이 카페독약보다는 사강의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책을 찾아 읽지 않은 것이 내 권리였다면 반대로, 찾아 읽는 것도 내 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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