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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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이 『하느님의 보트』였던 탓일까? 나는 이번 책 『잡동사니』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보트』를 자주 떠올렸다. 그건 아마도, 『하느님의 보트』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시점’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읽었기 때문인 듯 싶다. 엄마이자 어른인 요코의 시점과 아이이자 딸인 소우코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던 『하느님의 보트』는 때론 연애소설로, 때론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었다. 이 점이 내게 있어서 소설의 매력을 극대화했던 부분이었다.

 

이번 작품 『잡동사니』역시 마흔다섯 살 슈코와 열다섯 살 미우미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10대 소녀와 40대 여성의 상반된 감성. 이 부분은 『하느님의 보트』와는 다르게 흥미로운 점이었다. 나는 슈코의 사랑도, 미우미의 사랑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시점으로 읽고 있노라면 슈코는 이래서 이런 사랑을 하고, 미우미는 이래서 이런 사랑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읽었다.

 

이 책의 흥미로웠던 점 중 또 하나는 소설에 쓰인 시점과 비중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라 슈코-하라 다케오-네기시 미우미, 세 명의 삼각관계에 초점이 맞춰있는게 아니라 슈코와 슈코만의 하라 다케오, 미우미와 미우미만의 하라 다케오로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슈코와 미우미의 만남이 이들의 첫 만남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중심은 이 둘이 이야기하는 하라 다케오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슈코와 미우미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게 만드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마냥 위험하고 비도덕적이며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을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의 여자친구까지 인정하는 슈코의 이야기, 아버지뻘의 남자인 슈코의 남편 하라 다케오와 첫 경험을 하는 미우미의 이야기가 소설의 전부였다면 말이다.

 

세 살 때 미국으로 떠나 갓 일본에 돌아온, 사랑에 저돌적인 맹랑한 소녀 미우미. 결혼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그의 사랑만을 간절히 원하는 슈코. 이 두 여자가 몇 번의 만남을 반복하고 서로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 서로를 향한 질투, 그리고 동경마저 솔직하게 고백하는 부분들이 재밌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질투잖아, 그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질투? 하지만 아직 어린애인걸, 말도 안 돼.”

  “바로 그거야. 아이와 어른의 중간, 네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밖에 가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생명력이 저 아이에게는 있으니까.” (p.37)

 

소설의 제목인 ‘잡동사니’에 담긴 의미는 슈코의 사랑이나 미우미의 사랑을 뜻하는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사진이 장식되어 있다. 창가에는 관엽식물을 심은 화분이 세 개 놓여 있다. 남편이 손수 만들었다는 가구는 하나같이 낡고 퇴색되었다. 둥그렇고 큼지막한 털실 뭉치가 들어 있는 바구니, 의자에 앉은 앤티크 인형.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사야카 씨가 말했다.

  “너무 어질러져 있지? 당최 뭘 버리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말았다. 딱히 어질러져 있다는 생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 방은 전혀 어질러져 있지 않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추억의 물건들이네요.”

  엄마가 한마디 거들자 사아캬 씨는 손에 든 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잔을 천천히 흔들어 백포도주를 회전시킨다. 그리고 말했다.

  “잡동사니들뿐이에요.”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하지만 어쩐지 자랑스러운 듯이. (p.293-294)

 

바로,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두는 사야카 씨의 사랑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광기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잡동사니들뿐’이라는 말이, 내겐 어쩐지 ‘사랑뿐’이라고 들렸다. 어질러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되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잡동사니에, 죽은 남편에 대한 사야카씨의 사랑이 담긴 것이라고.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잡동사니들이 전부라는 것이 쓸쓸하지만, 모든 잡동사니가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 전부이기에 그녀는 어쩐지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을 것이다.

 

  “분명 좋은 어머니이실 것 같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했다 싶었는데 미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건, 하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건, 슈코 씨가 생각하는 ‘좋은 어머니’가 어떤 것이냐에 달려 있죠.” (p.192)

 

슈코와 미우미의 사랑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사랑이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 그 외 인상깊었던 구절들 *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강하게, 내 자신이 미미를 눈부시다고 여겼던 것을 깨닫는다. 미미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주는, 그건 눈부심이다.

(p.231)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은 모두 눈앞에 있는 인간을 그저 눈앞에 있는 인간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아닌, 그렇다고 슈코 씨 같은 성인 여자도 아닌, 네기시 미우미로만 나를 본다. 따라서 나는 존재할 수 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증거(아마도)로 하라 씨는 종종 내게 소홀히 대하진 않을 테니까, 하고 말한다. 그건 하라 씨의 의도적인 말실수랄까, 일부러 그런 말을 골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가족 모두가 솔직한 것이다. (p.269)

 

핸들을 잡고 전방의 차량 흐름을 주시한 채 어이없는 내 자신을 속으로 비웃었다. 나는 남편에게 지배당하고 싶어 못 견디면서 동시에 그 이전의 나를 고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는 바로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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