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물을 주고 볕을 준 데에 보상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를 배울 때에도 그렇게 배웠다. 해피 엔딩 새드 엔딩이 중요한 게 아니고, 다만 항상 진전시켜야 한다고.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작품을 다루는 수업을 들을 때에도 내러티브가 아닌 무언가, 그게 형식이건 감정이건 간에, 무언가는 반드시 진전되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전 페이지가 이 페이지와 정확히 똑같은 내용일지라도 그 반복은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한 전진을 일으킨다. 어디로든 가기는 가야 한다.

(p.108)

미소는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고 담배를 문다. 스카치 위스키가 튤립 모양에 스템이 있는 유리잔(꼬냑 잔이 보통 이렇게 생겼다) 벽에 금빛 물방울 자국을 남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에선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 내내 미소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느라 고단했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안도했다. 주인공의 인생이 피곤하기는 해도 살아지기는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들도 나처럼 포기할 수 없는 작고 비싼 것을 하나씩 간직하고 살고 있다는 점에서.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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