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레드 로드
모이라 영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 『블러드 레드 로드』의 저자 모이라 영은 배우이자 댄서, 오페라 가수 등으로 활동하다 작가로 데뷔한 드문 케이스의 작가다. 첫 소설인 『블러드 레드 로드』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품에 수여하는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코스타 북 어워드’를 수상했고,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등을 만든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 리들리 스콧이 정식 출간 전부터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이라 영의 인생 2막은 그야말로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작가에게 있어 인생 2막을 화려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인 만큼, 소설 속 주인공의 삶도 굉장히 궁금해진 소설이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러드 레드 로드』의 주인공 사바 역시 쌍둥이 오빠 루의 납치로 본의 아니게 인생 2막을 맞이하게 된다. 화려하게 시작한 작가의 인생과는 대비되는, 암울한 시작이었지만 말이다.

 

  "루가 앞장선다. 언제나 앞장서고, 나는 그 뒤를 따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게 옳은 거니까.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니까. 루는 아름답고, 나는 못생겼다. 루는 강인하고, 나는 비쩍 말랐다. 그는 나의 빛이다. 나는 그의 그림자고, 루는 태양처럼 빛난다. 그래서 그들이 그를 찾아오는 게 그렇게 쉬웠을 것이다. 그냥 그의 빛만 ."라고 말하던 열여덟 소녀 사바는 더 이상 없었다, 자신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은빛호수에 낯선 네 남자가 찾아와 아빠를 살해하고, 쌍둥이 오빠 루를 납치해 간 그 날부터.

 

  겉으로 보기에는 또 하루의 평범한 날 같았다. 어제, 지난주, 한 달 전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전에는 몰랐다. 모든 게 멀쩡하다가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서 그 순간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조금도 몰랐었다.

  아니면 이게 꿈인지도 모른다. 폭풍과 아빠를 죽이고 루를 납치해간 검은 옷의 남자들에 관한 길고 끔찍한 꿈. 어쩌면 금방 깨어날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정말로 이상한 꿈이라고 다 함께 고개를 흔들며 말하게 될지도.

  오른손이 뻐근하게 아프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더럽고 찢어진 천이 손에 감겨 있다. 그 부분을 찔러 보자 팔을 타고 날카로운 고통이 흘렀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다. (p.52)

 

  나는 이 구절이 참 좋았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해보지만 끝내 인정하게 되는 사바의 내면이 담긴 구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바였어도 저랬겠다 싶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또, 이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루를 되찾는 여정을 통한 사바의 성장이 더욱 더 견고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블러드 레드 로드』와  『헝거 게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설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헝거 게임』은 게임이 펼쳐지는 '경기장'답게 전개되는 공간이 축약적이고 다소 제한적이라면, 『블러드 레드 로드』는 은빛 호수에서부터 자유의 평원까지 전개되는 공간이 광대하고, 무궁하다. 그래서인지 등장하는 인물들도 상당히 많다. 동생 에미와 함께 제일 먼저 도착했던 두물머리에는 머시 아줌마가 있었고, 희망시를 향해 가던 길에 루스터 & 미즈 핀치 부부를 만나고, 핀치 부부에 의해 들어가게 된 콜로세움에서는 루에 대한 정보를 준 헬렌과 자유의 매의 일원인 매브와 에포나, 애시를 만난다, 루 다음으로 사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잭을 만나는 곳도 콜로세움이다. 자유의 평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이케와 토모까지. 루를 되찾는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기에, 사바와 에미에게 동행자가 많았던 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은빛호수부터 함께했던 영리한 까마귀 네로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천사라고 부른다.

  한 번도 싸움에 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매번 철창 안으로 들어가면 그저 불타오르는 시뻘건 열기에 몸을 맡겨 버린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길 때까지 나를 싸우게 한다.

  만약 내 상대가 세 번째로 패배한 상황이라면, 그 애가 공개처형을 당하러 끌려가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나는 그저 등을 돌린다. 하지만 소리는 들린다. 찰로 흥분한 군중들이 패배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며 내지르는 함성 소리.

  나는 마음을 닫아 버린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나가서 루를 찾아야 한다. 그는 여전히 바깥 어디선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들은 그를 여기, 희망 시 어딘가에 붙잡아 두고 있을 것이다. 희망 시. 여기는 머시 아줌마가 말한 대로 지옥구덩이다. 쓰레기더미에서 기어 나온 온갖 더러운 범죄자들이 이곳으로 오는 방법을 찾아 내는 것 같다. (p.164)

 

  루를 되찾는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사바는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콜로세움의 1인자로 등극한다. 죽지 않기 위해 싸움에서 이겼고, 매번 이기다보니 얻게 된 별명과 자리다. 죽음과 천사가 공존하는 별명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죽음의 천사보다 더 아이러니한 건 희망시다.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시가 바로 희망시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바는 끝내 살아남았고, 콜로세움에서 만난 자유의 매 일원인 매브-에포나와 손을 잡고 전투사를 구출, 희망시를 불태운 뒤 떠난다. 그렇게, 희망시에서 그들의 희망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희망이었다. 이케와 토모가 합세하면서 그 수가 더 많아진 사바 무리에겐 더 큰 고난과 희생이 따른다. 힘겨운 여정이지만, 서로에게 서로가 존재하기 버틸 수 있었다.

 

  당연히 뭔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기쁨이나 안도감이나 승리감이나……, 어쨌든 뭔가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p.484)

 

  루가 잡혀있는 자유의 평원에서 그들은 루를 되찾음과 동시에 자유를 되찾는다. 끝내 되찾은 자유인데, 어쩐지 끝은 좀 허무하다고 사바는 생각했다.

 

  루가 고개를 돌리고서 미소를 지었다.

  "어이, 그 뒤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난 전혀 모른다고. 이리 와서 앞장서."

  루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갔다. (p.497)

 

  그렇게, 길고 길었던 여정은 마침표를 찍는다.

 

  『블러드 레드 로드』에서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에미에 대한 사바의 태도였다. 어린 에미가 자신과 있는 것보다 어느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생각이긴 했지만, 그 태도가 장소를 옮길 때마다 계속해서 나오고, 그게 반복되다보니 꽤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사바가 에미에 대한 태도를 반복함으로써, 사바의 뜻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여정을 함께하는 에미의 성격을 나타내려고 했을지라도 말이다.

  영화가 소설을 완벽하게 구현하진 못하겠지만, 은빛호수에서 희망시, 콜로세움, 자유의평원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 『블러드 레드 로드』에 이은 2권 『Rebel Heart』가 2012년 후반 미국에서 출간된다는데, 2권에서는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p.s.번역서 띠지나 홍보문구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매체인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블러드 레드 로드>에 대해 “그야말로 파워풀한 데뷔작! 건조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문장이 『로드』의 코맥 매카시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헝거 게임』의 팬이라면 반드시 빠져들 책.”이라고 언급했다. 두 작품 중 『헝거 게임』을 굉장히 재밌게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든 동시에 비교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비교는 두 작품 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을 통해 두 작품 각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비교를 말한다.^^) 『헝거 게임』을 읽은 사람이라면, 나처럼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할 거라 생각한다.

 

p.s.2 서평의 제목을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갔다.'라고 붙였는데, 전자는 가장 좋아하는 구절의 마지막 문장이고, 후자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장난삼아 두 문장을 붙여봤는데, 붙여놓고 보니 본래 한 구절인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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