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과 사귀다
이지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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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마음을 슬쩍, 혹은 과감히 보여주는 50개의 공간들을 이야기하는 책답게 나는 <그곳과 사귀다>를 나만의 그곳에서 읽었다. 감성이 충만해지는 늦은 밤에 ‘내 방’에서, 자주 찾는 ‘카페’ 나만의 지정석에서, 출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등등. 늘 그렇듯 나의 일상의 공간들에서 읽었지만, 내 일상을 채우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 그런지, 책을 읽는 공간들이 반짝 반짝 빛나고 새롭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이 생각났는데, 올해로 만난 지 6년이 되는 친구 K양이다. K양과 나는 만나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면 3시간은 기본이요, 5시간도 거뜬히 대화할 수 있는 지칠 줄 모르는 대화 상대다. 지금이야 돈을 벌어서 카페도 가고, 밥집도 가서 이야기하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해 갓 대학생이 된 그 때의 우리는 한 푼이 아쉬웠다. 그런 우리가 대화를 하기 위해 선택했던 공간은 공원, 도서관 앞 벤치, 백화점 앞 광장 같은 곳이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라거나, 도서관 이용을 위해, 쇼핑을 위해 그 공간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대화가 목적이었던 우리. 나는 K양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을 통해, '공간'은 공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배웠다. 그 공간에서 보낸 시간, 공간에 함께 있었던 상대,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들. 그 공간을 채운 모든 것들이,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중요한 것임을 <그곳과 사귀다>를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50개의 공간들을 가장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는 곳 / 웃기도 울기도 하는, 여러 감정을 만나는 곳 / 잊었지만 기억하기 위해, 한 번 더 돌아보는 곳 / 어제와 오늘을 다르게 만드는, 순간을 마주하는 곳이라는 크게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각각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야기와 함께 그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공간들이 담긴 사진도 함께.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공간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 뒤에 실리는 ‘~에서 만난 Her, His story'다. 그 공간이 우체국이라면 우체국을 방문한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고, 그 공간이 산후조리원이라면 산후조리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간에 대한 저자만의 기억을 넘어, 일상에서 마주쳤을지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노트를 펼쳐서 그 공간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쓰인 몇몇의 공간들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훗날 다시 읽었을 때, 그 공간은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공간들을 되돌아보며, 소박한 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선물해 준 이 책과 함께 다시 읽고 싶다.

 

 

 

* 인상 깊었던 구절 *

 

아, 그냥 흙과 미끄럼틀만 있으면…… 서로 마음을 나눌 곳만 있다면 인연이 될 수 있구나. (p.34)

 

동창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의 옛날을 안다. 그렇기에 현재가 더 편안하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추억한다는 것은 이렇게 모든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함께한 시간들이 있기에 오늘이 어떤 모습이든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p.43)

 

감정이 변할 때마다 우리 발길이 향하는 곳도 변한다. 지금 당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는다면 당신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지도. (p.100)

 

물론 문자 메시지나 전화와 같은 '즉각적인 전달'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지만 때론 3일 전쯤 우체국으로 달려가 편지지에 마음을 적어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이 점점, 조금씩 전달되는 3일 동안이 꽤 행복할 테니 말이다. (p.148)

 

헌책방에서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헌책방엔 우리들의 헌 기억들이 있고, 헌 시간들이 있다. 지금보다 어쩜 더 세련되고 더 투명한 그런 시간들이. 헌 시간들이 다시 반짝반짝 빛난다. (p.168)

 

이것은 분명하다. '끝이 두려워' 목표점을 너무 멀리 잡아둔 사람보다 '끝이 있는' 그들이 훨씬 뜨겁게 살고 있다는 것. (p.184)

 

모두 때가 되어 온 것들, 때가 되어 버려진 것들이 가득한 재활용센터에서 맺고 끊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상대방이 납득할 만하 이유가 있다면 헤어짐의 이유가 더 분명하겠지만 그냥 '때가 됐어'라는 말이 더 분명한 이유가 될 때도 있다. (p. 235)

 

유행에도 뒤처지고 낡아 빛이 나진 않지만 그 안에 숨은 이야기가 가득하기에 그 어떤 물건보다 세련된 것이다. 나도, 우리도 오래된 이야기들을 잊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마음이 '그득그득'할 것이다. (p.248)

 

우리는 많이 읽고 듣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우리 앞에 있고 접시에 무엇을 담는지는 우리 권리다. 인생도 뷔페다. (p.272)

 

몰입하는 시간이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지금 이때를 아는 것, 이때가 지나면 무언가가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새벽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몰입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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