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제로
롭 리이드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이튠스가 등장하기 전 최고의 온라인 음악서비스 시스템이었던 랩소디의 개발자이자 리슨닷컴의 설립자로, 음악 및 IT업계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해온 롭 리이드의 첫 소설 데뷔작인 이 책 『이어 제로(Year Zero)』의 주된 설정은 이와 같다.

 

은하계에는 과학, 예술,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고등생명체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유일한 단점은 음악을 더럽게 못한다는 것뿐. 이들은 지구 음악을 처음 접하고 뇌출혈과 황홀경에 빠진 1977년을 자신들의 원년(Year Zero)으로 삼을 만큼, 로큰롤과 팝 등 지구 음악에 심취한다.

 

소설가 박상의 소설 『15번 진짜 안 와』의 도입부에서 록(Rock) 음악에 빠진 신들이 떠오르는 설정이었다. 여기까지는, 나처럼 비슷한 설정을 접해 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설정이다. 신 혹은 외계인이 지상 혹은 지구의 음악에 빠진다는 설정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이력을 다시 살펴보자. ‘음악 및 IT업계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에 눈이 간다. 이어서, 이 소설의 다음 설정을 읽어보자. ‘그러나 수십 년 후, 빅뱅 이래 최대 규모의 저작권 침해와 부채로 우주는 파산 위기를 맞게 된다. 천문학적인 빚을 갚느니 차라리 지구를 파멸시키려는 은하계 반란 세력이 지구로 침입한다.’라니. 지구 음악을 처음 접한 1977년을 원년으로 삼을 만큼 지구 음악에 심취한 외계인다웠다. 심취해도 너무 심취해버린 나머지 빅뱅 이래 최대 규모의 저작권 침해와 부채로 파산 위기를 맞는 그들. 독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재밌기 그지없지만,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빚을 갚느니 차라리 지구를 파멸시키려는 생각을 한 것 역시 재미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설정해서 소설을 쓰는 건, 비단 롭 리이드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사실적으로 탄탄하고 맛깔나게 쓰는 건 분명 롭 리이드만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롭 리이드와 같이 IT분야와 음반 산업계를 잘 아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그걸 ‘외계’라는 소재에 녹여낸 건 롭 리이드만의 생각이었을 테니까.

 

특히, 나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WoW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겁나게 먼 데서 접속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거예요. 그에게 현직 대통령 이름이나 서울의 거리 이름을 물어보세요. 분명히 당황해서 말을 더듬을걸요.”

“진짜 한국인은 모두 온라인 트리인가 뭔가에서 이뤄지는 다른 게임을 즐깁니다.” (p.131)

 

외계인들에게는 지구가 출입금지 구역이라, 불법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워크래프트를 통해 인간과 소통을 하는데, 그 때 소통하는 지구인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한국인’이라고 한다니. 책을 읽는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참 재밌는 구절이었다. 외국에서는 외계인이 한국인이라고 둘러댈 만큼 물리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영국의 국민 드라마라 불리는 SF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애청자인 나는, 외계라는 설정이 낯설진 않았지만, 그 외계에 관한 자세한 설정들은 확실히 어려웠다. 닥터후의 경우, 영상물이다 보니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볼 수 있었지만 책은 읽고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낼 자신이 있다면 극단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돋보이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시키면서도, 특유의 신선함과 영리함, 재미를 선사하는 독창적인 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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