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첫 햇살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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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아침의 첫 햇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작년에 썼던 에쿠니 가오리의 한낮인데 어두운 방서평이 떠올랐다. 그 서평에서 나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캐릭터 정인의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는데, 아침의 첫 햇살엘레나를 보고 있으면 자주 정인 생각이 났다.

남성 작가가 썼지만, 남성 작가가 썼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표현한 작가 파비오 볼로. 극 중 화자는 아내인 정인이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정인의 대사와 감정선이 오랫동안 남던 영화를 연출한 감독 민규동. 이 두 사람이, 누구보다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연정인이라는, 엘레나라는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우선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그려내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아침의 첫 햇살을 읽으면서 눈여겨 읽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기록이다. 일기를 쓰는 여자도, 그 일기를 읽는 여자도 엘레나인데, 현재의 내가 전에 쓴 일기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전개 방식이 재미있었다. 일기를 쓰는 게 유일한 낙인 엘레나. 아무도 들춰 보지 않는 일기장에 엘레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정인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으면서 삶의 활기를 되찾았던 것과 다르게, 엘레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읽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을 굳힌다. “한때 나였던 이 여인을 나는 사랑한다며 말이다.

엘레나의 일기는 기록하는 그 당시에만 멈춰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엘레나는 일기를 읽으면서 일기에 차마 담아내지 못했던, 쓰기조차 두려웠던 또 다른 속사정을 털어놓는데, 그렇다는 것은 일기를 쓴 과거의 엘레나와 일기를 읽는 현재의 엘레나가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하는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건, 엘레나의 성실한 기록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일기장에 파올로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때면 나는 언제나 죄책감을 느낀다.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 일기장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일기를 지우거나 찢을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정해놓은 규칙 중의 하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글의 내용들이 나중에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p.42)

 

일기는 확실히 과거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도록 만든다. 놀랍기도 하지만 기운을 쏙 빠지게 만드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내가 옛날에 어땠는지를 깨닫는다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일기를 통해서 깨닫는다는 것이 왠지 나를 슬프게 한다. 이 일기에 쓰인 것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 제일 무서운 것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빈 페이지들이다. (p.81)

 

일기에 쓰인 것들이 자신을 두렵게 하고 제일 무서운 것은 쓰이지 않은 빈 페이지들이라고 말하지만 엘레나는 일기로 남은 내용들이 나중에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기에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대화를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쓰는 현재의 자신보다, 그런 현재의 자신과 대화 할 미래의 자신을 위해. 그런 엘레나가 맞이하는 아침의 첫 햇살 곁에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김없이 일기가 놓여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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