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맨 - 제2회 골든 엘러펀트 상 대상 수상작
이시카와 도모타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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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없는 옆집 아저씨, 원빈이 주연한 영화 <아저씨>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희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좆같은 건지 내가 보여줄게.”

 

<아저씨> 상영 당시, 저 대사는 ‘내일’과 ‘오늘’이라는 표현의 어색함 때문이었는지 많은 관객들에게 조금의 오글거림을 선사했다지만 내게는 누가 뭐래도 명대사였다. 원빈이 연기한 차태식의 ‘내일만 사는 놈’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저 대사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너 나한테 죽는다.’지만 나는, 한 때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내일도 보고 살았을 차태식이 생각나서 먹먹했던 관객이었기 때문에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이 책, 이시카와 도모타케의 『그레이맨』 서평을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로 시작한 건 『그레이맨』 속 구절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살아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소중한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어. 당신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p.394)

 

<아저씨>에는 차태식이 유일한 ‘오늘만 사는 놈’이지만, 『그레이맨』 에서는 ‘우리’다. 사유리, 료타로 등등 죽음의 심연에 빠져있던 그들을 ‘회색 남자’가 구해낸다. 자신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며, 특히 자살을 각오한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면서 말이다. 물론 그가 이런 재능을 갖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그를 살게 한 복수, 그에게 그런 복수를 갖게 만든 처참했던 사건. 그래서 그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에.

 

아닌 게 아니라 로쿠조의 말이 맞았다. 복수심 같은 마이너스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자의 영혼을 소모시킨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그 같은 감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거기에 또 다른 감정이나 가치를 꿰어 맞춰서 대강 절충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즈키 레이라는 자는 그 강인한 정신력으로 복수심을 결코 내버리는 일 없이 깊이 간직한 끝에 목적을 이루었다. (p.452)

 

<아저씨>의 차태식은 전당포 귀신이었던 자신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해준 소미를 잡아간 내일만 사는 놈들을 찾아내 처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레이맨』의 그레이는 범인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는 그 잘못된 구조에 복수하고자 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삶을 이어가는 이유였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범죄에는 범죄였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범죄를 행한 범죄자였으나 그의 범죄는 또 다른 선(善)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자살을 결심한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공범'이라는 필요로, 명목으로 그들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의 재능으로 살아난 한 사람, 료타로가 회색 남자였던 그를 '그레이'라 부르면서 그는 회색 남자에서 그레이맨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영웅들보다 자신에게 붙는 호칭을 마음에 들어했던 영웅이었다. 내가 『그레이맨』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가와의 인터뷰 속 작가가 말하는 ‘약자 출신의 영웅’말이다.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고 오롯이 읽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시대의 영웅, 그레이의 힘이 컸다. 어느날 갑자기 마주하게 된 처참한 사건으로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버린 그. 무지막지한 영혼 소모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복수심을 결코 내버리지 않았던 그. 료타로가 ‘그레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인간을 초월한 존재, 그제야 겨우 자신이 거기에 이르렀다는 실감이 들어서 무척 기뻤다던 그. 그런 그를 생각하면 많이 먹먹해지는, 제2회 골든 엘러펀트 상 대상 수상에 빛나는 이시카와 도모타케의 『그레이맨』이었다.

 

 

 

* 인상 깊었던 구절 (서평에 인용한 구절 제외) *

 

"남의 죽음을 예언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으로 향하려는 사람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거죠. 당신은 침울한 사람과 슬퍼하는 사람을 분간할 수 있나요?"

"그런 정도라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면 극한의 궁지에 몰려 있는 인간을 분간할 수 있어요.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사인을 보내는 법이에요. 하지만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문제죠." (p.219)

 

몸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 폐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이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절망감. 몸의 세포가 모조리 다 타버릴 듯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 목이 졸려버린 슬픔.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자기혐오. (p.284)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었거든요."

불쑥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이곳을 내 자리로 정했어요." (p.289)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야말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그레이에게 구조됐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런 썩어빠진 세상에 저할할 줄 아는 사람이 있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그래서 그레이를 따라 나섰죠. 지금도 이 잘못된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레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될지 꼭 지켜보고 싶어요." (p.290)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돈에 얽힌 문제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말을 바꾸자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거야. 물론 질병이나 그 밖의 불행한 사연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돈에 얽힌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야." (p.331)

 

"나는 미국이 결백하냐 아니냐의 논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하지만 만일 미국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 나라의 건물을 파괴하고 국민이 죽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면 그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

그레이는 잠시 한 호흡을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제 나라의 영리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사용된 나노테르밋 폭탄은 그야말로 붕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 (p.366)

 

"그레이는 처음부터 재분배를 생각한 게 아니라 권력자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군요?" (p.419)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나는 그레이를 절망의 심연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레이가 나를 죽음의 심연에서 구해주었듯이. (p.437)

 

비가 내리는 날은 날씨가 좋지 않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비가 내리더라도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있을 뿐,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p.470)

 

비가 내리더라도 날씨가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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