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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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말이 없어져요. 한 사람과 오래 대할수록 더 그렇죠.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굳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겨요. 사람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말하기 힘들 땐 믹서기를 돌리는 거예요. 청소기도 괜찮고, 세탁기도 괜찮아요. 그냥 내 주변 공간을 침묵이 집어먹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살아있는 집에선 어떻게든 소리가 나요. 에너지라고들 하죠.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자신의 공간을 침묵이 삼키게 두지 마세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임수정이 연기한 ‘연정인’이라는 캐릭터의 대사 중에, 내게 가장 남았던 대사다.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한낮인데 어두운 방』을 읽고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대사이기도 하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정인과, 『한낮인데 어두운 방』의 미야코에게는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아내 역할에 충실하고 집안일에 착실한 주부라는 것. 둘째, 상황은 달랐지만 남편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조금 특별하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의 미야코의 남편 히로시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 대화를 통해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여자의 심리를 알아채기는커녕, 오로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며 아내를 그저 공기와도 같은 존재로만 여기고 어리석게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정인의 남편, 이두현은 입만 열면 불평과 독설을 쏟아내는 정인으로 인해 결혼생활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수백 번씩 이혼을 결심하지만 아내가 무서워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던 차에, 어떤 여자든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는 전설의 카사노바에게 아내를 유혹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남편들을 둔 탓이었을까, 미야코가 어느 날 미국인 존스에게 빠지게 되고 정인이 카사노바 성기에게 빠지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여자가 바랐던 것은, 이해받고 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과 대화를 통해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여자의 심리였고 존스와 성기는 그녀들의 바람을 충만하게 충족시켜줬던 남자들이었다. 존스는 미야코와 필드 워크(산책), 대중목욕탕가기, 초밥 먹기, 차 마시기를 하며 끊임없이 대화했고 성기는 정인과 그릇에 대해 이야기하고 놀이공원, 목장 등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끊임없이 대화했다. 존스와 성기가 그녀들의 남편과 달랐던 점은, 그녀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녀들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맞장구 쳐 주면서 대화를 통해 감정을 나누었고, 그녀의 말을 이해함으로써 그녀를 이해해주었을 뿐이다. 쉬운 일 같지만,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한 일. 불륜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녀들의 외도는 납득이 갔다. 내가 미야코였다면, 내가 정인이었다면 내 남편이 그런 남편이었다면 나 역시도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공통점은 그녀들의 ‘자아 찾기’라는 공통점으로 귀결된다. 재밌는 건, 미야코와 정인에게 있어서 존스와 성기는 새로운 자아를 찾는데 통로가 되긴 했지만, 함께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는 미야코의 말처럼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들과의 불온했던 관계는, ‘한낮인데 어두운 방’에 있는 것 같았던 마음에서 벗어나게 만든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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