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책들, 책들... 내 집을 내 집이게 하는 책들이 활활 타는 것은 상상만으로 괴로웠다. 접고 표시하고 밑줄 치고 메모해둔 수백 개의 흔적은 다시 같은 책을 산대도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몸뚱이 없이는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리나케 집을 떠났다.

(p.51)


"유의미한 일들은 대체로 번거롭지. 그 게임엔 '용기'라는 개념도 있어. 어떤 순간에 깃발을 꽂으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되거든. 이때 인간은 주변 존재들에게 용기를 마구 뿜어서 영향을 미쳐. 신체 능력은 엘프나 드워프보다 딸리지만, 희망이랑 용기가 가득 찼을 때에는 막강해지는 거야."

(p.62)


곽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읽어준 임의 글은 문장도 단어도 엉망진창으로 틀린 글이었는데 너무 외로운 이야기여서 나는 난데없이 터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불쌍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애의 슬픔이 뿜어내는 광채에 놀란 것이었다. 혹시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가진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중요한가. 어른이 되어 읽은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처럼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 글쓰기일지도 몰랐다.

(p.135)


인간은 불행의 디테일을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확히 불행해지는 존재 같았다.

(p.151)


사실 꽤 많은 편견이 우리를 돕는다. 판단의 시간을 단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판단을 좀 미루고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간단하지 않으므로 편견도 뭉툭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무구하게 세계를 감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에서는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깜깜한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그 말을 들었다. 하마도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자신을 온통 뒤덮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 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지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사랑은 마음에 탄력을 준다. 심신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도 하고 돌아오게도 한다.

(p.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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