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멀지 않은 미래, 지구는 전쟁과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그 후 들어선 새 정부는 인간의 격렬한 감정, 그중에서도 사랑을 질병으로 규정해 치료약을 만든다. 18세가 되면 모든 사람이 테스트를 거친 후 치료를 받고, 국가가 지정한 상대와 결혼해 정해진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  

 

  새 정부가 인간의 격렬한 감정 중에 사랑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약을 만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치명적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이 다름아닌 '사랑'이기 떄문이다.

 

  주인공 레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외롭게 자란 소녀다. 레나의 어머니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던 병자에,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레나는 자신의 어머니의 나쁜 피가 자신의 몸속에도 흐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어서 치료를 받고 안정적으로 사회에 편입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널 사랑해, 그들도 이것만은 빼앗아갈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며 절벽에서 몸을 던지던 어머니의 기억은 그녀에게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생한 공포로 남아 있다.

 

  사랑에 살고, 끝내 사랑에 죽은 엄마의 최후가 레나에게 '사랑'은 공포다. 이런 레나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루 빨리 치료를 받고 국가의 관리 보호 대상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치료일이 눈앞에 다가온 어느 날 한 소년을 만나면서 그녀가 보고, 또 믿어왔던 세상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부터가 이 소설의 진정한 시작이라 생각한다. 레나의 인생에 있어 '자유'와 '안정'의 대립이 펼쳐지고, 그 대립 사이에서 레나의 선택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레나의 갈등과 선택은 책을 읽는 내게도 전해져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선택을 해 준다는 게 나는 좋았다. 스스로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도.' 라던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평범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레나 앞에 알렉스가 나타나면서 소설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고 있는 것을 기분 좋은 통증이라고 생각하고, 바보처럼 웃고 싶어지고, 이제까지의 시간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며, 이 병이 나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레나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레나의 변화는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레나가 그토록 '사랑'을 거부해 온 것은 어쩌면, 누구보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나는 알렉스를 만나면서 '사랑'을 알게 되고, 나아가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모르겠어? 엄마는 모든 걸 다 남겨 둔 거야. 엄마는 바로 그것, 그것 때문에 모든 걸 다 포기한 거야. 사랑, 아모르 델리아 너보사. 뭐라고 부르건 간에 그것 때문에 엄마는 나를 버렸어. (생략) 엄마는 용감했어.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게 진짜 문제였던 거야. 엄마는 치료를 원하지 않았고 아빠를 사랑하는 걸 멈추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 엄마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던 걸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들이 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가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p.367~368)

 

  이상한 일이었지만 골목에서 그 일이 있은 직후 나는 내 이름의 진짜 의미, 엄마가 내 이름을 막달레나라고 지은 이유와 오래 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요셉이 막달레나를 포기한 이야기가 모두 한꺼번에 이해되었다. 나는 그가 포기한 데 이유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녀를 놓아준 것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불사하고 그녀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사랑 때문에 그녀를 포기했다. (생략) 그것은 어쩌면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이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p.417)

 

  모든 사람이 레나 같고, 같을 수 있다면 이 책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아이들에게 치료는 오직 델리아만을 예방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새롭고 신선하고 더 훌륭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치 찌그러진 쇳조각을 불에 담금질하면 빛나고 반짝이는 날카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다. 내가 원해 왔던 전부다. 치료는 바로 이런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준다.' (p.123)

 

  레나가 알렉스를 만나기 전에 갖고 있던 생각이다. 엄마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던 레나는 치료가 '새로운 삶'을 가져다 줄거라고 믿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비단 레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은 『딜러리엄』 속 다른 인물일 수도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중 누군가일 수도 있다. 이처럼, 로렌 올리버는 강렬한 소설 『딜러리엄』 를 통해 다른 이의 방식대로 사느냐, 내 방식대로 죽느냐, 자유인가, 안정인가 등 수많은 질문들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것은 젊음들만의 특권이자 저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법을, 삶을 선택하는 법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이 물음이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다.

 


*인상깊었던 구절

 

사랑은 당신이 사랑을 소유할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당신을 죽게 한다. 하지만 엄밀히 그건 맞는 말이 아니었다. 사랑은 형을 선고하는 자인 동시에 형을 선고 받는 자였다. 사형집행인. 칼날. 마지막 순간의 구원. 헐떡이는 호흡과 머리 위를 빙빙 돌아가는 하늘.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기도. 사랑, 그것은 당신을 죽게 하고 또 동시에 살게 한다. (p.436)

 

“가끔씩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어야 행복해진다는 거 알지?” (생략)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가끔은 불행해야 한다는 거, 그거 알지?” (p.29)

 

인생이란 묘하다. 뭔가를 기다릴 때는 아무리 기다려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가, 돌연 기다리던 일이 찾아오고 나면 사람들은 그제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p.55)

 

삶의 가장 신비한 점은 사적인 영역이 철저히 비틀리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간다고 해도,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혹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이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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