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라 - 하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높은 파도는

  수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초조함의 대상이지만

  서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스릴을 안겨준다고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했다.

 

  언젠가 읽었던 에세이에서 마주했던 구절이다. 이 구절이 내게 와 닿았던 건, 나는 서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영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실제로 서핑을 하고, 수영을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 구절을 읽던 내가 서핑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공감했다면, 이 구절은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구절 중 한 구절이었을 것이다.

 

  이 책, 후지타니 오사무의 소설 『배를 타라』는 일본 문단계의 대표적인 중견작가 후지타니 오사무가 스스로도 트라우마였기에 쉽게 들추어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은 소설로 2010년 서점 대상 후보 7위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라고 한다. '서점 대상'은 일본 서점 직원들이 그해 최고의 소설로 뽑는 상이라고 하는데, 『밤의 피크닉』 『도쿄타워』 『골든슬럼버』 『고백』등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로 『1Q84』는 2010년 서점대상 후보 10위에 랭크되었다고 한다.

 

  나는 『배를 타라』가 서점 대상 후보 7위에 올랐다는 사실보다는, 그 뒤에 붙는 '음악 청춘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책을 완독하고나니 '음악 청춘소설'이라기보다는, 음악을 전공하는 청춘들의 소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음악을 전공하는 청춘들의 소설'이라는 점이 이 책을 읽게하는 힘이자, 최대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음악'은 『배를 타라』 속 음악을 전공하는 청춘들에게 인생인 동시에, 우리의 인생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힘들 거야. 고생할 거야." 할머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앞으로 어떤 고생이 기다리는지 몰랐던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렇지. 음악이든 음악이 아니든 결국은 고생이지." 할머님께서는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上, p.255)

 

  전공하던 첼로를 그만두는 것을 떠나서, 음악의 길을 뒤로하고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쓰시마에게 쓰시마의 할머님이 해주신 말이다. 쓰시마 할머님의 말씀은 그 당시의 쓰시마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음악이든 아니든 결국은 고생이지.”라는 할머님의 말씀이 내게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너도, 고생이 많다.’로 다시 읽히면서 나에게도 만만치 않은 위안이 되었다.

 

 

  출판사 리뷰에서 ‘음악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자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전적인 스토리가 상당 부분 녹아 든 작품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은 합주, 피아노 트리오춿 같은 협주, 그리고 독주와 합주협주 등을 하는 모습이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어 클래식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는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는데,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음악적 소양이 부족해서 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때면, 나는 내가 직접 봤던 클래식 공연과 음악 관련 드라마를 떠올리며 ‘이런 모습이려나-’하고 상상하며 읽었다. 또, 처음 접하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그때 그때 검색하여 찾아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를 들었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었다가, 생소한 곡이면 생소한 곡대로, 익숙한 곡이면 익숙한 곡대로 나올 때마다 찾아 들었다. 개인적으로 음악을 들으며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클래식 음악이어서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배를 타라』는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주인공 쓰시마의 학창시절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첫사랑 미나미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인 가나쿠보 선생님이다. 가장 소중했고, 가장 좋아했던 두 사람인데, 두 사람에 대한 회상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씁쓸하다 못해 쓰디 쓰다.

 

그건 마치 교통사고처럼 어떤 시기에 하나의 경험을 하면서 누군가에 의해 떠밀리듯 어른이 되어버린다. '좋아, 어른이 되어야지.'라고 먼저 결심을 하고 그 다음에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없다. (上, p.8)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다. 나보다 멋지고 충실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몹시 고통스러운 인생을 견디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말해야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런 일상 어느 시점에서 현재의 모든 것이 저만큼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上, p.9)

 

  그러다 문득 ‘이제 이런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글은 내 인생 언제, 어딘가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는데 이유가 없으며, 내가 더 이상 자신에게 유예 기간을 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글을 쓴 것이다. 모든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그는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배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으며, 정신적 지주였던 가나쿠보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도 온전히 남아서 많은 생각을 하게했고, 어려웠던 ‘철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힘이 되었다. 가나쿠보 선생님의 말씀 중에 굉장히 인상깊었던 두 구절이 있다.

 

  ……나는 여러분이 왜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필시 그것은 여러분에게 음악이 아주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유행도 아니고 올바른 것도 아니고, 즐겁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에만 사람은 매료됩니다. 유행이나 올바름이나 쾌락도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져야 사람에게 호소력을 가집니다. 내가 철학에 삶을 바치려고 결심한 것은, 이 얇은 책 속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밀로의 비너스보다, 영화 속 여배우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보다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下, p.130)

 

  흔들리는 청춘 속에서 내가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매료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야 가나쿠보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난 것도 늦은 때는 아니지만, 내 학창시절에 가나쿠보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를 타면 흔들린다. 파도에 흔들리기 때문에 뱃멀미를 한다.” / (생략)

  “뱃멀미를 하는 건 괴롭다. 그래서 파도가 잦아들길 바라지만 파도는 잦아들지 않는다. 파도가 잦아들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바다가 평온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뱃멀미는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흔들림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뱃멀미가 사라졌을 때 배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른들의 거짓말이다. 어른은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한다. 그것도 자신보다 젊은 사람에게. 뱃멀미가 가벼워졌다고 해서 배가 계속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된다.” (下, p.362)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유명한 시 구절처럼, 『배를 타라』속 음악을 전공하는 청춘들도, 이 책을 읽는 나도, 이 세상의 모든 청춘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청춘’이라는 배에 탔기 때문에.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수영을 하는 사람과 서핑을 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늘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높은 파도를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내게 짜릿함과 행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서핑을 할 것인가.

 

 

 

* 인상깊었던 구절들

 

"젊었을 때 가능한 한 많이 흡수하는 것이 좋다. 자신에게 어떤 음악이 맞는지 결정하려면 어떤 음악이라도 해볼 수밖에 없다. 포레와 바흐 정도라면 어느 쪽이라도 연주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앞으로 성장해서 <자신이 완성>되면 역시 취향이라든지 우수한 분야갸 생기게 된다. 지금은 어떤 곡이라도 열심히 연주해두는 게 좋아. 젊었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 (上, p.353)

 

"음악을 개성 있게 연주하는 건 간단하지. 어떤 음도 속일 수 있다. 가장 어려운 건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이야."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할아버님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다. 위대한 음악가 중에서 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리히터의 피아노나 푸르니에의 첼로를 레코드로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악보에 적혀 있는 그대로 연주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실제로 한다고 해도 매우 드문 일이다. (上, p.366)

 

"철학은 대학에 읽는 책을 읽고 이미 고인이 된 훌륭한 사람의 사상을 분류하거나 정리 정돈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이 반드시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다." (上, p.376)

 

메츠너 선생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당신은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었스비다. 음악에 공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공부 위에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이 당신입니다. 공부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이 내 앞에서 줄곧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下, p.37)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 (생략)

"이히 바이스 오이히 니히트(나도 모릅니다)." / (생략)

"아바 이히 그라우베 다스 데 뮤직, 데 이히 슈피레 마인스 이스트

(그러나 나는 내가 연주하는 음악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下, p.38)

 

"쓰시마는 예술가구나. 놀리는 게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난 쓰시마를 조금 존경하고 있어." / (생략)

"쓰시마는 탐욕스러워." / (생략)

"음악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하지? 아마,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철학에서도 그럴 거야. 예술가란 그런 거야. 그런 탐욕스러움이 나에게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를 존경해." (下,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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