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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재앙
케르스틴 기어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1월
평점 :
드라마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삶이다. - 알프레드 히치콕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처럼,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드라마 아닌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당한 불의의 사고로 드라마 같은 삶을 살게 된 여자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없는 것만 생각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남편인 펠릭스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어느새 둘의 애정 생활에 소리 없이 스며든 일상을 보내면서 ‘남편과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하는 회의감을 느끼는 여자, 카티가 바로 그 여자다. 그런 카티의 앞에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 마티아스가 나타나는데, 회의감이 커질수록 카티는 우연히 만난 마티아스를 향한 사랑도 커감을 느낀다. 카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날은, 마티아스와 카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그 날이었다.
놀라움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 빌헬름 부슈
병원에서 눈을 뜬 카티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기 시작하는데, 의식을 되찾은 날이 바로 남편 펠릭스와 처음 마주친 5년 전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 찰리 채플린
그렇다. 카티는 타임 슬립을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카티는 운명과의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격언(혹은 명언)들을 넣어서 줄거리를 정리해봤다. 책을 읽을 때도 격언들을 꼼꼼히 챙겨 읽었지만, 줄거리 사이에 넣어 읽으니 격언이 괜히 격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격언이란 삶 속에 존재하고, 삶 속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이 책 『이토록 달콤한 재앙』의 핵심은 타임 슬립을 통해 ‘이토록 달콤한 재앙’인 두 번째 삶이 주어졌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카티의 삶을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선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카티의 선택을 수긍하기도 하고, 수긍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것이다. 카티의 선택이 낳은 결말을 납득하거나 아쉬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 책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타임 슬립이라는 다소 흔하고 익숙한 판타지 코드를 녹여냈지만, 주인공 카티와 카티의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각각의 에피소드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어서 식상하고 허무맹랑한 로맨스 소설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 부부 혹은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을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주며,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는 과정을 디테일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필치로 그려낸 점. 마지막은, 한국판 속 ‘옮긴이의 말’이다.
소설이 끝나면 이 책을 번역한 옮긴이 함미라의 편지가 이어지는데, 바로 주인공 카티에게 옮긴이가 보내는 편지다. 이 편지는, 책에 대한 옮긴이의 감상 같으면서도 실제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어서 그런지, 꾸밈없이 솔직한 옮긴이의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두 발을 대고 서 있는 이쪽 들판보다 가보지 않은 저쪽 들판이 왠지 더 푸르러 보이는 건 결코 나만 그런 건 아니라고 확신해. (중략) 내가 너처럼 혹시라도 두 번 살 기회가 주어져 다시 선택하게 된다면, 난 분명 나의 마티아스를 선택할 것 같아. 그런데 말야, 정말 신기하게도 결국에는 마티아스인 줄 알고 선택했던 그가 알고 보니 펠릭스였다는 황당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 (결론적으로 펠릭스가 마티아스고 마티아스가 펠릭스가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p.365 옮긴이의 글 중에서)
책을 다 읽고, 카티의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만난 이 글은 옮긴이 이전에 한 명의 여자로서 카티의 선택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특히, 카티와 같은 유부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점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번역을 하는 내내 카티를 생각했을 번역가의 글이어서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
* 마리 폰 에브네에셴바흐는 어떤 상황을 생각했던 걸까? 나도 그걸 생각하고 싶다.
- 케르스틴 기어
위 격언은 책에 담긴 수많은 격언 중에 저자 케르스틴 기어가 유일하게 말을 덧붙인 격언인데, 그래서인지 이 격언은 저자 케르스틴 기어가 이 책 『이토록 달콤한 재앙』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가장 맞닿아있는 느낌이었다. 마리 폰 에브네에셴바흐가 어떤 상황을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케르스틴 기어만의 시점에서 풀어낸 글 같았다고나 할까.
바로 행복인 그걸 생각하는 작가 케르스틴 기어의 『이토록 달콤한 재앙』 덕분에 내 삶의 진짜 보물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자기만의 진짜 행복을 깨달은 여자, 카티의 눈물겨운 여행기이기도 한 이 소설을 읽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