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쓸 만한 이론
스콧 허친스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여기, 조금은 특별한 상대와 매일 대화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닐 바셋 주니어, 삼십 대의 이혼남이다. 그가 매일 대화하는, 조금은 특별한 상대는 ‘닥터바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다. 단순한 인공지능 컴퓨터였다면, 특별하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닥터바셋이’ 조금은 특별한 이유는 돌아가신 닐의 아버지의 일기를 토대로 한 인공지능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이미 발간된 책과, 곧 출간될 책들의 소식이 한데 모이는 세계 최대 도서전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에서 단연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로 꼽혔다는 이 책. 납득이 갔다. 책의 작품성은 둘째치더라도, 설정만큼은 정말이지 인상 깊었으니까. 스스로 권총을 쏘아 자살한 ‘아버지’가 생전에 기록했던 모든 사소한 생활, 감정, 대화가 담긴 일기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지능을 결정하고 발전시키는 데이터가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닥터바셋’과 닐의 대화는 상상이상으로 재밌었다. 처음엔 일로 시작했던 컴퓨터 속 아버지와의 대화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프로그램이 점점 실제 아버지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깊어진다. 닐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부자간에 이렇게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이 소설의 설정이 더욱 흥미로워졌다. 실존하는 아버지였다면,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을법한 말들도 ‘닥터바셋’은 빼는 법 없이 대답한다. (닥터바셋이 실제 아버지에 가까워지면서 오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도 그럴게, ‘닥터바셋’은 인공지능 컴퓨터가 아닌가. 아무리 아버지의 사소한 생활, 감정, 대화가 담긴 일기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냥 컴퓨터가 아니라 인공지능 컴퓨터라 할지라도 ‘닥터바셋’은 엄연한 컴퓨터다. 질문을 입력하면 답을 출력해야하는 컴퓨터 말이다. 대하기 가장 어려웠던 아버지와 대하기 가장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컴퓨터, 상상하지 못했던 이 기막힌 조합. 목소리가 오가는 대화 대신 모니터에 기록되는 대화가 오고가며, 자살로 세상을 떠난 후의 아버지의 생각이 담겨있지는 않지만 이 세상 그 어떤 대화가 부럽지 않은 대화임은 틀림없다. ‘닥터바셋’을 통해 아버지 생전에 듣지 못했던 아버지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닐은 숱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진 오해와 이면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닐은 ‘사랑에 관한 쓸 만한 이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하지만 쓸 만한 사랑 이론은, 결국에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적자생존의 세상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위대한 신이 강림할 그릇일 뿐이다. 아니면 시장에 조종당하고 있는 수벌들일 뿐이거나, 사랑은 자기실현이다. 사랑은 자력이다(석면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도움은 되지만 불완전한 설명이고(각각이 약간은 냉정한 면을 갖고 있다), 서로 상충되고 결국에 어떤 결론도 내놓지 못한다. (p.493)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빠진다며, 자신을 예로 드는 닐. 또,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안다. 닐이 이럴 수 있었던 건, 차갑고 완고해서 살아있을 때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아버지의 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컴퓨터 ‘닥터바셋’과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배운 건 사랑에 관한 쓸 만한 이론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관한 쓸 만한 이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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